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신의 뜻(10)
자카리는 비앙카를 달래듯 덧붙였다.
“그대가 아이를 낳고, 한 번 더 결혼식을 할까. 그러면 그대도 이번 결혼식은 기억하겠지.”
“됐어요. 떠들썩한 연회는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냥 이렇게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추억은 다른 거로 쌓으면 되니까.”
비앙카는 졸음이 그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이 순식간에 훅 몰려와 그녀를 덮쳤다. 안 그래도 어제 밤늦게까지 이본느의 결혼 선물을 짜느라 잠이 부족한 터였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끔뻑끔뻑 눈을 감았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어깨를 감싸듯 팔을 둘러,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작고 가녀린 어깨가 이내 고른 숨소리와 함께 들썩였다.
창밖에서 낄낄대는 외침과 고함 소리가 윙윙이듯 희미하게 들려왔다. 술에 취한 소뵈르가 연못에 빠져 허우적거리는지, 로베르가 소뵈르에게 이런저런 잔소리하는 소리도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잠의 장막이 드리운 듯, 소란 또한 적막히 잦아들었다.
비앙카는 신음을 내며 몸을 뒤척였다. 요즘 부쩍 잠들기 힘들어하곤 했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를 내려다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달이 유난히도 밝은 밤이었다.
* * *
수확제가 지나고, 비앙카의 출산일이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출산 예정일 며칠 전부터 비앙카는 가진통으로 괴로워했다. 가진통이 얼마나 심했는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할 정도였다.
가진통과 진통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웠다. 그 때문에 비앙카는 일찍부터 준비된 산실로 옮겼고, 산파를 비롯한 이들은 일찍부터 대기하며 비앙카의 양수가 터지기만을 기다렸다.
대기하는 것은 산파뿐만이 아니었다. 비앙카가 산실을 들어간 것을 기점으로, 자카리 또한 하던 일을 손에서 놓았다. 애초에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기에 놓을 수밖에 없었다.
자카리는 바싹바싹 마르는 나무처럼 시들었다. 그의 안색이 퀭했다. 그는 마른 입을 몇 번이고 혀로 축이며 초조하게 산실 밖을 거닐었다.
산실 안에서 비앙카의 고통에 찬 신음과 비명이 간간이 흘러나왔다. 산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는 만큼, 자카리는 막연히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자카리는 최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쟁에서도 패배를 염두에 두면, 잘 풀릴 전쟁도 진창에 처박게 되기 마련이었다. 자카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성경 외듯 입으로 중얼중얼거렸다.
그 곁에서 뱅상과 세 부장들도 초조하게 발을 굴렀다. 여자인 이본느는 비앙카와 함께 산실에 들어가 그녀의 수발을 들 수 있었지만, 사내들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괜히 연무장에서 먼지 냄새나 묻히고 다닌다며 산파에게 등짝을 후려 맞을 뿐이었다.
걱정하는 것은 영지민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원체 몸이 약한 마님이다 보니, 이러다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일을 하던 와중에도 몇 번씩 걱정스레 성을 바라보았다.
그러던 와중, 산파가 산실 밖으로 급히 뛰쳐나왔다. 산실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카리와 눈이 마주치기가 무섭게, 산파는 자카리에게 다가갔다. 산파의 늙은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카리는 바로 산파를 채근했다.
“비앙카는,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진통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지났는데, 아직도 진통만 계속된단 말이냐!”
자카리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은 식은땀으로 젖어 들었고, 턱이 바르르 떨렸다. 산파를 책해 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오갈 데 없는 끓는 마음에 기어코 목소리가 높아졌다.
산파는 아르노에서 태어난 모든 아이들을 받아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비앙카와 같은 경우도 없진 않았다. 물론, 끝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눈앞이 깜깜했다. 산파는 침중하게 덧붙였다.
“벌써부터 고통으로 힘이 다하시니, 정작 힘을 주셔야 할 때 지치셔서 힘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야기인즉슨….”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하면 큰일 납니다.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셔야 할 때가 올 겁니다….”
산파가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넌지시 말했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분명했다. 자카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카리의 몸이 휘청이기가 무섭게 세 부장이 일시에 달려들어 자카리를 부축했다. 하지만 그들 또한 망연자실하였다.
자카리는 간신히 입을 열어 더듬더듬 말했다.
“비앙카는, 비앙카를.”
혀가 꼬이며, 발음이 불분명했다. 자카리는 머리를 흔들었다. 이럴 때일수록, 그가 정신을 단단히 차려야 했다. 자카리는 애써 이성을 긁어모았다. 어찌나 조각조각 나 흩뿌려졌는지, 정신을 차리는 데도 한참이었다.
