25화
그는 나무에 기대 시야를 확장했다. 온갖 짐승과 식물들이 화한 신령들은 영토를 채우고 바삐 움직인다. 모두가 중급의 영혼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덕이 높지 못한 인간과는 달리, 신령들은 덕이 높아야만 영혼을 지니고 그 영혼은 상급이다. 인간계보다 인구는 적어도 훨씬 평화롭다는 뜻이었다.
백호의 시야에도 큰 싸움이나 분란의 조짐은 특별히 보이지 않았다.
“……연화도 얌전하게 있군.”
신령들의 영혼 사이 인간의 영혼이 감지된다. 백호가 데려온 여인, 연화였다.
거리가 있어도 볼 수 있는 백호의 눈이 연화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녀는 호접에게서 받은 자수틀과 실로 소일거리 자수를 놓는 중이었다.
본래 천리안은 각 일족의 안위를 살피는 데에만 쓴다. 큰 문제가 생긴 긴급한 경우 백호는 힘을 들여 마음의 눈을 사용해 일의 앞뒤를 살피고는 했다.
그런 힘일지라도 연화에게서 떨어져 있을 때마다 그녀를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스물네 시간 그녀만을 보고 있을 것 같았다. 애써 참고 있었는데 뱀의 일족이 저지른 일 이후에 백호는 이제 참지 못하고 가끔씩 연화를 훔쳐보고는 했다. 말 그대로 훔쳐보는 기분이라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가느다랗고 흰 손가락이 바늘을 쥐고 조심스럽게 바느질을 했다. 아주 집중을 했는지 동그랗고 까만 눈은 반짝이며 자수틀만 바라보았다. 매끄러운 이마 근처로 검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조금 흘러내려 뺨을 스쳤다.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손을 저어 그녀의 근처로 시원한 바람을 불게 했다. 집중한 눈은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머리카락이 살짝 날려서 귀를 간지럽혔다.
‘신령계에 인간이 재미있을 만한 것이 많지 않긴 하지.’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미 연화가 온 지 스무 날이 지났다. 붉은 달은 질 생각이 없고, 그는 그녀를 볼 때마다 몸이 뜨거워졌다. 아마 이번 해의 붉은 달은 한 달 만에 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변덕스러운 달님은 때마다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달랐다. 만약 길어진다면, 물론 연화를 달이 질 때까지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것이 두 달이든, 일 년이든.
며칠 전의 일로 연화가 놀라고 상심했을까 걱정했지만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은 후 다행히 큰 문제 없이 일어났다. 풀 죽고 걱정 어린 얼굴의 백호에게 연화는 맑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백호 님.’
그녀는 오히려 관련된 자였던 우현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수조의 주술에 걸렸던 그를 아는지라 백호도 그를 크게 탓하지는 않았다. 다만 더욱더 수련하여 그따위 질 낮은 주술에 걸리지 말라고 호령하고 우현의 엉덩이를 걷어차 밖으로 내쫓았을 뿐이었다.
우직한 곰의 신령은 사색이 되어 도망을 나갔다. 아마 오랜 수련을 거친 후 백 년쯤 뒤라면 다시 궁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어느 순간 연화가 바람을 의식하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신령계의 낮이라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다. 아무런 걱정 근심 없이 만물이 평화로운 세계니라, 하고 백호는 자부심을 가지고 연화의 맑은 눈을 자신의 먼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검고 둥근 눈은 다소 어두웠다. 표정 역시 그늘이 져 있었다. 신은 잠깐 멈칫했다. 하늘 아래 모두가 평화롭고 행복한 이 신령계에서, 인간의 여인만이 유일하게 근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지?’
비록 불미스러운 사건은 있었으나…… 배를 곯기는커녕 매 끼니마다 진수성찬에 아름다운 비단과 옥으로 몸을 감싸고 시중드는 자들이 그림자처럼 연화의 뒤를 따라다닌다.
세상에는 곡소리 나는 곳 하나가 없으며 하늘은 언제나 쾌청하니 신령계는 인간계보다 훨씬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그것은 백호의 자부심일 뿐 아니라 애초에 상제가 그렇게 만들어낸 세상이다. 이곳에서는 그 누구도 필요 이상의 근심 걱정을 지니지 않았다.
하지만…….
‘너는 왜 그런 표정인 것이냐.’
백호는 자신도 모르게 발밑이 불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생전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
잠깐 벽에 기대 졸던 연화는 자수를 놓던 옷감을 떨어뜨릴 뻔하고 깜짝 놀라 깨어났다. 그리고 눈을 뜨고 한 번 더 놀랐다. 바로 코앞에 백호의 커다란 푸른 눈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백, 백호 님.”
“그래.”
그가 웃었다. 어딘지 조금 불안해 보이는 백호의 표정에 연화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방신인 그가 불안해 보이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마도 자신의 마음이 보인 게 아닐까 하면서 그녀는 수줍게 미소를 지었다.
알 수 없이 몸이 달아올랐던 며칠간의 기억은 연화에게 정확하지 않았다. 안개라도 낀 듯 흐렸다.
