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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의 붉은 달-14화 (14/113)

14화

백호는 주기적으로 신령계를 날아 세계를 살폈다. 신령계는 워낙 넓고 인간계인 주작과 청룡의 영토에 걸쳐져 있었기 때문에 사방신인 백호로서도 며칠은 족히 걸리는 일이었다.

연화와 교접하느라 관찰 시기를 놓친 백호는 어쩔 수 없이 떠났다. 불과 나흘밖에 걸리지 않는 일이었으나 아쉬움과 불안함을 어쩔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거든 묘우나 호접에게 말해라.”

백호는 침상에 앉아 있는 연화의 머리를 쓸어주며 말했다. 그는 흘긋 묘우의 빙긋이 웃는 얼굴을 봤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호접에게 말해라. 저 여우 놈은 도대체 믿을 수가 없어서.”

“너무하십니다, 백호 님. 제가 얼마나 충성심이 깊은 신령인지 잘 알고 계시잖습니까.”

묘우는 진심으로 상처받은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면서도 입가가 묘하게 올라가 있어 백호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충성심이야 깊지, 자꾸 내 뜻과 맞지 않는 다른 짓을 해서 문제지. 명심해라, 묘우. 내 뜻을 따르는 것이 충성이다. 네놈의 뜻대로 아무 짓이나 마구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입니다.”

여우의 신령은 방긋 웃으면서 허리를 숙였다. 뭔가 모를 찜찜함에 백호는 못마땅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호접은 곁에서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무 그러지 마셔요, 백호 님. 제가 단속하겠나이다.”

“그래. 너는 내가 믿는다.”

수하를 많이 두는 걸 기꺼워하지 않는 백호의 성정 때문에 그의 최측근이라고 할 만한 자는 묘우와 호접 정도였다. 신령으로서의 지위나 힘은 묘우 쪽이 컸으나 그는 겉과 속이 달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신령의 원로 중에 데리고 온 놈이 저리도 제멋대로이니.”

“염려 놓으소서. 얌전히 있겠나이다.”

묘우가 빙글거렸다. 못마땅한 얼굴로 백호는 그를 노려보다가 다시 한 번 연화를 끌어안고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나흘이다. 더 빨라질 수도 있으니 염려 말고 기다리거라. 신령계의 저 끝과 이 끝을 보아야 하는 일이라 나로서도 하루 만에 끝내기는 무리로구나.”

“너무 걱정 말고 다녀오셔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연화는 미소를 지었다. 신 역시 앉은 자리에서 모든 것을 관할하는 게 아니로구나 하는 새삼스러운 깨달음이 놀라울 뿐이었다.

백호는 대체적으로 신령계의 저 먼 곳도 앉은 자리에서 볼 수 있었으나 직접 샅샅이 살피는 일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신령의 일족은 워낙 많았고 그들끼리의 충돌도 상당히 많아 자칫하면 약한 일족들에게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이르게 오시면 안 됩니다. 본래 일주일은 걸리는 일정을 나흘로 조정하신 게 아닙니까.”

묘우가 수상하다는 눈초리로 백호를 바라보았다. 신은 부하 주제에 겁을 상실한 신령을 노려보았지만 그의 말이 매우 이치에 맞아서 더 뭐라 꾸짖을 수가 없었다.

“하여간 여우라서 그런지 까탈스럽기는.”

투덜거리는 말에 묘우는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신령계를 샅샅이 보셔야 합니다. 일족 간의 분쟁이 숨겨진 채 길어지면 자연세계 자체가 뒤틀려 그 종족이 멸종할 수도 있으니까요.”

“네놈이 사방신이냐, 내가 사방신이냐? 여하간 말은 많아가지고.”

저래 보여도 묘우는 정말로 신령계를 걱정하는 원로다. 백호 역시 그 부분을 알기 때문에 크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연화는 궁궐의 누각까지 걸어 나와 백호를 배웅했다. 하늘거리는 부드러운 물빛의 비단이 바닥에 끌렸다. 발에 신은 부드러운 꽃신은 걸을 때 소리도 나지 않았다.

