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억센 나뭇잎들이 뺨을 스쳤다. 처녀는 숨이 턱끝까지 닿도록 뛰었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고, 밤하늘도 돌았다. 하지만 뒤에서 쫓아오는 괴물의 손이 지금에라도 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 그녀는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사…… 사람 살려…….”
숨도 모자라면서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기원을 올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나오는 말인지라 스스로 의식도 하지 못했다.
“꺄악!”
힘이 떨어져 휘청거리며 뛰던 그녀의 발끝에 나무뿌리가 걸렸다. 처녀는 그대로 앞으로 구르며 비탈길을 굴러 떨어졌다. 온갖 나뭇잎과 나무뿌리로 뒤덮인 비탈길을 구르며 그녀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한참을 굴러 떨어지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짧은 비명과 함께 그녀는 몸을 둥글게 말고 꼼짝도 못 했다. 곧 그녀의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졌다.
【잘도 뛰는군.】
호랑이는 으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산더미 같은 덩치의 새하얀 호랑이, 백호(白虎).
【공물을 훔쳐간 도둑 주제에.】
달을 등진 거대한 짐승의 두 눈이 형형했다. 새파란 불꽃 같은 맹수의 눈동자는 격렬한 감정으로 불타올랐다. 연화는 덜덜 떨면서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호랑이의 뒤로 거대하고 붉은 달이 비추어 맹수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산주(山主)시여.”
어느 산에나 있다는 땅의 주인. 위대한 백호에게 바치는 공물에서 빼낸 손수건이 그녀의 품에 안겨 있었다. 흰 비단에 고운 자수가 놓인 아름다운 물건이었다. 백호는 다시 한 번 으르렁대었다.
【가뜩이나 불쾌한 달이 뜬 날에……. 어린 계집아이가 못 하는 짓이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엎드려 비는 연화의 앞에서 호랑이는 어슬렁거리며 그녀의 냄새를 맡았다. 호랑이의 예민한 코에 젊은 처녀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너 때문에 제사는 망가졌고, 나를 만족시켜 재앙을 피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대로 두지 않을 것이다. 마을 전부를 몰살시킬 것이다.】
호랑이는 목을 울렸다. 매번 붉은 달이 뜰 때마다 반복되는 이 어두운 충동. 갈 곳 없고 이유 없는 분노가 차오르고 세상을 향한 파괴의 욕구로 가득 찬다. 호랑이의 새파란 눈이 어둠 속에서 시퍼렇게 빛났다.
“산주님!”
연화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눈물과 땀과 먼지로 얼룩진 흰 얼굴이 애처롭게 백호를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흩어져 흰 뺨에 붙어 있었다.
“잘못한 건 저입니다. 제발 벌은 저 하나에게만 주십시오, 제발.”
처녀는 빌면서 호랑이의 발치에 매달렸다.
자신에게는 귀한 것이지만, 고작해야 작은 손수건일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산주에게 바쳐진 공물을 빼내는 일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아무런 관계 없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목숨을 잃게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백호의 기세는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간 받아오던 공양이 끊긴 지 수십 년. 인신공양을 그만두라 일렀더니 오만해진 인간들은 아예 수신(獸神)을 공경하는 법을 잊더군. 게다가 이 작은 제사에 바쳐진 공물마저 훔쳐내다니.】
“제가 잘못했습니다, 산주님. 제발…….”
이제 연화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저 옛 이야기로만 내려오던 그 산주의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다니 이건 꿈같은 일이었다. 악몽이었지만.
백호는 고개를 들어 달을 바라보았다. 평소라면 공물을 훔쳐간 인간 여자 따위는 적당히 혼내주고 잊었을 일이지만 오늘은 날이 좋지 않다. 붉은 달이 떴다.
【운이 좋지 않은 여자로군.】
그는 몸 안에서 폭발할 듯한 분노, 향할 곳 없는 충동을 느끼면서 흰 이를 드러내어 웃었다.
몇십 년에 한 번 오는 발정기다. 유달리 크고 붉은 달이 뜨는 밤. 인간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사방신의 하나인 백호에게는 그 달이 내뿜는 음기가 온 몸으로 침투하는 것이 느껴졌다.
본래 극양의 존재인 백호에게 이 밤은 몸을 조심해야 하는 때였다. 지금 이렇게 유달리 감정이 파도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앞의 계집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양기가 달의 음기 때문에 빳빳하게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백호는 눈을 내렸다. 콧속으로 연한 인간의 살냄새가, 달리느라 피부로 솟아오른 땀의 소금내가, 무엇보다 달콤한 여인의 암컷내가 파고들었다.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희다. 반듯한 이마 위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붙어 애처로웠다. 그녀는 검고 둥근 눈으로 백호를 올려다보며 공포를 누르려 애썼다. 가여운 자. 백호는 문득 연민을 느꼈다. 그러나 동시에 아랫배를 단단하게 경직시키는 충동 또한 느꼈다. 저 가여운 여인을 부서질 때까지 범하고자 하는 욕망.
‘이 계집아이를 죽이고 빨리 거처로 돌아가야 한다.’
