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90화 (190/192)

#190 신의 뜻(11) / 종장(1)

갑자기 번쩍이는 빛에 모두가 창밖을 바라보기가 무섭게, 새하얀 빛이 터져 나오듯 그들을 휘감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의 번쩍이는 빛은 세상의 더러운 때를 정화하듯 상서롭게 느껴졌다.

세상을 잠식한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러면서 구름 너머에서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축복의 찬가. 하늘에서 들려오는 찬가에 모두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건….”

“기적….”

자카리와 비앙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교황이 서신에서 언급했던 기적이 바로 이것임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아이가…. 신의 뜻….”

그제야 비앙카는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신이 그녀를 선택하여 내려 보낸 것은 자카리를 살리기 위해서였을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이 아이를 갖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걸.

생각해 보면, 그녀가 회귀하자마자 다짐한 것은 바로 자카리의 후계자를 갖겠다는 의지였다. 신이 보여준 미래는 그녀에게 무엇보다도 뚜렷하게 신의 뜻을 각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자카리 또한 나직이 탄식했다.

신의 뜻이 자카리, 그를 살리기 위해서였다면 비앙카가 아닌 자카리에게 미래를 보여주었어도 되는 일이었다. 굳이 비앙카일 필요가 없었다.

신의 뜻이 그들 아이의 존재에 있다 해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를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카리와 비앙카, 그 둘이었으니까. 이 또한 굳이 비앙카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은, 비앙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자카리는 납득했다.

“왜 내가 선택받지 못했는지 알겠군.”

자카리는 눈물 젖은 뺨을 끌어 올리며 작게 웃었다.

“꿈속에서 그대는 날 싫어했다고 했지.”

자카리 또한 비앙카가 꾼 꿈의 내용에 대해 어렴풋하게 들어 알고 있었다.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꿈속의 그녀는 그라면 질색을 했다고…. 자카리는 비앙카의 손등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난, 그대의 거부를 감내하며 손가락을 대는 것조차 용기가 필요했을 테니까.”

비앙카가 자신을 싫어한다면, 최대한 멀어져 주는 것이 그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결혼하기 전이었다면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이미 결혼했다면 피임하는 것으로….

그 어떤 최악의 미래를 본다 해도 똑같다. 자카리는 차마 먼저 움직이지 못한 채, 똑같이 웅크리고, 똑같이 겁을 먹고, 똑같이 도망치겠지.

비앙카만이 자카리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이였다.

“나는 변하지 못하는 사내야, 비앙카. 이 모든 걸 바꿔 준 것은 그대야. 그대 덕에 나는 행복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지.”

자카리는 비앙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물기 어린 검은 눈동자 너머로, 지금껏 자카리와 그녀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순탄치 않은 많은 일이었다…. 신께서 보여준 꿈속에서든, 꿈 밖에서든. 하지만 단 하나 확실히 다른 것은, 꿈속에서 없던 행복이 지금 그녀의 품 안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었다.

비앙카는 살풋 웃으며 아기의 코끝을 어루만졌다.

“신께서 이렇게까지 하실 정도로, 우리 딸아이가 엄청난 일을 해낼 위인이라도 되나 봐요.”

“그러게 말이오.”

아기는 코끝을 들썩이며 킁킁거렸다. 비앙카의 작은 몸에 비해 아기는 상당히 건장한 체격이었다. 기골이 장대하다는 산파의 말에 틀린 점 하나 없었다.

자카리가 신기하고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아기를 바라보는 모습에, 비앙카는 충동적으로 자카리에게 아기를 넘겼다.

“한번 안아 봐요.”

“내, 내가? 울지는 않을까?”

“울면 달래면 되죠.”

너무나 간단한 해결책에 말문이 막힌 자카리는 엉거주춤 아기를 받아 들었다. 지금껏 아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던 만큼, 자카리는 당황해하며 어떻게 아기를 안아야 하는지 한참을 헤맸다.

그의 팔뚝보다도 작은 아이에게서는 달큰한 냄새가 났다. 자카리에게서 나는 쇠붙이 냄새와도, 비앙카에게서 나는 고혹적인 장미향과도 달랐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훈수 아래, 한참 끝에서야 어설프나마 그럴듯하게 아기를 안아 들 수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를 마주 보며 눈을 휘어 웃었다. 전장의 늑대라는 위명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수룩한 미소였다.

“어때. 좀 아빠 같아 보이오?”

“그럼요.”

비앙카 또한 마주 웃었다. 자카리와 그를 닮은 딸아이가 나란히 있는 모습을 보아하니 왜 이리 눈이 시린지 알 수가 없었다.

자카리는 비앙카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치켜세워 줬지만, 신께서 미래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이 모든 것이 어림없는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것이 비앙카였다. 비앙카는 무사히 이 모습을 볼 수 있게 안배해 준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성인은 의무를 다했고, 신의 뜻은 이루어졌다.

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처음엔 복수라고 생각했다. 그다음은 자카리의 생존, 혹은 자코브의 죽음…. 그녀는 언제나 살아남고, 버티고, 이겨내는 것에만 초점을 맞췄다. 그녀에게 쏟아져 내리는 불행을 피해내는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야 확신할 수 있었다. 신께서 바라신 것은 불행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미래를 쟁취하는 것이라는 걸.

