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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8화 (18/113)

18화

그의 앞으로 일행이 다가왔다. 눈이 가로로 길게 찢어진 자들이다. 뱀의 일족이 내보낸 사신이었다.

“사방신 백호 님을 환영하옵니다.”

“뱀의 일족의 영토에 어서 오소서.”

십여 명의 일족들이 함께 절을 했다. 재빠르게 영토를 둘러보고 사라지려던 백호는 조금 낭패한 표정이 되었다. 빨리 둘러보지 않으면 연화에게 돌아가는 시간이 더 늦어진다. 그리고 뱀의 일족은 지극히 형식적인 절차를 좋아하는 자들이었다.

“그래, 고맙군. 혹여 일이 있을까 시찰 중이다.”

“기다리고 있었나이다.”

긴 검은 머리의 여인이 나서서 깊게 인사했다. 백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시찰은 꽤 정기적으로 있는 일이었지만 날짜가 정해진 것은 아니라 백호가 원하는 날 휙 떠나곤 했다. 뱀의 일족이 거기까지 예상을 하고 따라붙었단 말인가 싶어 오히려 백호는 기분이 나빠졌다.

“뱀의 일족의 영토는 언제나처럼 고요합니다. 이왕 시찰을 나오셨으니 훑어보신 뒤 저희에게 신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는 영광을 나눠주시겠습니까?”

뱀의 여인의 말은 지극히 정중하다. 하지만 식사까지 하고 가라는 데서 백호는 한숨을 쉬었다.

“바쁜 길이라 지체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하군. 시찰의 목적은 영토를 돌보는 일이기도 하고.”

“하오나 신이시여, 저희가 마련한 일 년간의 풍족한 양식 역시 돌아보아 주십시오. 저희가 성의껏 준비했습니다.”

뱀의 여인은 끈질겼다. 그녀는 비단으로 만든 짧은 편지를 내밀어 백호에게 건네었다.

―어서 오십시오, 사방신이여. 우리의 전각에 연회가 열렸으니 발걸음하시어 자리를 빛내주시길 바라오.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의 필체였다.

연회라. 이왕에 열린 것이 분명 아니다. 백호가 온다 해서 일부러 준비하고 마련한 자리일 것이다. 그는 난감한 기분이 되었다. 원래 연회를 자주 하는 일족도 아닌데 사방신이 들렀다 하여 준비를 했다고 하니.

유력한 일족의 호의를 함부로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이나 성의가 고맙군. 일단 연회가 열리는 곳으로 가자.”

“감사합니다.”

여인이 깊이 절을 했다. 일행들 모두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백호는 선두에 섰던 여인에게 물어보았다.

“얼굴이 익숙하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제 이름은 사영.”

그녀는 옆으로 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웃었다. 창백한 피부에 혈색이 돌았다.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의 열일곱 번째 딸입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사영의 얼굴을 본 기억이 있었다. 사혈에게는 워낙 자식이 많아 백호가 본 적이 있다면 아마 꽤나 총애하는 자식이리라.

그는 사영의 일행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뱀의 일족이 바닥에 깔아둔 시냇물 위에 나뭇잎으로 만든 뗏목을 띄우고 올라섰다. 물은 마치 그들을 위해 흐르는 것처럼 조용히 일행을 목적지로 안내했다. 마치 뱀처럼, 빠르면서도 고요했다.

시냇물은 지하수가 흐르는 통로를 타고 나지막한 경사를 지나 지하로 진입했다. 물이 고여 있는 넓은 호수 위로 뱀의 지배자들이 살고 있는 전각이 나타났다.

‘그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변함이 없군.’

뱀의 일족들도 어지간히 게으르다. 땅 위에서는 그래도 변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는데 이들의 마을에는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백호는 지하 특유의 비린내 비슷한 냄새에 얼굴을 약간 찌푸렸다. 이 비린내는 아마 수많은 지렁이와 뱀들이 모여 사는 증거일지도 몰랐다.

“어서 오십시오.”

뗏목에서 발을 내리자 전각의 앞에 사혈이 신하들을 이끌고 나와 서서 백호를 맞이했다.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시찰이란 고요히 다니는 법이거늘, 내 걸음소리가 커서 그대들을 깨우고 말았군.”

다시 말해, 이 인사들이 전부 귀찮다는 뜻이었다. 그걸 알아들은 사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꼬치꼬치 따지고 들었을 뱀의 수장을 아는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죄송합니다. 그러나 신께서 저희 땅에 오셨는데 예를 차리지 않고 보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흥미롭군. 언제나 그냥 보내지 않았던가?”

“저희가 예상하지 못했을 때는 준비가 미흡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제 영토는 지렁이들이 언제나 땅을 뒤집고 다녀 바쁘기 때문에……. 이전에는 귀한 손님을 접대하지 못한 점 양해해 주십시오.”

“손님?”

재미있다는 듯 백호가 웃었다.

“단어 선택이 웃기는군. 이 땅은 나의 영토기도 하지. 그대의 것만이 아니잖아.”

그 순간 사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개를 숙이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 백호가 정면으로 그 표정을 봤으리라. 하지만 백호는 이미 사혈의 기분을 알고 있었고 그에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정확히는 나의 영토에 뱀의 일족이 세 들어 살고 있는 것이지. 그대가 아무리 오래 살았다 한들 사방신보다 오래되지는 않았어.”

