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괜찮습니다, 반려님.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호접은 눈을 반달로 접으면서 웃었다. 등 뒤에 나비의 날개를 단 작은 여인을 보면서 연화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 인간계를 많이 드나들어 인간들이 신령들의 어떤 점에 의문을 가지는지 잘 알고 있는 호접은 뒤를 돌아서 날개를 보여주었다.
“자, 보세요. 저는 나비의 혼을 지닌 신령이랍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연화는 오색의 꽃가루가 흩날리는 신령의 날개를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쪽 벽에 기대선 백호의 눈치를 보다가 손을 내밀어 호접의 날개를 만져보았다. 얇고, 보슬하게 일어나 있는 촉감의 연한 노란색 날개. 연화는 손을 거두고 신기함에 눈만 깜박였다.
‘그러고 보니 저분은 사방신인 백호 님……. 그렇다면 이곳은 백호 님의 영토인…….’
세상은 세 개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그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저승과 현생과 천상. 현생은 다시 둘로 나뉘어진다. 인간계와 신령계. 백호는 신령계의 사방신으로, 인간을 제외한 산천초목과 금수를 다스리는 신이었다.
“예, 이곳은 신령계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어요. 백호 님의 반려로 이곳에 방문하셨으니 반려님께서는 저희를 마음대로 부리실 수 있습니다. 신령계의 모든 존재는 반려님 밑에 머리를 조아릴 것이니 염려 마십시오.”
호접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화의 손을 잡았다. 공포와 고통과 쾌락이 온통 뒤얽힌 지난밤에 갇혀 있던 연화는 조금 놀랐지만, 손을 감싸는 더 작고 보드라운 호접의 손길에 다소 안심했다.
나비의 신령은 따스하게 데운 꽃차를 준비해 대령시켰다. 인간계에서는 보지 못했던 향긋하고 달콤한 향기에, 붉은 물의 차였다. 조심스레 차를 마시는 연화를 보다가 백호가 불쑥 물었다.
“그보다, 이름은 뭐지?”
“……연, 연화라고 합니다.”
“연화. 연못에 핀 꽃인가?”
백호가 턱을 긁었다. 호접은 잠시 주군을 무례하게 노려보았다. 하룻밤을 지냈으면서 이름조차 물어보지 않았단 말인가. 아무리 인간의 여인이라 해도 지나친 일이었다.
흰 머리카락의 남자는 느른한 눈으로, 얌전하게 앉아 차를 마시는 연화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잠시 이채가 돌았다. 그녀의 주변으로, 약간 기묘한 기운 같은 것들이 어렸기 때문이었다.
사방신인 그의 눈에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지만 분명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노란 빛이 연화의 피부 위로 가끔씩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었다.
“허.”
기운의 정체를 알아차린 백호는 혀를 찼다.
“뭐야, 약사여래(藥師如來)의 가피 아래 있는 게냐?”
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주는 가피를 입은 여인이라니. 호접은 조금 놀라서 연화를 자세히 살폈다. 과연 그녀의 눈에도 아주 미세하게 연한 노란 빛이 잡혔다. 인간의 여인은 찻잔을 꼭 쥐고 고개를 숙였다.
“예……. 과분하오나 가피 한 자락 은혜를 입었습니다.”
“보살의 가피를 입은 자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군.”
사방신은 법칙을 지키는 자, 보살은 법칙에서 빠져나간 자. 둘의 사이는 적대적이지 않았지만 동시에 가깝지도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껄끄럽다고 봐야 맞았다. 보살들은 중생들을 그 법칙의 굴레에서 빼내고자 노력하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관이야 없겠지. 어차피 한 달만 내 곁에서 지내는 것이니 말이다.”
“백호 님!”
“왜, 이미 연화도 알고 있는 일이다.”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자신의 욕정은 지금 붉은 달 때문에 최대치로 올라간 상태라 연화는 끝없이 예뻐 보였다. 하지만 이 상태가 결코 한 달 이상 지속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백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곁에 앉은 연화의 작은 머리통을 끌어당겨 꽃잎 같은 붉은 입술을 머금었다. 부드럽고 달콤하다. 호접의 앞이라 연화가 수줍어 멈칫하는 게 느껴졌으나 백호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입술을 열었다.
꽃차의 향기가 감도는 도톰한 입술은 갑작스러운 접문에 놀라 움찔거렸으나 결국 백호의 의지에 얌전히 열렸다. 부드럽고 따스한 점막이 서로 맞물리고, 백호의 혀가 그녀의 자그마한 입 안으로 침범한다. 연화가 조금 힘겹게 입맞춤을 받아내다가 입술이 떨어지자 작게 한숨을 쉬었다.
반들거리는 입술을 감추며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알고 있습니다, 백호 님.”
입술이 떨어지고 연화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호접이 손을 잡아주고 차를 마시는 사이 머릿속이 많이 정리된 느낌이었다. 한 달간, 그녀는 신령계에서 백호의 반려로 살게 된다. 그의 발정기를 잠재울 기간 동안만.
“나는 내 반려에겐 아주 잘해주는 편이다. 인간계로 내려갈 때도 섭섭지 않게 재물을 챙겨주마. 네 가족들이 기뻐할 것이다.”
백호는 긴장하고 있는 연화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기억이 아직 몸에 남아 있어 연화는 몸이 저절로 긴장되었다. 비록 지금은 다정하지만 이 손이 지난밤 얼마나 거칠게 자신의 몸을 훑었는지 마치 지금 눈앞에 보이듯 기억이 났다.
