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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5화 (15/113)

15화

뱀의 일족의 마을은 다른 신령들의 마을과 다르게 아주 깊은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위 신령인 지렁이들과 함께 살기 때문에 땅 밑의 지하에 자리 잡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안에서는 당연히 밤의 달빛도, 숲의 바람도 느끼지 못한다. 사영은 가끔 자신의 저택 안에서도 그래서 답답함을 느꼈다. 지금도 그녀는 창문을 열어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초조하고 답답했다.

사영은 초조하게 방 안을 돌았다. 그녀의 머릿속에 묘우가 했던 말이 계속해서 맴돌았다.

‘글쎄, 발정기 아닙니까. 비록 그간은 형식상의 반려를 맞이해 그들의 음기로 기운을 다스렸다지만 백호 님의 정욕은 지금 비정상적으로 높아져 있는 상태입니다.’

묘우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사영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사내가 발정이 났을 때 여자는 누구라도 상관없는 것이지요. 그저 몸을 요구하는 상태일 뿐.’

하필 제사를 깬 인간의 여인이 눈앞에 있었을 뿐이다. 전의 상황을 들은 사영은 백호가 갑자기 인간의 반려를 들인 것을 납득했다. 물론 머리로 납득했을 뿐 가슴이 납득한 것은 아니었다.

‘내가 설마 그 여우같은 놈의, 아니, 그 여우 놈의 꾐에 넘어간 것은 아니겠지.’

그녀는 며칠 동안 애써 만들어 수조에게 쥐여 보냈던 약을 들여다보았다. 그에게 들려서 보냈던 것과 아주 동일한 호리병이 그녀의 책상 위에도 있었다. 약이란 민감한 물건이어서 색과 성질이 맞는 그릇에 보관해야 해 병의 모양과 색 모두 동일했다.

이 일만 성공하면 사영은 백호의 옆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모든 신령계가 그녀의 발밑에 무릎 꿇을 것이다.

‘잘되겠지, 설마.’

초조했다. 물론 묘우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기는 했으나 그녀가 이곳에서 해야 하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백호를 이곳으로 끌어들여서…….

‘할 수 있을까?’

해야 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하기로 마음먹었고, 사영이 평생토록 가장 원한 것이 백호라는 사내였다. 신이기 이전에 남자로서 꼭 갖고 싶었다.

백호의 얼굴을 떠올린 사영은 이전보다 훨씬 안정된 기분으로 의자에 앉았다.

아름다운 백발과 황홀한 푸른 눈, 희디흰 피부. 사내답게 키가 하늘만큼 크고 어깨가 벌어져 뱀의 일족으로는 꿈도 꿀 수 없을 만큼 뜨겁고 강인한 사내.

“절대 넘겨주지 않아.”

욕심나는 것을 손 놓고 보기만 하는 건 뱀의 일족의 성질에 맞지 않는다. 그녀의 입가로 미소가 짙어지고 세로로 긴 홍채가 깜박이며 열렸다 닫혔다.

“사영이 게 있느냐?”

그 때 밖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아버지.”

길고 가느다란 수염을 기른 중년의 사내가 느릿하게 걸어 들어왔다. 옆으로 찢어진 눈은 사영과 몹시 닮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이자 뱀의 일족의 수장인 사혈이었다.

사혈은 지독히 오래전에 태어나 수련을 해 용이 될 자격을 갖추었으나 청룡의 수하로 들어가길 거부하여 뱀으로 남은 자였다. 대신 청룡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하며 그에게서 약간의 힘을 얻어내고 있었다.

사혈의 휘하에서 뱀의 일족은 그 어느 때보다 강성하게 부흥했고, 그만큼 강하고 위험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의 검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사혈은 딸이 권하는 대로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그의 눈은 사영의 책상 위에 있는 호리병에 꽂혔다.

“약 만드는 솜씨가 제법 좋아졌더구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대로 제조했을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누구나 그리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노력도 많이 했고, 재능도 있다는 이야기다.”

사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내 딸이니 당연하겠다만. 내 아주 너를 예뻐한다는 걸 알고 있겠지.”

거짓말쟁이. 사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혈의 자식은 그 숫자가 지독하게 많았다. 공식적으로 사혈의 밑에 들어와 사는 자식들만 해도 서른 명에 가까웠고 아마 그대로 버려두어 세상을 떠도는 자식들은 그 배에 가까울 것이다. 그녀는 그중 열일곱 번째의, 평소라면 사혈이 눈여겨보지도 않을 딸이었다.

다만 사혈이 그녀를 기억이나마 하는 이유는 그녀가 뛰어난 약학자이자 욕심이 아주 많은 여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마 사영이 몇 번째 딸인지도 아마 모를 것이다. 이름과 얼굴이나마 아는 것이 다행이다.

“나는 사방신의 장인이 되길 기다리고 있단다. 꼭 성공해야 한다.”

저 미약을 만드는 데 들어간 귀한 약재를 급히 구하는 것도 사혈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는 빙글거리고 웃으며 호리병을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소리와 그 무게감을 보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정확히 정량을 만들었구나. 똑같은 양을 수조에게도 보낸 게지?”

“그렇습니다. 지금쯤 아마 약을 탔을 거예요.”

