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내가 그리도 신령 중에 반려를 맞으셔야 한다고 했거늘.”
사영은 백호의 곁을 노린 지 이미 백여 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는 세월을 생각했다. 그녀는 성급한 태도로 곁에 놓인 차가운 술을 마셨다.
“그러나 걱정하실 일은 아닐 듯합니다. 백호 님께서 특별히 깊은 관계를 가지겠다 말씀하신 것이 없으니…….”
“멍청한 소리 마라. 몸을 섞으면 마음도 끌리는 법이지.”
백호는 강하고 거칠고 냉정한 산주다. 금수의 왕이니 당연한 순리다. 자연세계에서 강자가 약자를 봐주는 일 따위는 존재하지 않으며 금수를 다스리는 그는 그 정점에 서 있는 강자다. 수많은 신령들이 그의 발밑에 엎드리는 것 역시 백호의 강함에 근거를 두고 있다.
사영 역시 그 강인함 때문에 그에게 매료되었다.
“어찌 우리 뱀의 일족에게 이렇게 대하실 수가 있단 말이냐.”
다시 한 번 타르르르 하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여인은 의자의 손잡이를 꽉 쥐었다.
백호와 말을 나눌 수 있는 자들은 한 일족의 수장과 그에 가까운 몇몇 신령들이다. 다른 자들은 아직 수양이 부족해 사방신의 높은 격과 마주하면 그대로 바스러져 버리기 때문이었다. 사영은 뱀의 일족의 수장의 딸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뭐라고 하시더냐.”
“아직은 두고 봐야 하신다고…….”
수조가 눈치를 보았다. 작은 새의 신령인 그는 사영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의뭉스럽고 느린 분이니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나는 그럴 수는 없다.”
여인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육체의 관계가 단발성으로 끝나면 좋겠지만 그녀의 생각에 결코 그렇게 쉽지 않을 듯했다. 사영 본인은 여러 신령이나 인간들과 짧은 관계를 즐겼지만 백호는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그의 성격에 한 번 빠져들면 정말 뒤도 돌아보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내가 직접 가서 그 여인을 만나 보아야 하겠군.”
사영은 원래의 차가운 얼굴로 돌아가서 중얼거렸다. 수조가 놀라서 겁먹은 눈을 껌벅였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당장 가겠다.”
“하, 하지만 사영 아가씨, 지금은 백호 님이 신령들을 살피러 먼 땅으로 눈을 돌리셨을 시간입니다.”
“그러니까 가겠다는 게야. 백호 님의 눈에 띄어 좋을 일이 뭐가 있겠느냐.”
그녀의 손짓에 뱀의 일족의 시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조는 어딘가 불안에 차서 커다란 눈을 굴렸다.
시녀들이 다가와 사영의 머리와 옷차림을 다듬기 시작했다. 사영의 검은 머리에 알맞은 은색의 가느다란 사슬과 붉고 노란 구슬로 장식된 관을 얹고, 창백하게 흰 얼굴에 분을 발라 발그란 홍조를 더한다. 꼬아서 내린 머리카락을 풀어 다시 빗고 몇 갈래로 땋아 그 머리를 다시 꼬아 장식했다.
검고 푸르렀던 비단옷은 어두운 색조의 붉은 옷으로 바뀌었다. 긴 장포를 입히고 목걸이를 걸어 반짝임을 더했다. 뱀의 비늘과 같은 문양이 그녀의 손등에 나타나 있었는데 그 윤기를 더 빛나게 하기 위해 시녀들이 사영의 손등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밖에서는 금세 앞마당에 가마가 마련되고 가마꾼들이 사영의 앞에 부복했다. 뱀의 일족의 수장이 부리는 자들답게 바람을 달리는 뛰어난 가마꾼들이었다.
“가자꾸나.”
사영이 가마에 오르자 곧 가마꾼들의 발이 땅에서 떠올랐다. 바람을 가르는 새의 일족을 하위로 부리고 있는 뱀의 일족은 새들을 가마꾼으로 썼다. 바람처럼 날아가며 뱀의 여인은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신령계는 여느 때처럼 평화롭다. 그녀는 못마땅한 얼굴로 세상을 바라보았다.
백호의 옆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은 즉 이 신령계를 한 손에 쥔다는 뜻이 된다. 백호는 그 자체로도 매력적인 남자이자 강인한 신이었으나 그의 반려라는 지위가 주는 만족감 또한 사영이 무시할 바가 못 되었다.
‘어디서 난지도 모르는 인간의 계집 따위를 신령계의 왕비 자리에 앉힐 수야 없지.’
뱀의 일족은 아주 역사가 깊고 세가 대단하다. 지렁이와 뱀 모두가 그 일족에 속하니 신령계의 땅은 그들에게 빚진 바가 많았다. 지렁이가 없다면 산천초목이 돋아날 수 있는 땅의 토질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윗선의 수장인 뱀의 신령들은 대단히 힘이 셌지만 사실상 뱀의 일족의 위치를 만든 것은 가장 하위의 위치에 있는 지렁이들이었다.
‘여태껏 뱀의 일족의 요구를 무시하셨으면서, 인간의 계집을 끌어들이다니.’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 높은 사영은 절대 이 일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 백호의 궁이 보였다. 아주 높은 봉우리 위에 날 듯이 놓여 있는 기와를 얹은 궁궐. 가마꾼들은 솜씨 좋게 바람을 타고 날아 봉우리 틈으로 들어갔다.