신의 뜻의 또 다른 이름은, 다름 아닌 행복이었다.

* * *

빅토르 2세는 다음 겨울을 넘기지 못하고 서거했다. 오델리 왕녀가 제왕학을 배운 지 일 년이 조금 안 된 시기였다.

오델리는 부랴부랴 왕위에 올랐고, 명실상부한 세브랑의 여왕이 되었다.

오델리를 탐탁지 않아 하던 귀족들은 그녀가 우왕좌왕하며 나라를 어찌 꾸려 가야 할지 모를 것이라 입을 모았다. 연회나 시종일관 열면서 나라의 국고를 비울 거라고도 덧붙였다.

하지만 그녀가 왕이 되기가 무섭게 한 일은 바로 아라곤에게 칼날을 들이민 것이었다. 그녀는 자코브와의 밀약을 들이밀며 아라곤에게 배상의 책임을 물었다.

아라곤과의 조율에 사신으로 나선 것은 바로 자카리였다. 자카리가 사신으로 아라곤을 방문하니, 아라곤은 올 것이 왔구나, 싶은 심정으로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최후의 발악으로, 그들은 성인인 비앙카와 적대할 생각이 없었다 주장했다. 하지만 세브랑 측에서는 자코브가 아르노 성을 침략한 일을 묵인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증거로 들이밀었다.

아라곤은 결국 오델리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종전 협상을 마무리 지었고, 세브랑에는 평화와 부흥이 찾아왔다.

그전까지 귀족들은 오델리가 왕이 된 것이 그저 자코브의 죽음 덕에 얻은 어부지리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녀를 지나치게 총애했던 왕이, 아들들의 죽음에 노망이 난 것이라고.

하지만 아라곤까지 무릎을 꿇으니 더 이상 나태하게 생각할 수 없었다.

오델리는 단호했으며, 냉정했고, 이성적인 위정자였다.

더불어 그녀의 뒤에는 아르노 공작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경한 그녀의 정치에 반발할 용기가 없었던 귀족들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명에 따르게 되었다.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다.

오델리가 왕위에 집권한 지도 어언 십오 년.

그녀가 왕위에 오르기 전 해에 태어난 아르노가의 외동딸, 알렉산드라 드 아르노도 열여섯이 되었다.

열여섯은 충분히 결혼 적령기였다. 게다가 그녀의 아버지는 영웅 아르노 공작이며, 어머니는 성인 비앙카가 아니던가. 단지 그 조건만 놓더라도 알렉산드라와 결혼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아르노가에 구애의 서신이 물밀듯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알렉산드라는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품에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 아르노 영지의 들판을 재빠르게 달려가던 알렉은 마을에 들어오고 나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막 교회에서 기지개를 켜며 나오던 대주교 토마스와 부딪힐 뻔했지만, 가까스로 그를 스쳐 지나갈 수 있었다.

깜짝 놀란 토마스가 소리 질렀다.

“아이고, 신도님!”

“죄송해요, 대주교님! 빨리 어머니한테 가 봐야 해서요. 급해요!”

알렉은 슬쩍 뒤돌아보며 외치고는, 다시 쌩하니 달려갔다. 길쭉한 팔다리로 흰 사슴처럼 성큼성큼 뛰어가는 모습에선 생기가 흘러넘쳤고, 짧게 자른 은빛 머리카락은 태양을 받아 흩뿌려진 유리 조각처럼 반짝였다. 소년 같은 중성적인 매력은 보는 이들을 사로잡았다.

토마스는 그런 알렉의 뒷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교황에 의해 대주교로서 아르노 영지에 보내진 지도 어언 십육 년. 알렉이 태어났을 때부터 지켜봐 왔던 만큼, 그녀의 천방지축인 모습 또한 귀엽기 그지없었다.

토마스는 그저 막 주교가 되었던 신출내기 수도사였던 자신이 어쩌다 아르노 영지까지 오게 되었는지 떠올렸다.

아르노에 부임한 대주교의 자리를 놓고 추기경들이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할 때, 대뜸 교황이 추천한 것은 바로 토마스였다.

누구의 파벌도 아니고, 신분도 주교일 뿐이다. 그런 그를 서품마저 대주교로 올려서 아르노 영지로 보내려 하니, 주변 이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토마스 또한 부담스럽다며 자리를 사양했다. 하지만 교황은 거듭 요청했다.

“자네가 지금껏 파벌에 들어서지 않은 것은 자네의 그 균형 감각 덕분 아니던가. 아르노 영지에 필요한 건 그런 이이네. 아무의 편도 아닌 자.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 자. 오로지 신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자.”

교황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토마스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수많은 추기경들이 그를 자신의 파벌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토마스는 꿋꿋이 버텼다. 십여 년이 넘고 나서야 추기경들로부터 연락이 좀 뜸해졌지만, 최근에는 다른 종류의 견제를 받고 있었다.

바로, 토마스가 추기경이 되어 교황이 되려는 욕심을 품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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