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91화 (191/192)

#191 종장(2)

지금까지는 성인인 비앙카가 주변에 두문불출했고, 신의 뜻이라 알려진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는 그저 어린 여자아이였다.

만약 알렉이 사내아이였다면 대단한 위인이 될 거라 모두가 입을 모았을 테지만, 알렉은 여자아이였다. 신께서 계시까지 내려가며 알렉을 태어나게 한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들은 알렉의 존재를 그리 중하게 두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토마스가 아르노가의 대주교로 머문다 하여 교단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알렉이 자라날수록, 그들은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어나기 전에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것이 거짓말처럼, 알렉은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컸다.

어찌나 건강하게 자랐는지, 주먹질이면 주먹질, 검술이면 검술, 승마면 승마. 알렉이 일곱 살이 되었을 때 아르노 영지에 사는 열댓 살 먹은 남자 아이들 중에서 그녀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무예에 관심을 갖더니 열셋에 기사 작위를 받고, 열여섯에 아버지의 뒤를 따라 전쟁에 참전했다.

아라곤과는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그것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났다. 아라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세브랑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했고, 세브랑의 국경은 또다시 불안해졌다.

주변에서는 알렉이 여자고, 아직 어리다는 것을 이유로 참전을 반대했다. 하지만 알렉의 의지가 강경했고, 자카리 또한 단호했다. 알렉은 검의 길을 가기로 맹세했으며,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보호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 주장했다.

그리고 알렉은 아버지의 기대에 보답했다. 그녀는 열여섯의 나이와 여자라는 반대가 우습게도, 첫 참전한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이름을 알렸다.

그제야 교단의 사람들은 알렉산드라 자체가 신의 뜻이며, 신이 바라는 미래를 만들기 위한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알아챘다.

혹여나 토마스가 그녀를 등에 업고 교황청에 발을 디딜까 두려워한 그들은, 계속해서 토마스를 압박하고 경계했다.

그만큼 알렉의 무용은 맹위를 떨쳤다.

하지만 그런 알렉의 모습을 대단히 여기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알렉의 유모, 이본느 남작 부인이 그러했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옆에서 뜨개질을 하며 투덜거렸다.

“요즘 공작님보다도 더 알렉 아가씨의 무용담이 소문 자자한 거 아세요? 이러다가 혼사가 다 막히겠어요. 이게 전부 얌전히 태교해야 할 시기에 마님이 전쟁을 치르며 별꼴을 다 보셨기 때문이에요.”

“강인한 태교 덕분에 강인하게 자란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비앙카는 수를 놓던 손수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푸줏간의 요셉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어요?”

“아니. 처음인데. 별로 새롭지는 않구나.”

어깨를 으쓱이며 흘려 넘기는 비앙카가 답답했던 이본느는 가슴을 내려쳤다.

그녀에게 알렉은 친딸 이상이었다.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하는지, 이본느의 친아들인 개스톤에게 이본느가 알렉에게 쏟는 관심의 반의반이라도 쏟았으면 좋겠느냐 묻는다면 개스톤이 진저리를 치며 물러설 정도였다.

“재봉실의 한나에게 계속해서 치근대는 걸 보곤 그대로 엉덩이를 뻥 차 버렸다곤 해요. 요셉은 그대로 날아갔고요. 그 위에 올라타서…. 어휴. 하여튼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에요. 정의롭고…. 하지만 아가씨도 이제 결혼하셔야 할 나이잖아요. 데릴사위도 들여야 하는데, 언제까지 저렇게 천방지축으로 구시려는지….”

예전이었다면 데릴사위를 들여 가문을 이었겠지만, 오델리 왕녀의 왕위 즉위 이후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여자가 가문을 잇는 일이 점점 늘어났고, 아르노 공작가에서도 알렉을 차기 공작으로 삼았다.

딱히 반발은 없었다. 알렉이 보여 준 전공과 신의 뜻이라는 배경. 아르노 공작 위를 노리고 시끄럽게 굴 만한 방계의 혈족도 없었다.

알렉과 결혼한다면 공작의 남편이 될 뿐이었지만, 그 또한 높은 자리였다. 게다가 알렉은 은회색 머리카락과 서늘한 연록빛 눈동자의 미인이었다.

그렇게 좋은 조건 덕인지, 드센 성격으로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알렉은 제법 인기가 많았다. 그리고, 최근 들어 알렉의 뒤를 유난히 쫓아다니는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를 떠올린 비앙카는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뭐…. 좋다는 애가 없진 않더만.”

“그건 그것대로 문제예요. 상대가 바로 시릴 왕세손이잖아요! 왕가와 혼인하려면 어느 정도 예의범절을 익혀야….”

“유모!”

그때 알렉이 소리 높여 외치며 비앙카의 방에 뛰어 들어왔다.

귀가 드러날 정도로 짧게 잘라낸 은빛 머리카락에는 나뭇잎이 묻어 있었다.

차림새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편한 바지에 종아리까지 오는 부츠. 셔츠 위에는 튜닉. 전쟁이 없는 동안 한껏 방만함을 즐기고 있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은백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는 제 아비를 똑 닮아 있었다. 다른 것은 표정 정도일까. 무뚝뚝하니 미간만 찌푸리는 자카리와 달리, 알렉의 표정은 훨씬 다채로웠다.