“그래. 기대되는구나.”

사혈은 손바닥을 비볐다.

그가 사방신 청룡의 직속 수하로 들어가길 거부했던 이유는, 언젠가 사방신과 동렬이나 윗줄에 서고 싶은 야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백호의 장인이 된다고 하여 사방신보다 높은 지위나 더 큰 힘을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사방신의 혈족으로 대접을 받게 된다. 뱀의 일족은 단숨에 그 신분이 상승될 것이다.

‘지금도 우리 일족이 대단히 강성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야 없지.’

사혈은 자신의 야망을 숨기지 않았다. 자식들이 모두 멍청하고 심약한데 비해 사영은 제법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스스로 이런 방법을 발견해 오다니.

그리고 설사 실패한다 한들 수많은 자식들 중 한 명이니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백호가 노한다고 해도 자식의 목숨으로 갚겠다 하면 사혈 자신과 일족에게는 손을 대지 못하리라.

사혈은 짐짓 걱정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꼭 성공해야 한다. 백호의 성질은 불과 같아서 만약 들키면 곤욕을 꽤 치를 게야.”

“아버지께서 도와주셨으니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사영은 고개를 숙였다.

사혈이 보채지 않아도 그녀는 모든 힘을 다해 이 일을 이루어낼 작정이었다. 아니, 반드시 성공해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모든 신령계의 가장 높은 신분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를 포함한 뱀의 일족마저 고개를 숙여야 하는 신령계의 반려의 자리. 그것이 사영이 노리는 목표였다.

***

연화의 아침은 언제나 호접이 신경 써서 준비했다. 원래 백호와 함께 일어나 식사를 했지만 오늘부터 나흘간은 그녀 혼자 식사를 하게 된다.

언제나 연화가 좋아하는 기름을 발라 윤기를 낸 앙금떡과 향이 강하지 않은 곡물차를 준비한다. 고소하고 입 안에서 씹히는 맛이 있는 고등어를 굽고, 지난 저녁 뜯어다 씻고 다듬어놓은 신선한 산나물을 참기름과 소금을 조금 넣어 무쳐낸다.

신령계의 식재료들은 언제나 신선하고 질이 좋아서 연화는 그 재료 자체의 맛을 즐기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

오늘도 시녀들과 함께 호접은 소박하지만 정갈한 아침식사와 함께 후식으로 떡과 곡물차를 내갔다.

체력이 부족하니 삼시 세 끼를 반드시 꼭 챙겨 먹으라고 당부한 백호 덕분에, 연화는 아침에도 식사를 거르지 않고 얌전히 받아 먹었다.

그녀는 밥을 몇 술 뜨고 앙금떡과 곡물차를 들었다. 달콤한 떡과 구수한 차의 향이 어울려서 맛이 일품이다. 호접은 내온 떡을 연화가 전부 다 먹는 것을 보고 기쁘게 빈 그릇들을 내갔다.

이상한 징후는 그날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연화는 기묘할 정도로 몸이 더웠다. 백호의 궁의 주변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나 가장 쾌적한 기온과 습도로 유지되고 있었다. 백호에게 딱 맞는 온도로 유지되고 있었으니 그녀는 약간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의 공기였다. 그러니 덥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서늘한 공기 때문에 어깨에 챙겨 덮었던 부드러운 비단천을 내려놓았다.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감기인가…….’

백호가 어제 갓 떠났는데 아파서 눕기라도 하면 여러 사람한테 민폐다. 무엇보다 호접이 당황할 텐데, 적당한 미열 정도라면 티 내지 않고 참는 쪽이 낫다.

연화는 무리하지 않기로 하고 침대 이불 속으로 들어가 얌전히 앉았다. 몸이 더웠지만 차라리 땀이 나는 게 낫다 싶어서 그녀는 이불을 걷지 않고 누웠다.

점심시간이 되어 호접이 연화를 보러 와서 놀랐다. 아침시간에는 일어나서 자수를 놓거나 책을 보던 그녀가 침대에 누워 자고 있어서였다. 얼굴도 불그스레했다.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아, 조금 졸려서요. 그냥 누워 있으면 괜찮을 듯싶어요.”

연화가 미소를 띄었다. 호접이 식사 준비를 이르려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입맛이 없어서 넘어갈 것 같지 않은데, 차만 준비해 주시겠어요?”

“차만 드시면 안 돼요, 최소한 떡이라도 드셔요. 제가 잘게 잘라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예. 그럼 아주 조금만요.”

앙금떡은 달달하니 맛나다. 입맛이 좀 없어도 그건 넘길 수 있었다. 연화는 호접이 쟁반에 가지고 온 떡 두어 조각과 차만을 마시고 다시 누웠다.

열은 점점 더 심해졌다. 몸이 달아올랐지만 무엇보다 아랫배가 뜨겁고 가슴에 열이 몰렸다. 자꾸만 다리 사이가 움찔거리는 느낌에 연화는 당황해서 몸을 웅크렸다.

이불이 피부에 쓸리는 느낌도 자극적이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서 그녀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곁에 백호가 있었으면 하는 기분이 너무 강렬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 태아처럼 몸을 구부린 채 차가운 금침 위에 얼굴을 묻었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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