남자는 사혈을 제치고 전각 안으로 휘적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사혈을 지나치며 피식 웃었다.

“착각하지 말게.”

***

연화는 흐릿한 정신으로 눈을 감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금 잠이 들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제 정말 지나치게 몸이 더웠다. 이불은 전부 던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시야마저 이지러진 것 같았다.

약사여래의 가피를 입었으니 치유의 이능을 쓸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 힘은 자신에게는 쓰지 못하는 것이었다.

‘진작에 의원을 불렀어야 하는 걸까.’

땀에 젖은 옷이 걸리적거렸다. 한 겹 얇은 잠옷일 뿐인데 피부에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일어나 앉았다.

“왜…… 왜 이러지.”

목이 마르고 갈라져서 연화는 옆에 떠다 놓은 물을 마셨다. 잠을 자라고 어둡게 조절해 놓은 촛불에 의지해 물을 마시고, 그녀는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댔다. 땀이 흘러서 피부가 습기에 차 있었다.

다리 사이가 저릴 정도로 예민했다.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얇은 비단 위로 자신의 안쪽 허벅지를 더듬었다. 아랫배와 둔덕을 스치는 스스로의 손에 허리가 저절로 떴다.

‘대체…… 왜…….’

그냥 아픈 건 분명히 아니다. 아무리 둔한 그녀라도 이쯤 되면 모를 리가 없었다. 연화는 열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자신의 몸이 달아오른 것 때문에 열이 오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피부 구석구석이 아픈 것도 지나치게 예민해져서였다.

그 때 예고도 없이 방문이 열리고 큰 남자의 실루엣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다소 먼 거리였는데도 남자의 체취가 훅 풍겨 왔다. 연화는 당황해서 얼른 벗었던 이불을 끌어다가 대충 몸을 덮었다. 얇은 잠옷 한 겹이라 피부가 다 비쳐 남자에게 보일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우, 우현 님?”

“연화 님.”

경비병인 우현이었다.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불쑥 들어온 무례한 행동에 연화는 당황했다. 몸을 가리고 얌전히 앉아 있는 그녀의 무릎 위로 우현이 쟁반을 내려놓았다.

그는 뭔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 야식으로 이걸 챙겨드리라고 호접 님께서 말씀하셔서요. 이제야 생각이 나서.”

야식? 그러고 보니 호접이 간혹 그녀에게 출출할 때 먹으라며 떡과 곡물차를 가져다주긴 했었다.

몸이 덥고 아파 지금 먹을 생각이 없다며 고개를 저으려 했지만 주전자에 맺힌 물방울을 보고 생각을 바꿨다. 손을 내밀어 주전자의 겉면을 만져보니 아주 차가웠다. 땀으로 축축할 정도로 더운 몸에 찬 음료가 매우 절실했다.

“저, 떡은 됐고…… 차만 한 잔 마실게요.”

“그러시겠습니까?”

우현은 잔에 찰랑거리며 가득 찰 정도로 듬뿍 곡물차를 부어 넘겨주었다. 차가운 잔의 표면이 손바닥에 시원했다. 그녀는 단숨에 한 잔을 전부 마시고 다시 한 잔을 직접 따라서 마셨다. 우현은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가지고 온 떡 한 조각을 집어 우물거리며 먹었다.

“후…….”

이제야 조금 살 것 같다. 연화는 시원한 곡물차 두 잔으로 목구멍이 적셔져 기분이 나아졌다. 그녀는 우현에게 작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시원한 게 마시고 싶었는데…….”

“그러셨군요.”

우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마침 배가 고파서.”

그는 기계적으로 떡을 씹어 삼켰다. 연화는 약간 눈썹을 찡그렸다.

우현의 발음이 좀 이상했다. 어슴푸레한 공기 속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표정도 다소 굳어 있었다. 첫인상과 너무 다르다. 아까 봤던 그 유쾌한 남자가 아닌 것 같은 무서운 분위기였다.

우현은 더 말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떡을 한 조각씩 집어먹었다. 마치 자신이 먹으려고 가져온 것 같은 태도였다. 그의 눈치를 보다가 연화는 차를 더 마시고 싶지 않아 조심히 잔을 내려놓았다. 다소 식었던 몸에 다시 열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대체 왜 이러지…….’

바로 곁에 선 우현에게서 남성적인 체취가 흘러나왔다. 땀의 소금내가 섞인 사내의 향. 연화는 그 냄새만으로도 자신의 아랫도리가 뒤틀릴 만큼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갈라진 틈이 그녀가 느낄 수 있을 만큼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우현 님께 나가달라고 해야…….’

애초에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 자체가 이상했다. 평소 호접도 묘우도 결코 연화의 방문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오지 않았다. 언제나 먼저 기척을 하고 그 후 들어온다 말을 하고 들어왔다. 그것이 신령들이 갖추는 예의였다.

우현의 분위기도 이상했다. 그는 냄새를 찾는 것처럼 코를 킁킁댔다. 곰처럼 덩치가 큰 사내는 침대 곁에 붙어 서 있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졌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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