누각 너머로 보이는 푸른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코끝으로 스미는 청량한 공기에 백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폐 속 깊숙이 공기를 마셨다.

그는 본래 자유로운 영혼이다. 금수의 왕인 그가 어느 한 곳에 처박히는 것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연화가 오기 전, 그는 하루도 그대로 궁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없었다. 굳이 신령계를 살피러 떠나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는 이곳저곳을 다녔다. 다만 연화가 온 이후 그녀를 취하기 위해 침상을 떠나지 않는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발걸음이 안 떼어져 그는 돌아서서 여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백호가 좋아하는 그대로 긴 흑발을 아무 장식도 하지 않은 채 뒤로 늘어뜨리고 그녀는 발돋움을 해 백호의 뺨에 입을 맞췄다. 수줍지만 부드럽고 따스한 입맞춤이자 인사였다.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신의 안부를 걱정하는 일은 부질없다. 하지만 인간의 버릇대로 그녀는 속삭였다. 마음에 두고 있는 이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만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백호는 눈치 빠르게 그녀의 마음을 알아챘다.

“그래, 최대한 빨리 다녀오마.”

연화의 수줍은 애정 표현에 백호의 얼굴이 벙글거리며 밝아졌다. 그는 파란 눈동자를 빛내면서 연화를 내려다보다가 반대쪽 뺨을 내밀었다.

“다시 한 번 해주렴.”

“백호 님…….”

부끄러움에 연화가 뒤로 물러섰고 그 광경을 뒤에서 바라보던 호접과 묘우는 표정이 이상해졌다. 그들의 주인이 저렇게 인간의 여인에게 애정을 바라는 모습을 보다니. 둘 다 티는 내지 못했지만, 특히 묘우는 속으로 기분이 묘한 상태였다.

“빨리 가셔요.”

“한 번만 더 입을 맞춰주면 가지! 얼른 해주렴.”

답지 않게 아이처럼 떼까지 쓰면서 백호는 연화를 끌어안았다. 그녀는 뒤에 선 호접과 묘우, 시중을 드는 시비들이 신경 쓰여 얼굴이 붉어졌지만 백호는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결국 그녀에게 양뺨에 모두 입맞춤을 받고 백호는 바람을 타고 날아갔다. 가능한 빨리 돌아오겠다 약속에 약속을 거듭한 뒤였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백호의 궁궐로 날아든 것은 그날 밤이었다. 창틀에 내려섰던 새는 곧 바닥에 땅을 딛고 선 인간의 형체로 바뀌었다. 사영의 수하인 수조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경비병이 없는 것을 깨닫고 다시 새로 변했다. 약속했던 대로 묘우가 경비병을 최소화해 물린 모양이었다. 작고 파란 새는 궁궐 안을 날아 부엌으로 향했다.

시녀나 시중을 드는 신령들도 모두 자러 간 상태였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한 궁궐 안에서 부엌에 서 있는 자는 단 한 명이었다. 가느다랗게 눈을 좁히며 웃고 있는 여우의 신령, 묘우였다.

“묘우 님.”

수조가 변해 바닥에 내려섰다.

“약은 가져 오셨습니까?”

“물론입니다.”

수조는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묘우는 푸른 도기로 만든 찻주전자를 꺼내 그의 앞에 놓았다.

“이게 현재 반려가 드시는 차를 담는 주전자입니다. 여기에 발라주시고, 그리고 이 앙금이 식사에 항상 곁들여지는 떡에 들어가는 것이지요. 여기도 부어주십시오.”

“예, 예.”

새의 입장에서 여우의 신령인 묘우는 결코 달가운 존재가 아니다. 수조는 굽실거리며 그의 말대로 호리병에서 붉은 액체를 부어냈다.

액체를 손가락 끝에 묻혀 조심히 주전자의 바닥과 주둥이에 바르는 모습을 보며 묘우가 눈썹을 올렸다. 약의 양이 지나치게 적어 보였다.