우현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다는 사실 정도는 기억이 났다. 다만 그사이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부적인 것이 기억나지 않았고 마치 남의 일처럼 지켜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임시라도 반려가 있는데 다른 이와 잠자리를 가질 뻔하다니. 자신의 몸이 비정상적으로 달았던 것을 기억하는 연화는 자괴감에 빠질 뻔했다. 다만 백호가 연화의 탓이 아니라며 다독여주었기 때문에 그녀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괜찮으냐?”
“그럼요. 저는 괜찮습니다.”
연화가 부드럽게 웃었다. 백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입술이 닿은 이마가 따뜻했다.
‘백호 님은…… 무섭지 않아. 괜찮아.’
여전히 육체적으로 압도적인 사내는 맞이할 때마다 조금씩 두려움이 앞섰다. 그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인간과는 다른 그 이질적인 분위기가 간혹 그녀를 엄습했다. 그럴 때면 피부에 소름이 돋고 몸이 오그라들 만큼 두려웠다.
하지만 백호는 나쁜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거칠지만 부드러웠고, 압도적인 힘을 지녔지만 그것을 연화를 겁박하는 데 쓰지 않았다. 두려운 사내였으나…… 동시에 그리운 사내이기도 했다.
연화는 지난 일이 생각나 괜한 부끄러움에 자수감을 만지작거렸다. 백호는 그녀의 손에 있던 옷감을 들어 하늘에 비춰보았다.
“예쁘구나.”
푸른 옷감 위에는 새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수 놓여 있었다.호랑이는 흰색이 아니어서 조금 아쉬웠다. 백호는 괜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게 조금 놀라면서 옷감과 바늘을 빼내어 옆의 탁자에 올려두었다.
“백호 님.”
“그래, 계속 불러라. 난 네가 나를 부르는 게 좋더구나.”
백호가 싱긋 웃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조심히 연화의 입술 위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부드럽다. 연화는 팔을 벌려 백호의 목덜미에 감았다.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충분히 애정이 느껴졌다.
만족스러워서 백호는 그녀를 끌어당겨 안고 자신이 의자 위에 앉았다.
“백호 님, 곧 시녀들이 올 텐데…….”
“괜찮아. 그만한 눈치들은 있는 아이들이니까.”
지난 일 이후로 예민해진 호접은 식사 때마다 자신이 선별한 시녀들만을 골라 시중을 들게 했다. 연화의 식사에 미약이 섞여 들어간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익숙한 시녀들이 역시나 익숙하게 백호와 자신의 정사 장면을 피하는 광경을 상상하며 연화는 볼을 붉혔다.
남자는 연화의 옷을 내리고 희고 투명한 피부 위에 입을 맞췄다. 소담하고 탐스러운 가슴을 베어 물고 빨면서 붉은 자국을 남긴다.
그녀는 다리를 벌리고 백호와 마주앉은 자세가 민망했지만 곧 그 사실을 잊었다. 백호의 단단한 양물이 다리 사이에 지긋이 눌렸다.
“조금 더 다리를 벌려라.”
수줍게 벌어져 있던 다리를 백호의 손이 더 넓게 했다. 희디흰 허벅지 안쪽의 피부가 빛 안으로 드러났다. 그는 허벅지 안쪽 가랑이 사이의 약하고 예민한 피부를 손으로 희롱하며 짙은 음모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하, 아…….”
움찔거리며 연화가 한숨을 뱉었다. 음모의 안은 이미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달콤한 쾌락에 그녀는 백호의 어깨를 잡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의 작은 입술 사이에서 나오는 뜨거운 숨이 백호의 목을 간지럽혔다.
“일부러 이러는 건지, 원.”
백호가 투덜거렸지만 연화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백호가 주는 감각에 집중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와 드러난 등을 쓰다듬는 커다랗고 거친 손. 휘어진 허리를 잡고 가까이 끌어당기는 압도적인 힘. 그녀의 몸이 완전히 파묻히는 넓고 단단한 가슴.
곧 그녀의 안으로 백호가 진입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골반이 힘겨웠다. 연화는 숨을 조절해 쉬면서 그를 받아들였고, 조금 더 앞으로 움직이며 남자를 품었다.
스스로 움직여 자신의 물건을 품어주는 연화를 보며 백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녀의 따뜻한 몸 속과 손 안에 잡히는 가느다란 몸, 자신만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담긴 애정.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그는 연화의 허리를 감고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녀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부드럽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연화는 다리로 백호의 몸을 감은 채 마치 아기처럼 그의 품에 안겼다. 아랫배 안에 품은 남자의 뜨거운 물건이 부드럽게 쾌락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으, 흐……!”
오래지 않아 그녀는 백호의 어깨를 물고 신음을 누르며 절정에 달했다. 희고 가느다란 몸이 달달 떨며 내벽을 조이자 백호 역시 더 참지 않고 쾌락을 맞이했다. 그녀의 안에서 체액이 섞여 둘의 사이로 뚝뚝 흘러내렸다.
쾌감에 한숨을 쉬며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화를 안고 백호는 눈을 감았다.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도 한 달 뒤에도 이 손 안의 작은 몸을 안고 계속해서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