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비둘기는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묘우가 내린 명대로 사영의 전각까지 거의 두 시간을 날아가 날개를 접은 새는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렸다.
정원에 앉은 새를 잡은 손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중년의 사내,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 그는 새를 살펴보다가 다리에 매인 편지를 발견하고 펴 읽어보았다. 간단하게 적힌 ‘약을 줄이시오’라는 말에 사혈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이 여우 새끼가 누구에게 명령질이지?”
사혈은 묘우를 극도로 혐오했다. 한낱 여우의 신령 주제에 원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꼬리를 흔들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묘우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도 사혈의 분노를 자극했다.
사영이 묘우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감히 묘우 따위가 뱀의 일족에게 일방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편지라니.
“약을 줄여? 멍청한 여우 녀석. 다른 사내와 뒹굴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걸 줄이다니 제정신이 아니군.”
그 여자가 질펀하게 사내와 뒹굴어야 한다. 며칠 내내 다른 남자의 정액에 찌들고 미약에 찌들어 쾌락을 좇아 허덕이는 모습을 백호가 보아야 했다.
그 전에 적당히 그를 구슬러 이곳 뱀의 전각에서 사영과 밤을 보내게 해 홀린다면 백호는 연화를 쉽게 버리고 쉽게 잊을 것이니. 아무리 신이라 해도 뱀의 일족이 만들어낸 미약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어차피 오늘밤 백호는 시찰을 위해 뱀의 일족의 영토에 들르고, 연회를 준비해 초대할 예정이었다.
그는 거침없이 편지를 쥐어서 찢어버렸다. 비둘기를 휘휘 저어서 날려 보내고 사혈은 짜증스럽게 돌아섰다. 아무래도 수조에게 일을 더 빨리 진행시키라고 해야 할 듯했다.
묘우 따위에게 지령을 받다니, 그가 백호의 장인이 된다면 가장 먼저 묘우를 쫓아낼 생각이었다.
***
호접은 저녁을 먹고 상세가 더 심해진 연화를 걱정스럽게 보았다. 그녀는 연화의 목덜미까지 바람이 샐까 꼼꼼하게 이불을 덮어주며 이마 위에 찬 물수건을 올렸다.
신령들은 대부분 인간보다 강인해 이렇듯 열이 오르며 아픈 경우가 잘 없었다. 지금 호접 역시 인간계를 드나들며 알게 된 간호를 하는 것뿐이었다.
“혹시 밤새 무슨 일이 있으면 우현을 부르세요. 믿을 만한 경비병이니 바로 저를 호출하거나 연화 님을 돌봐드릴 겁니다.”
나비의 신령이 타이르듯 말하자 연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접의 뒤에서 덩치가 좋은 남자가 연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움찔하고 다리 사이가 떨려서 연화는 놀랐다. 그녀는 잠시 이불을 끌어 올려 눈 밑까지 숨었다가 조심히 인사했다.
“괜찮을 거예요. 신경 안 쓰셔도 될 거니까…….”
“편히 말씀하십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큰일이니까요.”
곰의 신령인 우현이 빙긋 웃었다. 호감 가는 인상의 신령은 연화를 안심시키려는 듯 몸을 가능한 작게 말아서 침대 곁에 섰다.
“저는 언제나 문 앞에 서 있을 테니 안 좋으시면 그저 침대를 서너 번만 치셔도 제가 알 수 있습니다. 곰은 덩치는 산만큼 크고 둔해 보여도 생각보다 귀가 아주 예민한 종족이라서요.”
경비병의 너스레에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풋 하고 웃었다. 연화의 웃음을 보고 우현은 잠깐 얼굴을 붉혔다.
사방신의 반려는 그간 최측근들만 보고 접했기 때문에 우현은 처음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백호가 궁에 있을 때는 경비병이 궁내에 서 있는 것을 싫어해 대부분 정원이나 1층에 머물렀다.