자카리는 다시 고개를 들어 산파를 바라보았다. 결심을 내릴 것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단호히 빛났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비앙카만큼은 살려라. 알겠느냐?”
자카리의 명령은 애원에 가까울 정도로 절박했다. 산파는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산실에서 산파를 돕던 하녀 하나가 다급히 뛰쳐나오며 산파를 불렀다.
“산파, 산파! 마님의 양수가 터졌어요!”
“그럼 전 이만…!”
“얼른 들어가 보거라, 얼른!”
산실 안의 상황이 걱정되었던 자카리는 산파의 등을 떠밀었다. 새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그는 산실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산실에서 고군분투하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희미하게,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던 비명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또렷했다. 거의 고문당하는 것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차라리 자신이 고통스러우면 얼마나 좋을까. 비앙카는 종잇장에 손가락을 베이는 일조차 드문, 귀하디귀한 몸인데…. 저 고통을 어찌 견디고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방 앞을 이리저리 쏘다니던 자카리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는 두 손을 꽉 맞잡은 채,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비앙카가 무사하기를….
어찌나 간절했는지, 그의 기도가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명이 일순간에 뚝 그쳤다. 갑작스러운 침묵에 자카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으아아아아아앙!”
비앙카의 비명 대신 울려 퍼진 것은, 아이의 울음소리였다. 어찌나 우렁찬지 산실 너머까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자카리는 눈만 깜빡였다.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자카리가 사태 파악을 하기 전, 산실의 문이 열렸다. 나온 것은 이본느였다. 계속 고생했는지 그녀의 차림새는 흐트러져 엉망이었지만, 얼굴만큼은 활짝 피어 있었다. 이본느는 밝게 외쳤다.
“아가씨입니다! 아가씨예요!!”
“산모는? 산모는 무사한가?”
이본느의 웃는 얼굴을 보아하니 어렴풋이 답을 알 것 같았지만, 제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가 없었다. 자카리는 이본느가 대답하기도 전에 벌떡 일어나서 산실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이 다급했다.
하녀들이 산실을 이리저리 오가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 한가운데, 비앙카는 침대에 해쓱한 표정으로 누워 있었다. 기진맥진하여 몸을 가누지 못하는 비앙카의 등에 하녀 하나가 쿠션을 대어주었다.
그녀의 하얗고 창백한 뺨에는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달라붙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발견하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것이 한계인 듯, 그녀의 웃음은 지쳐 있었다.
감격에 겨웠던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성큼 다가갔다. 그의 입술은 좀처럼 지금의 심정을 뱉어내지 못했다. 자카리는 하염없이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비앙카였다.
“당신 얼굴이…. 왜 그래요. 애는 내가 낳았는데…. 당신이 고생한 얼굴이야.”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신의 마음고생은 비앙카의 고생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자카리는 매가리 없이 침대 위에 널브러진 비앙카의 가는 팔뚝을 노려보았다. 목 너머로 울컥하는 것이 끊임없이 치솟아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때, 산파가 끼어들었다. 산파는 아이를 깨끗한 싸개에 싸서 비앙카에게 안겨 주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울음소리가 우렁차 사내 아기씨인 줄 알았는데, 여자 아기씨네요. 그래도 벌써부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이 아주 어여쁩니다.”
비앙카는 아이를 안기 위해 팔을 들었다. 그녀의 가는 팔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비앙카는 기어코 아이를 품에 안았다.
비앙카는 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정수리에 나 있는 은회색빛 머리카락. 새하얀 피부. 자카리와 그녀의 아이…. 비앙카는 장난스레 미소 지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아이예요. 내가…. 당신 닮을 거라고 했죠?”
“응, 응…. 비앙카, 무사히 살아줘서 고맙소….”
그제야 자카리의 목을 막고 있던 것이 터져 나갔다. 드디어 말을 뱉어 낸 자카리는 오열하며 비앙카에게 무너졌다.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얼마나 몸을 떨었던가? 자카리는 지금 이 순간이 믿기지가 않았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은 아닐까?
자카리의 눈물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 그의 인생에서 눈물은 사치일 뿐이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무도 받아 줄 데 없는 천덕꾸러기가 된 그의 눈물을 기꺼워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누르고 또 억눌러 왔다. 그렇게 아주 뿌리째 메말라, 그 존재조차 잊은 지 오래였다….
그것이, 드디어 제 울타리를 찾고 나서야 솟아올랐다.
비앙카가 자카리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카리는 그녀의 가는 손가락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눈물 젖은 뺨이 비앙카의 손바닥을 축축이 적셨다.
그렇게 두 사람이 첫 아이를 안게 된 기쁨에 젖어 있을 때,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천지개벽하는 것과도 같은 빛이 세상을 내리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