다소 긴장한 채로 연화는 고개를 숙였다. 무서운데도, 긴장이 등줄기를 오싹하게 만들어 식은땀이 피부로 스미는데도 그 커다란 손은 어젯밤의 기억을, 공포와 더불어 쾌락을 불러일으켰다. 다리 사이가 다시 기묘한 느낌으로 움찔거렸다.
“자, 이제 목욕을 하러 가볼까?”
“네……?”
연화는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는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자신더러 몸을 씻으라는 말인 줄 알고 일어서려 했지만 백호가 그녀를 낚아채 들었다.
“씻겨주마. 아직 시녀들은 부르지 않았으니 말이야.”
“네, 네?”
“내가 직접 씻겨주는 건 드문 일이야, 감사하거라. 호접, 너는 물러나 있어라.”
호접은 조용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 찻잔과 주전자를 가지고 물러났다.
연화는 제대로 현실이 잘 인식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백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백호가 침실과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욕실로 들어서자 비로소 목이 막힌 소리를 냈다.
한가운데 둥그런 욕조에 가득 담긴 따뜻한 온수 때문에 욕실 안은 희미한 습기가 흘렀고, 어디서인지 시냇물 흐르는 소리도 들려왔다.
백호가 그녀를 욕실 한켠에 마련된 침상에 올리자 연화는 옷깃을 움켜쥐며 재빨리 그로부터 멀어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그녀는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괘, 괜찮습니다, 백호…… 님. 솔이 어디 있는지만 알려주시면 제가 씻고 어, 얼른 나갈 테니…….”
“흠. 벌써부터 말을 안 듣는 게냐?”
“아뇨, 아니에요. 정말 감사하지만 제가 정말로…… 직접 씻는 게 편하고, 굳이 백호 님을 불편하게 해드릴 이유는…….”
“그런 거라면 걱정마라. 난 내 신부를 씻겨주는 걸 참 좋아하니까.”
백호는 호랑이 모습을 본체로 지녔고 사랑하는 자들을 싹싹 혀로 핥아주는 걸 좋아했다. 백호의 몸이었다면 연화의 머리를 핥으며 단장해 주었겠지만 사람의 형체이니 그럴 수는 없다.
“하오나…….”
뭐라고 더 항의하려는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자 죽자고 놓지 않는다. 연화는 큰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조금 곤란해진 백호가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왜, 그리도 싫으냐?”
“싫다기보다는…… 부끄럽습니다.”
연화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것이 꽤 귀여워서 백호는 눈을 휘며 웃었다. 본래 발정기에는 모든 암컷이 예뻐 보이는 법이다. 그는 그녀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췄다.
“무엇이 부끄러워. 어차피 앞으로 한 달간은 내 신부다. 여기 누가 있다고 부끄러워?”
“하오나…… 너무 넓고, 개방된 곳이라서.”
그녀가 머뭇거렸다. 벽이 뚫린 것은 아니지만 과연 지나치게 넓은 넓이 때문에 개방되었다고 느낄 법했다. 백호는 웃으면서 그녀의 옷 위로 물을 부었다.
“꺅!”
“내 말했지? 내가 너의 신랑이다. 부끄러울 필요 없다.”
옷을 입은 채 등에 물을 맞은 연화는 놀라서 눈을 깜박거렸다.
“왜, 벗는 게 부끄럽다면 내 입은 채로 씻겨주려고 하는데. 그도 싫으냐?”
“아……. 백호 님. 그게 아니라…….”
겨우 어제 처음 관계를 가졌고, 둘은 그 전까지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으며, 심지어 그녀는 사내가 처음이었다. 안 부끄럽다면 그게 이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의 상식을 지니지 않은 백호는 망설이는 연화를 끌어당겨 안았다.
“너무 그러지 마라. 인간의 도덕이 이렇지 않다는 것은 안다만, 이곳은 신령계다. 한 달 동안 나와 즐기는 것을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을 게야. 나는 네 신랑이니.”
그는 웃으면서 그녀의 젖은 옷 위로 계속해서 따뜻한 물을 부어주었다. 정말 그는 옷을 입은 채 그녀를 씻길 생각이었다. 연화의 옷이 푹 젖은 것은 당연했고 백호의 장포도 젖어들어 갔다.
입은 것은 얇은 잠자리용 옷이라 물에 젖으니 안 입으니만 못 했다. 그것을 깨닫고 연화는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푹 숙였다.
“기억해라. 비록 한 달간이어도 너는 이 삼세계 최고의 신랑을 얻은 게다. 감히 인간 따위는 어디 대지도 못할 나이니.”
남자는 빗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곱게 빗어주었다. 청포물을 부어 연화의 머리카락을 씻어주고, 상아로 만든 빗으로 머리카락을 연신 빗었다. 매끄러운 여자의 머리카락은 마치 비단처럼 그의 굵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는 그런 여자의 뒤통수에 입을 맞췄다.
커다란 손길에 뇌리를 잠식했던 공포의 기억이 오싹한 쾌락과 함께 다시 살아났다. 귓가에 끝없이 집요하게 속삭이던 백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릴 뿐이었다.
너는 내게 몸을 열고 바치는 것이다, 인간의 암컷아…….
금수의 붉은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