인간의 여인을 반려로 들였다고 해 대체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이기에 저 높으신 사방신께서 운우지정을 나누시는가 했는데, 과연 직접 보니 난초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몸이 안 좋은 중에 처음으로 웃은 거라 호접은 기쁘게 연화의 얼굴을 보았다. 우현은 워낙 성격이 좋고 무던한 신령이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그럼 믿고 맡기겠네, 우현.”
“염려놓으십시오.”
우현은 허리를 굽혔다. 호접은 연화가 먹고 마셨던 그릇을 챙겨 들었다.
“나는 오늘부터 이틀 밤을 인간계에 내려가 봐야 해. 정기적인 제사가 있는 날이라……. 백호 님은 직접 가시지 못하고, 작은 제사이기도 해서 내가 다녀와야 하니. 딱 밤에만 다녀오니까 그 시간만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나는 인간계에 가 있더라도 자네 호출을 들을 수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꼭 부르고.”
“호접 님도, 걱정이 참 많으십니다.”
우현이 시원하게 웃었다. 신의 반려가 아픈 와중에 맹하게 웃고 있는 경비병의 등을 한 대 아주 세게 쳐줄까 하다가 호접은 고개를 저었다. 곰의 등짝 따위 나비가 쳐봐야 손만 아프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걱정스럽게 연화의 이불 위를 다시 토닥여주고 방을 떠났다. 우현은 호접을 배웅하러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저 녀석인가.’
궁의 정원 나무 위 높은 곳에 새 한 마리가 앉아서 호접이 떠나는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조는 덩치가 큰 곰의 신령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도 아주 암시가 잘 먹히게 생겼군.’
사혈은 일을 빨리 진행시키라고 닦달했다. 사영에게서는 별말이 없었다. 뱀의 일족은 완벽하게 사혈의 밑에서 그의 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으므로 그 수하인 수조 역시 사혈의 말에 따를 도리밖에 없었다.
그는 실내로 들어가는 곰의 신령의 뒤를 쫓아 날아갔다. 새가 푸드덕거리는 날갯짓 소리를 들은 우현이 뒤를 돌아보고 놀랐다.
“아니, 웬 새가 들어와서 날고 있느냐. 나가야지, 나가라. 여긴 백호 님의 궁궐이야. 경을 치려고.”
우현이 이리저리 손을 저었지만 새는 날면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차마 새를 치지는 못하고 그가 난감해했다. 새가 우현의 얼굴 앞까지 다가와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이런, 새 녀석아. 얼른 나가자꾸나.”
얼른 새를 양손으로 붙잡아서 우현은 날려 보내려고 했다. 손을 자꾸만 부리로 콕콕 찍는 느낌에 그는 얼굴을 구기며 새를 들어 올려 보았다.
“너 자꾸 왜 그러는 거냐?”
파란 새의 눈은 구슬 같았다. 눈을 깜박이면서 검은 눈이 우현을 뚫어져라 주시했다. 곰의 신령은 잠시 멍해져서 두 손을 풀었다. 새는 다시 날갯짓을 하다가 사람으로 둔갑했다.
소리 없이 바닥에 내려선 수조가 히죽 웃었다.
“역시 곰이란 어지간히 둔한 자들이라.”
곰 중에도 대단히 예민하고 난폭한 자들이 많지만 이렇듯 낮은 계급인 자들은 대다수 사람 좋고 느긋한 성격이다. 그 말은 암시도 잘 걸린다는 뜻이었고 이용하기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는 경비병의 눈앞에서 손가락을 딱 맞부딪쳤다. 덩치 좋은 곰의 신령은 눈의 초점이 흐릿하게 풀렸다.
“새의 일족은 재주가 많은 편이지. 우둔한 자들의 정신을 잠시 조종하는 정도야 어렵지 않은 일이고.”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우현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주 잠시의 과거를 살펴보는 일은 새의 일족의 특기였다. 그는 우현의 저녁시간을 그의 눈을 통해 훑어보았다.