그들에게 총총총 다가온 알렉은 입술을 삐죽이며 이본느에게 눈을 흘겼다.

“또 헛소리하고 있지!”

“뭘요. 알베르 왕자 전하의 아드님께서 아씨만 보면 좋아 죽는다는 건 사실이잖아요.”

이본느는 천연덕스레 시침을 뚝 떼고 답했다. 이본느가 말하는 것이 시릴임을 눈치챈 알렉은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현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알베르 왕자는 유약하고 왕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약혼한 카스티아의 공주와 열여덟에 결혼했고, 그가 스물넷이 되었을 때 시릴이 태어났다.

알베르는 자카리가 시릴의 대부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자카리 또한 그 제안을 승낙했고, 대부가 되기 위한 간단한 의식을 치르기 위해 라호즈로 향했다.

그때 알렉이 함께 동행했고, 그것이 바로 알렉과 시릴의 첫 만남이었다.

시릴과는 첫 만남부터 심상치가 않았다. 유모의 아들인 개스톤 이후로 처음 보는 아기의 모습이 신기했던 알렉이 시릴을 내려다보는 찰나, 시릴이 알렉의 머리칼을 움켜쥔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잡은 채 놔주질 않았는지, 결국 알렉은 당시 허리까지 오던 머리카락을 싹둑 자를 수밖에 없었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안 그래도 걔한테 뜯긴 머리털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알렉은 투덜거렸다. 이본느 또한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였다. 갑자기 수도에 간 아가씨가 머리를 사내아이처럼 싹둑 자르고 왔으니, 놀라지 않는 쪽이 이상했다.

하지만 이본느가 누구던가. 허투루 알렉을 키운 것이 아니었다. 알렉이 그걸 빌미로 일부러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던 이본느는 피식 웃으며 모르는 척 알렉을 놀렸다.

“뭘요. 이미 알베르 왕자님은 반쯤 아가씨를 시릴 왕세손의 신붓감으로 여기고 있는 걸요. 아가씨가 빨리 결혼하시지 않으면, 그사이에 시릴 왕세손이 훌쩍 자라 아가씨에게 청혼할걸요?”

그렇게 요란스레 첫 만남을 치른 이후, 알렉은 시릴만 보면 그렇게 좋아했다. 급기야 나중에는 엄마 아빠 소리보다도 알렉을 먼저 발음해서 주변 사람들을 기겁하게 하기까지 했다.

그 뒤로도 계속해서 시릴은 알렉이라면 좋아 죽었다. 알렉이 라호즈에 입성하기만 하면, 하루 종일 졸졸졸 알렉의 뒤를 따라붙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현재 진행형이었다. 시릴이 귀찮기 그지없었던 알렉은 질색을 하며 몸서리쳤다.

“유모! 걔랑 나랑 열세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걘 이제 세 살이야, 세 살!”

“마님과 백작님도 열세 살 차이 나는 결혼을 했잖아요. 나이는 그다지 상관없답니다.”

이본느는 흥얼거리듯 대답했다. 왕가의 결혼은 안 그래도 빠른 법이다. 칠 년 후. 시릴 왕세손이 열 살만 되어도 왕가에서는 결혼을 서두를 것이다.

상대는 차기 공작. 괜히 다른 가문과 결혼시켜 세를 불리느니, 왕가에 편입시키는 쪽이 낫다 여길 것이다.

시릴 왕세손은 세브랑과 카스티야의 적법한 핏줄이 흐른다. 잘만 하면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권까지 빼앗아 올 수 있는 혈통인 만큼, 세브랑에서는 기필코 시릴을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그를 지켜줄 수 있는 강한 이는, 바로 알렉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속셈이 곁들어진 이야기들이었다. 지금의 알렉이 신경 쓸 필요 없는. 비앙카는 길어지려는 이야기를 끊으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알렉, 갑자기 웬일이니? 지금은 뱅상과 재무 수업을 하고 있어야 하지 않니.”

“짜잔~!!”

그때, 알렉이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잘 보니 얼기설기 만든 화관이었다.

“꽃이 예쁘게 피었기에, 화관을 만들었어요! 엄마 머리색에 잘 어울릴 거예요.”

알렉이 건넨 샛노란 화관은 그리 솜씨가 좋지 못해 조악했다. 하지만 비앙카는 진심으로 감탄을 흘리며 화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머, 예뻐라.”

“마님, 거기선 수업에 빠진 걸 혼내셔야지요.”

“뭐, 수업은 빠질 수도 있지.”

비앙카가 태연스레 대꾸하자, 알렉의 입가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알렉은 다시 비앙카에게 화관을 받아, 비앙카의 머리에 씌워 주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고동색 머리카락에 노란 꽃이 무척 예뻤다.

이본느 또한 한숨을 내쉬며 거울을 가져다주었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흡족스럽게 바라본 비앙카는, 거울을 물리며 덧붙였다.

“애가 하고 싶다는 대로 둬. 알렉이 아주 노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결혼도 마찬가지지. 우리 집안이 굳이 왕가를 고집할 이유도 없잖아. 알렉이 싫으면 다른 혼처를 찾아보면 되는 일인 걸. 왕녀님처럼 결혼을 안 하는 선택지도 있고.”

“하지만 마님….”

“나도 하고 싶은 일만 해 왔잖니. 얘도 그래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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