붉은 달이 중천이다. 몸이 훅 달아올랐다. 호랑이는 오랜만에 찾아온 발정기에 깊게 으르렁거렸다. 이대로 욕망이 솟구치다가는 눈에 띄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죽이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곁에 정상적인 절차를 거친 암컷이 준비되어 있었다면 음양의 기가 균형을 이루었을 테니 굳이 교접을 하지 않고도 발정기를 가라앉혔을 것이다. 또한 제사가 제대로 진행되었다면 굳이 이 시기에 인간계로 나오지 않았을 일이다.
모든 것이 이 여자 때문이었다.
연화는 눈을 크게 떴다. 눈앞에 있는 거대한 백호의 몸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털이 스며들고 형형한 호랑이의 얼굴 안에서 인간의 얼굴이 나타났다. 팔과 다리가 드러나고, 곧 키가 큰 남자의 모습으로 변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주 건방지고 불쾌한 일이다.”
남자의 아름다운 긴 백발이 땅에 끌렸다. 은색 눈썹이 짙은 그는 연화가 생전 처음 볼 만큼의 미남이었다. 형형한 눈동자는 색이 짙은 푸른빛. 빛이 날 만큼 희디흰 피부의 남자는 분명히…….
“산주님……?”
“그래. 내가 이 땅의 산주, 백호다.”
백호는 천천히 걸어서 여자에게 다가갔다. 느릿한 발밑으로 나뭇잎과 자갈들이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의 긴 백발이 밤바람에 날려 뒤로 흩어졌다. 연화는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광경을 바라보며 완전히 정신을 빼앗겼다.
“네 죄를 알겠지, 인간의 계집아이야.”
옷이 다 찢어진 처녀의 음기가 백호에게까지 와서 닿았다. 달의 영향인가, 유달리 강하고 향긋한 음기다. 그의 파란 눈동자가 번득였다. 연화는 그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백호의 다리에 매달렸다.
“사, 산주님. 모두가 제 잘못입니다. 제 목을 걸고 벌을 달게 받겠사오니 제발 다른 이들만은…….”
처녀는 애타게 애원했다. 속이 끓는 듯한 말에 백호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간의 여자에게서 느껴지는 음기가 그의 발을 타고 올라왔다.
거처로 돌아가 다른 암컷을 들여야 하는가 고민하던 것이 멍청하게 느껴졌다. 그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그녀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아, 흑…….”
짧은 신음성과 함께 향긋한 암컷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달콤했다.
본래대로라면 곁에 있을 형식적인 반려와 굳이 교접까지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금, 그의 머릿속은 발정기와 파괴된 제사의 분노로 엉켜 있었다.
신선한 암컷의 냄새.
평소 그는 자비로운 신이었으나 광폭해진 금수의 왕은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백호는 발발 떨고 있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아 젖혔다. 그러난 목덜미가 희고 가늘어서 입맛이 돌았다. 그는 천천히 그 피부를 핥았다.
“흣…….”
“네 목숨 같은 것은 너무 하찮아서 내게 필요 없다. 그러나 넌 다른 쪽으로 쓸모가 있을 것 같군.”
“……예, 예?”
연화는 호랑이가 자신의 목을 느슨히 물고 있는 듯한 느낌에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을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백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고 신령은 피식 웃었다. 인간이란 겁을 먹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들. 그는 좀 더 자비롭게 그녀를 쓰다듬었다.
어쨌든 백호는 지금 당장 교미할 상대가 필요했다.
“목숨을 거두지는 않겠다. 대신 내 잠자리 상대가 되어라.”
남자는 말투를 한껏 누그러뜨려 속삭였다. 여자는 여전히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의 초점이 흩어져 있었다. 백호는 그런 그녀의 옷깃 속으로 천천히 입술을 내렸다. 소금기 있는 땀에 촉촉히 젖은, 부드럽고 야들한 피부였다.
“자, 잠자리 상대라 하심은…….”
“마을에 내릴 벌을 거두는 대신, 네가 살아 있는 공물이 되어 내 충동을 가라앉히는 것이지.”
여인은 눈을 크게 떴다.
“네가 내 발정기를 그 몸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어리석은 인간의 여인아.”
“아…….”
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탄식했다. 남자의 입술이 부드럽게 그녀의 귓가와 턱선 위로 입을 맞췄다. 두려움과 당황에 정신이 나간 뇌리로도 감촉이 불식간에 스며들었다. 한 번도 남자와 이렇게 접촉을 해본 적 없었던 여자는 그 자체로 당혹해서 몸을 떨었다.
“앗…….”
백호는 그녀의 육신에서 처녀의 향기를 맡았다. 신선한 향기. 달밤에 올라와 있던 양기가 순간 훅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그는 연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녀를 뒤로 눕혔다. 달리느라 찢어지고 벌어진 치맛자락이 힘없이 흐트러졌다. 그 사이로 여자의 희고 가느다란 허벅지가 드러났다.
“사방신(四方神)의 하나, 산주 백호의 신부가 되는 것이다. 비록 잠시겠지만 좋은 꿈을 꾸는 것도 행복 아니겠느냐.”
백호는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발정기를 나기 위해 신부가 필요하지만 결코 실제 몸을 나누는 관계는 아니었다. 신령의 기운을 가라앉히는 절차를 거치고 난 암컷이 곁에 있다면, 백호의 발정기는 그리 격렬하지 않게 지나간다. 만약 공물만 제대로 들어왔다면 그가 분노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신은 스스로 충동과 욕망을 잠재워야 했다. 그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지금 바로 눈앞에 있는 인간의 여인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