“오호라, 잘된 일이군. 이 곰 양반이 인간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
우현의 기억 속,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인 연화는 아주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 있다. 그의 심장에서 느껴지는 호감도 컸다.
“일이 쉽겠는데.”
싫어한다면 그 증오심을 이용해도 되지만 서로 정사를 맺게 하는데는 물론 호감 쪽이 훨씬 이용하기 편안하다. 연화 쪽은 미약으로 몸이 잔뜩 달아오른 상태고 거부는 하기 힘들 것이다.
수조는 입가를 올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우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라라. 눈앞의 암컷은 네 것이다.”
우현은 멍청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벌리고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에게 수조는 친절히 쟁반과 음식을 챙겨 들려주었다. 물론 거기에 사혈의 명대로, 지난밤보다 두 배의 미약을 넣은 채였다.
“암컷에게 먹이고, 너도 먹는 거다.”
약에 취해 뒹굴어라. 어차피 호접은 자리에 없고 백호는 오늘밤에 뱀의 일족을 시찰하러 들렀다가 연회에 초대받을 예정이다. 이틀 밤 내내 뒹굴고 다른 수컷의 정액에 절여진 반려를, 사방신은 어떤 얼굴로 바라볼까.
수조는 히죽 웃고 다시 새로 변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현은 암시를 받은 대로 느릿하게 쟁반을 들고 어슴푸레한 궁의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
백호는 그의 인생 최대의 속도로 신령계를 날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정기적인 시찰을 게을리 할 수는 없어서 그는 눈이 빠져라 신령계의 구석구석을 돌아보았다. 인간계와 달리 수많은 종족이 뒤섞여 사는 신령계는 그만큼 사건사고도 많았다.
인간의 세상처럼 나라가 갈라지지는 않았으나 대신 그보다 더 공고한 일족들이 세상을 나눠 가졌다. 백호는 그 사이를 돌며 일족들 사이의 억울한 일이나 부당한 일 들을 살펴 풀어주거나 매듭지었다.
시찰은 그래서 중요했다.
아예 호랑이의 몸으로 변해 바람처럼 신령계를 누비다 보니 예상보다 빠르게 일정이 진행되었다. 그는 거의 땅의 끝에 와서 뱀의 일족의 영토에 발을 디뎠다.
‘하여간 기분 좋지 않은 땅이야.’
다스리는 자로 어느 일족에게 편견을 가지면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백호는 뱀의 일족에게 호감을 가지기가 힘들었다. 그들은 아주 오래된 일족으로, 신의 권위에마저 도전하던 자들이었다. 물론 언제나 실패하긴 했지만.
또한 뱀의 일족은 자신들보다 약한 새의 일족을 수하로 부리며 살고 있어 백호가 특히나 싫어했다. 새의 일족은 뱀의 기세에 눌려 자신들이 스스로 원해 그들의 밑에서 일한다고 답변을 해 와 신으로서도 어찌해줄 방도는 없었다.
땅 자체는 매우 비옥하다. 발밑이 푹신할 정도였다. 하위 계급인 지렁이들이 사는 영토이니 당연하다. 그들 때문에 더 신령계의 다른 자들이 뱀의 일족에게 숙이고 들어가기도 했다. 지렁이들이 없으면 토양은 금세 척박해질 테니까.
백호 역시 뱀의 일족이 꺼림칙했으나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특히나 그 수장인 사혈은 용이 될 수도 있던 자였다. 스스로 거부하긴 했으나 용이 되었다면 사방신의 바로 다음 가는 위치였을 것이다.
‘스스로 거부하길 얼마나 다행인지.’
사혈의 됨됨이는 지극히 속이 좁고 비열하다. 일신의 능력만으로 그 위치에 올랐다면 곤란한 일이 많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백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