“이 정도의 양으로도 충분할까요?”

“물론입니다. 뱀의 일족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온 가전절기의 산물이니까요. 아주 소량만 입 안에 넣어도 은은히 몸이 달아오릅니다.”

수조가 가져온 약은 미약이었다.

뱀의 일족은 약물을 잘 다루기로 유명한 가문이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약초의 활용을 안다고 할 정도였다. 세상에서 가장 정숙한 여인을 가장 음란한 창부로 만드는 약 역시 그리 어렵지 않게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보기에는 붉습니다만…… 일단 이 병에서 나오면 무색무취가 됩니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는 모양이 되지요.”

“훌륭하군요.”

묘우는 웃으며 칭찬했다. 과연, 훌륭한 약이다. 무색무취라면 쓰기에 따라 훌륭한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주전자와 앙금을 다시 제 자리에 돌려놓았다.

“이걸 찍어서 발랐다고 제 손가락 끝마저 화끈거립니다. 보이시죠? 붉어진 것.”

“그렇군요. 역시 뱀의 일족의 솜씨는 훌륭합니다. 사영 님께서도 준비는 하고 계시지요?”

“물론입니다. 아가씨께서는 이미 하위 일족들 간의 분란을 가장해 놓은 상태라……. 아마도 사흘 뒤쯤 백호 님의 눈에 띄겠지요.”

“딱 좋습니다.”

시기가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사영이 왔던 시기도, 일을 만들기 시작한 시기도. 여우의 신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묘우는 뱀의 일족을 싫어했지만 사영 정도면 나름대로 협력하기 좋은 상대다. 그녀는 욕심이 많아 자극하기도 쉬웠고, 반면 영리하여 일을 그르칠 확률도 높지 않았다. 서로 자신의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진행할 수 있다는 건 큰 장점이다.

묘우는 미소를 짓고 호리병을 받아 품 안에 넣었다.

“약속은 지키시기 바랍니다. 제 이름은 새어 나오지 않도록요.”

“물론입니다. 사영 아가씨를 못 믿어 맹세까지 받으시고도 그러십니까? 저주가 무서워서라도 입을 떼지 못합니다.”

“만약을 위한 거니까요.”

묘우는 웃으며 수조를 배웅했다. 파란 새는 올 때처럼 고요하게 궁궐을 날아 창밖으로 빠져나갔다.

“흠, 글쎄……. 희생양이 될 경비병이나 연화 님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특히 경비병 쪽에게. 사실 인간의 여인에게는 그리 미안한 마음이 없었다. 인간 주제에 어리석게도 주제넘은 자리를 바랐던 것이 화근이다.

그는 호리병을 들어 달빛에 비춰보았다. 파랗고 작은 호리병은 딱 손바닥만 했다. 안에서 찰랑거리며 액체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나흘. 미약을 먹으며 며칠이나 버티실 수 있을까요, 연화 님.”

백호가 인간의 여인에게 열중한 것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길어지면 결코 좋지 않았다.

신령계의 원로로서 그는 결코 금수의 왕이자 신령계를 다스리는 사방신이 한낱 인간의 여자와 오랫동안 살 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남녀 간의 정분이 떨어지게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

백호는 연화가 수줍고 완전한 처녀라서 더 매료되었다. 그 역시 여인과의 관계가 과거에 거의 없다시피 하였고, 그래서 풋풋하고 수줍은 연화에게 더 끌렸다. 묘우가 보기에는 그게 맞았다.

‘그러니까 실은 그 여인이 육욕에 찌든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환상도 애정도 깨어지게 되어 있지.’

사영이 말이 잘 통하는 상대라서 다행이다. 사영은 사영의 일을, 묘우는 묘우의 일을 하면 아주 간단히 해결되는 문제였다.

“자, 내일이 기대되는데?”

그는 기지개를 켜고 웃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금수의 붉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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