궁궐의 앞마당에 사뿐하게 내려서자 주위에 서 있던 경비병들이 놀라 움찔했다. 하지만 가마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뱀의 일족의 문장을 보고 누구도 착륙을 제지하지 못했다. 병사 한 명이 다가와 가마 앞에 허리를 숙였다.
“뱀의 일족이십니까.”
“수장 사혈의 딸, 사영이다.”
발을 걷고 사영이 걸어 나왔다. 키가 크고 창백한 안색의 여자를 알아본 경비병들이 모두 허리를 굽혔다.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궁궐의 2층 누각을 노려보았다.
“지금 백호 님이 계시느냐?”
“예, 현재 침전에 들어 계십니다.”
“……지금은 신령계를 살피러 나갔을 시간이 아니냐? 그런데 계신다고?”
계획과 다르다. 사영은 눈을 찌푸렸다. 설마 경비병이 잘못 알았을 리는 없고.
“원래는 그러하나 오늘은 다른 볼일이 있어 살핌을 파하시고 자리에 누워 계시겠다 하시어…….”
“뭐? 자리에? 몸이 안 좋으신 게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금수의 왕이자 사방신인 남자가 아프다니. 하지만 사영은 거침없이 움직여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내 백호 님을 뵈어야겠다. 세상에, 몸이 안 좋으시다니!”
계획과 달리 백호가 모르게 여자를 만날 수 없다면 백호라도 보고 가는 쪽이 낫다. 만나서 그의 기색을 살피면 과연 지금의 관계가 그저 즐기기 위함인지 아니면 위험한 쪽으로 넘어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궁궐 앞쪽으로 갈색 머리의 굉장한 미남자가 묘한 미소를 띄고 나타났다.
“예상치 못한 방문이시군요, 사영 님.”
“묘우.”
뱀의 여인은 눈살을 찌푸렸다. 묘우는 고양이와 여우의 혼령을 몸 안에 넣고 있는 신령으로,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호박색의 눈동자나 가끔 붉게 보이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묘한 매력을 발했다.
그러나 그 매력에도 사영은 묘우를 싫어했다. 계략에 능한 뱀의 일족이 가장 싫어하는 자들이 바로 여우의 일족이었고, 묘우는 그중에서도 원로격이었다.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반응에도 묘우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사실 그는 사영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다. 신령계에서도 소문은 발이 빠르고 사영은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다. 언제쯤 올까 슬슬 기대가 되던 참이었다.
“백호 님을 만나야겠다. 비켜라.”
“지금 백호 님께선 누구도 들이지 말라 하시고 침전에 들어 계십니다.”
“몸이 좋지 않으시다면 신령계 원로의 일족으로서 내가 만나 뵙고 위로를 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
“물론이지요. 그러나 지금 백호 님은 아주 건강하시답니다.”
묘우는 과장되게 친절한 대답을 했다. 뭔가 놀림을 받는 느낌이라서 사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발밑에서 타르르르 하는 방울 울리는 소리가 났다.
원래 상위 포식자인 방울뱀의 존재가 드러나면 밑의 신령은 위축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묘우는 꼬리가 여러 개인 아주 오래 묵은 여우의 신령이었다. 그는 입가를 올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현재 백호 님께선 붉은 달의 반려인 연화 님과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하명이 있으셨답니다.”
“…….”
사영의 손이 주먹으로 틀어쥐어졌다. 묘우는 재미난 광경에 빙글거리며 웃었다. 저 도도하고 차가운 뱀의 일족들이 얼굴을 구기는 광경은 언제 봐도 좋다. 그는 연극적인 태도로 여인에게 절을 했다.
“혹여, 안에서 차라도 드시겠습니까? 그 정도는 대접해 드릴 수 있습니다. 백호 님과 반려님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말입니다.”
아마도 거절하지 않을까 묘우는 기대했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좁히고 있던 뱀의 여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차라도 마시고 가겠다. 그래야 여기에 온 보람이 있지.”
예상외의 반응에 묘우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하지만 곧 그는 시녀들에게 지시해 다과상을 내오게 했다.
궁궐의 1층 손님 접대용의 방에 다과상이 나오고 사영은 느릿하게 그곳으로 걸어들어 갔다.
사영은 대단히 능력이 뛰어난 신령이었고, 아마 귀를 기울이면 백호의 열에 들뜬 목소리가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청각을 차단했다. 이 궁궐 높은 곳 어디선가 백호가 그 건방진 인간 계집과 몸을 섞고 있을 거라는 사실 자체가 불쾌했다.
그녀의 치마 아래에서 울리는 방울 소리를 들으며 묘우는 태연하게 차를 따랐다.
“아주 달콤하고 맛있는 차랍니다. 향이 강해서 함께 곁들이는 과자의 맛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흠이지만요.”
사영은 불쾌한 낯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차 대신 과자를 입에 물었다. 그녀는 길게 찢어진 눈으로 묘우를 노려보았다.
“그 인간의 반려란 어떻게 된 물건이지?”
역시 아직 어려서 미숙하다. 묘우는 일부러 뜸을 들이며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과연 사영이 찢어진 눈을 올리며 노려보았다.
“묘우!”
“뭘 알고 싶으신 거지요?”
“알면서 묻지 마라. 너희 여우의 일족들이란 그래서 문제야.”
“저희가 문제여봤자 뱀의 일족만 할까요.”
대놓고 말한다면 이쪽도 그렇게 말해 줄 밖에. 그렇게 맞대거리를 하고도 묘우는 태연했다.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