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거목처럼 서서 내려다보는 백호의 눈에 사혈은 기가 질려 움찔했다.
그가 비록 용이 되기 직전의 이무기까지 성장했다고는 하나 실제 용과의 격차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도 그럴진대 사방신과의 격차는 셈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어느 정도 사방신과 어깨를 겨눌 수 있을 정도라고 생각했던 사혈은 자신이 착각을 아주 심하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노를 감추고 있는 신의 시선만으로도 양무릎이 형편없이 떨려 왔다. 그는 후들거리는 손을 맞잡았다.
“저는, 무슨 말씀이신지 정말로…….”
끝내 잡아떼려는 사혈의 말에 백호가 빙긋 웃었다. 물론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사특하며 멍청하기까지 한 뱀의 수장.
“내 궁에 다녀오는 길이다. 더 가리려 한들 별로 좋은 일은 없을 거야.”
“…….”
예상대로 백호의 방문은 그 때문이었다. 사혈은 속으로 딸 사영을 저주했다.
백호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설마 이무기까지 이룬 그대가 이런 짓을 벌일 줄은 상상도 못 했군.”
“아, 아닙니다. 이것은…….”
사혈은 이를 갈았다. 저 멍청한 딸년 때문에 자신과 일족이 위험해졌다. 그는 백호의 앞에 넙죽 엎드렸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제 미천한 딸인 사영의 짓이라.”
“허나 이 일에는 뱀의 일족만이 만들 수 있는 미약이 쓰였지.”
백호는 입 꼬리를 올렸다.
“내 반려의 몸이 아주 뜨겁고 열이 많이 올랐더군. 내 미약 중독의 증상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당황했을 거야.”
“그……것 역시, 사영이 멋대로 만들어서…….”
“그러나 그 약을 만드는 방법 자체는 그대에게서 왔을 것 아닌가, 사혈?”
거기에는 할 말이 없었다. 사혈은 엎드려서 눈을 굴렸다. 등으로 쏟아지는 사방신의 기운이 압도적이었다. 함부로 변명을 했다가는 이대로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제 딸이 백호 님을 지나치게 사모하여 상사병으로 죽겠다기에…….”
“…….”
“아비 된 도리로 저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저는 제 아이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혈은 떨리는 목소리를 지어내었다. 마음 같아서야 말을 이리저리 돌려 빠져나오고 싶었지만 백호는 그것을 허용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뱀의 일족은 물론 사혈 본인도 해를 입을 상황이었다.
뒤에 선 사영은 앞일을 예감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부친은 자신을 제물로 바칠 생각이었다.
“말이 번지르르하군.”
“정말입니다, 신이시여. 제 딸은 평소 착한 아이지만 사랑에 눈이 멀어 그만.”
백호의 웃음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결코 유쾌한 웃음은 아니었다.
“그래, 그래서 뱀의 일족은 이 일을 어찌 갚을 것인가.”
사혈은 침을 삼켰다.
사방신은 뱀의 일족 자체에 빚을 갚을 것을 요구했다. 사영 한 명의 죄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명백히 한 것이다. 하지만 사혈은 그 이상의 해를 입고 싶지 않았다.
“사, 사영의 목숨으로…… 갚겠나이다.”
그는 자신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치를 꺼내 들었다. 뒤에서 창백한 얼굴의 사영이 고개를 쳐들었지만 사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백호 역시 신경 쓰지 않았다.
“사영, 네 딸의 목숨이라!”
백호가 웃었다. 웃음소리는 다소 건조했다. 언제나 호탕하게 웃고 불같이 화내던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마치 얼굴 위로 가면을 쓴 것처럼, 그는 가볍게 웃는 얼굴을 하고서 분노를 내뿜고 있었다.
사혈은 뭔가 계산과 다르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아는 백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자신의 영토에 사는 백성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자였다. 일족 간의 문제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당사자들의 손으로 풀 수 있도록 도와줄 뿐이었다. 자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 하여 함부로 백성들에게 손을 대는 신은 결코 아니었다.
백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뒤에 물러나 엎드려 있던 뱀의 일족 원로들이 숨을 죽였다.
“다시 묻겠다. 뱀의 일족의 수장이여, 어쩔 셈인가.”
“신이시여…….”
답이 나오지 않아서 사혈은 엎드려서 읍소했다. 딸의 목숨을 바치겠다는 데도 백호가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더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땅에 바짝 엎드린 사내의 곁에 백호가 앉았다.
“고개를 들어보게,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여.”
조롱조였지만 사혈은 불쾌함을 나타내지 못했다. 백호의 목소리 밑에 들끓는 살기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혈은 자신의 손등이 본능적으로 떨리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입 안이 바짝 말라왔다.
분명 연화는 그저 잠시의 발정기를 잠재울 반려일 뿐이라고 들었다. 처음으로 가진 육체관계라 해도 연화의 위치가 달라질 이유는 없었다. 사방신이 자신의 반려로 인간 따위를 들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저 사방신의 눈을 빼앗은 장난감에게서 시선을 앗아 오려 한 것뿐이다. 이렇게 커질 일은 분명 아니었다.
“나는 네 딸의 목숨을 원하지 않는다. 그건 뱀의 일족에 아무런 벌이 되지 못한다는 걸 안다.”
본디 벌이란 해가 되어야 하는 법. 백호는 히죽 웃었다. 그의 백발이 바람에 흩날리며 벌어진 입가를 가렸다.
고개를 든 사혈은 다시 한 번 자비를 구하는 말을 꺼내려 입을 열었지만 곧 조용히 하라는 신호에 침묵했다. 신은 손을 내려 꿇어 엎드린 사혈의 얼굴 위로 덮었다.
거의 절반가량이 백호의 커다란 손 안에 들어왔다. 사혈의 주름진 얼굴이 처음으로 겁에 질렸다.
“평소 나는 그리 무자비한 편은 아니지.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니…….”
백호의 웃음이 짙어졌다.
“최대의 자비를 베풀어, 최소의 벌을 내리겠다.”
그의 손 안에서 푸른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사혈의 얼굴 절반을 덮은 손바닥에서 순식간에 열기가 치솟았다. 냉혈을 지닌 뱀의 일족에게 상극인 불. 홍염보다 훨씬 뜨거운 청염의 불길이 사혈의 얼굴을 태웠다.
뒤에서 일족의 원로들이 비명을 올렸다. 일족의 수장의 얼굴 위로 새파란 불이 타올랐다.
“배, 백호 님!”
“끅, 컥, 크헉……! 시, 신이시여……! 큭!”
“백호 님, 한 번만 용서를!”
백호의 손목을 잡고 떼어내려는 사혈의 손이 필사적이었다. 사내는 결국 손톱을 세우고 마구 신의 손목을 할퀴었으나 그의 피부 위로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주름진 얼굴을 강철처럼 단단히 잡은 다섯 개의 손가락은 거의 얼굴뼈 안으로 파고들 듯 잔인하게 죄어들었다. 눈을 번연히 뜬 채 피부가 전부 타고 녹아버리는 고통에 사혈이 처절하게 비명을 질렀다.
살가죽이 타는 냄새가 선연하게 후각으로 파고들었다. 주변에 선 뱀의 수하들은 결국 더 말을 꺼내지 못한 채 벌벌 떨며 땅에 머리를 댔다.
거대한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고 백호는 손아귀에 사혈의 얼굴을 움켜쥔 채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는 마치 종잇장처럼 가볍게 사혈을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생으로 얼굴의 절반이 타들어 가는 고통에 사내는 눈이 희게 뒤집혀 경련을 일으켰다. 입이 벌어져 침을 흘리면서 간헐적으로 몸을 떠는 것을 보다가 백호가 성의 없이 사혈을 흔들어 깨웠다.
“벌인데, 고통으로부터 도망가면 쓰나, 사혈. 수장답게 일족의 죄를 대신 견뎌야지.”
컥컥대며 사내가 목이 졸린 소리를 냈다. 백호는 이리저리 그를 뒤집으며 보다가 그대로 발치에 내던졌다. 구겨진 종잇장처럼 형편없이 사혈의 몸이 땅바닥에 굴렀다.
“이번에는 이것으로 내 분을 누르지.”
고통에 사혈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녹아내린 얼굴 거죽은 지독하게 흉했고 그 밑으로 뱀의 꺼풀이 드러났다. 신령으로서의 외형과 뱀의 원형이 추하게 뒤섞인 모습이었다.
수련을 많이 하고 공덕을 쌓을수록 신령의 원형은 감추어지고 지위는 높아진다. 사혈과 같은 일족의 수장이 자신의 정체를 절반쯤 드러내야 한다는 사실은 끔찍한 치욕이었다.
백호가 느리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숨도 못 쉬고 일족이 엎드려 있었다. 사영 역시 그 안에서 덜덜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신의 분노는 그저 밑으로 가라앉은 것뿐이다, 뱀의 일족이여.”
그가 차게 웃었다.
“허나 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라. 뱀의 일족 누구라도 또다시 이런 일에 손을 댄다면, 그때는 신령계에 일족 단 한 명도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허공에 울린 말은 선언이었다.
신은 차가운 눈길로 일족을 훑어보았다. 신령계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백호의 가호를 받는다. 그래서 이 땅에 머물러 그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한 번 더 이런 일이 발생할 경우 뱀의 일족에게서 가호를 앗아가겠다는 말이었다.
신의 푸른 불꽃으로 탄 화상은 어떤 짓을 해도 치료할 수 없다. 통증에 정신을 잃고 바닥에 나뒹구는 사혈을 부축하여 수습하며 일족의 원로들이 이마를 땅에 대었다. 신의 분노는 거두어졌으나 여전히 잠재되어 있었다.
“영원의 시간 동안 네 본체를 드러내고 살아가라. 그것이 일족의 수장인 네게 내리는 벌이다.”
***
사방신의 세계는 높고 넓다. 백호는 산꼭대기 가장 높은 곳에 올라 그 밑을 내려다보았다. 적어도 자신의 영토인 신령계 안에서 백호는 시야가 넓은 눈을 지닌 신이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맑고 차가운 공기를 한껏 들이마셨다.
땅 밑 저승세계에서 잠이나 잔뜩 자고 있을 현무, 인간계를 양분해 이간질을 하는 청룡, 나머지 반쪽 인간계를 맡아 청룡을 비웃는 주작. 가장 활발하고 역동적인 백호까지 합쳐 사방신은 세계를 다스렸다.
옥황상제가 세계의 법칙을 세우고 기록하는 밑에서 그의 뜻에 맞도록 움직이는 것이 사방신이다. 각자 자신의 영토에서 그들은 상제를 대신하여 군림하는 신이었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