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88화 (188/192)

#188 신의 뜻(9)

자카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에서 환호가 치솟았다. 미리 알고 있던 비앙카는 빙그레 웃으며 박수를 쳤고, 로베르와 소뵈르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더니 바로 함성을 외치며 가스파르에게 달려갔다.

“아주 인생 폈구나, 가스파르!”

“축하한다, 짜식, 결혼도 출세도 네가 제일 먼저 가는구나!”

로베르와 소뵈르가 가스파르의 양옆에서 그의 목에 팔을 걸고 매달리는 동안, 정작 당사자인 가스파르는 얼떨떨해하며 눈만 끔뻑였다. 이본느 또한 믿기지 않는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스파르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자카리의 앞에 부복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쉽사리 믿기엔, 너무나 꿈같은 이야기였다.

세습되지 않는 기사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자신 또한 기사가 되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던가! 그런데 남작이라니.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이본느가 그저 기사의 부인이 아닌, 남작 부인이 되는 것이었다. 감격에 겨웠던 가스파르는 잠긴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영광입니다. 공작님.”

가스파르가 고개를 숙이자,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오늘만큼 행복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흥분으로 일렁거렸던 가스파르의 눈빛이 빠른 속도로 가라앉았다. 그의 낯은 언제나와 같은 철벽, 그 자체가 되었다. 가스파르는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영지는 과분합니다. 아직 제가 아르노에서 할 일이 남아 있는 만큼, 영지를 내려 주시는 것은 조금 더 시기를 미뤄주십시오. 저는 아직 부족합니다.”

가스파르가 그리 말하며 고사하니, 주변에서 숨을 들이켰다. 영지 없는 작위는 그저 명예직일 뿐이다. 가스파르의 결정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당황한 소뵈르가 목소리를 낮추며 가스파르를 만류했다.

“야, 당장 취소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때, 가스파르의 옆에 이본느가 나란히 부복했다.

다들 이본느가 가스파르를 호되게 질책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영지 없는 남작 부인은 그저 기사의 아내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보내기 때문이었다. 남작 부인으로서 보장된 안락한 생활을 그대로 뻥 차 버린 가스파르에게 단단히 화가 났을 거라 생각했다.

이본느는 머리를 조아리며 자카리에게 간청했다.

“저도 남편과 같은 생각입니다. 저는 본디 배운 것이 없고 아는 것이 없어, 영지를 맡게 되어도 주먹구구식으로 엉망일 것입니다. 한동안 마님의 곁에서 영주 부인의 의무에 대해 배울 수 있게, 자비롭게 이해해 주십시오.”

가스파르에 이어 이본느까지. 이제 막 결혼한 신혼부부가 나란히 던진 충격 선언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비앙카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영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도 영지를 꾸릴 수 있다는 선례가 바로 비앙카 아니던가.

모두에게 충격을 던진 이본느의 낯은 담담했다. 더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이본느는 더듬더듬, 하지만 소신 있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마님께선 아직 해산하지 않으셨지 않습니까. 제가 계속해서 마님의 시중을 들어 온 만큼, 계속 곁에 있어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만약 허락된다면, 아기씨까지 제가 키우는 것이 바람입니다…. 부디, 마님을 좀 더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본느가 고개를 숙이며 빌었다. 이본느의 말인즉슨, 계속해서 시녀로 일하며 훗날 아이의 유모가 되고 싶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아르노가가 공작가가 된 만큼, 공작 부인의 시녀를 비롯해 후계자의 유모 또한 귀족가 여인으로 들이는 것이 관례이기는 했다. 그러니 남작 부인이 되고 나서도 시녀 일을 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이렇게 될 걸 염두에 두고 작위를 준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까지 고생했으니까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비앙카는 이본느가 영지를 고사하는 것이 의무니 뭐니 하는 핑계들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비앙카 그녀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비앙카가 얼마나 사람을 가리는지 아니까. 얼마나 이본느에게 의지하는지 아니까.

전쟁을 치르고, 미래를 바꾸려 아등바등하는 동안 비앙카는 자신이 많이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녀만의 생각일 뿐이었다.

비앙카는 이본느를 만류하려 했지만,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이본느는 강경하기 그지없었다. 언제나 침착한 그녀의 암갈색 눈동자가 절박하리만큼 빛났다.

이본느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저 시녀와 주인이기 때문에? 충성심으로?

아마 비앙카가 요 며칠 밤을 새 가며 이본느의 결혼 선물을 만들고, 전쟁 속 위험한 순간 그녀를 감싸 안은 것과 비슷한 이유이지 않을까.

이본느에게 있어 비앙카는 걱정스러운 막냇동생이었고, 비앙카에게 있어 이본느는 처음으로, 제 의지대로 곁에 둔 이였다. 그렇기에 비앙카는 차마 나를 위해 이곳에 있을 필요 없다며 입을 떼지 못했다. 비앙카의 속에서 왈칵, 무언가가 치솟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비앙카는 울먹임을 꾹 내리눌렀다. 그녀는 눈을 휘어 웃으며 장난스레 덧붙였다.

“대상이 잘못된 것 같구나, 이본느. 영주 부인으로서의 일을 배울 상대는 내가 아니라 뱅상이야.”

“마, 마님!”

뱅상이 시뻘게진 얼굴로 다급히 외쳤다. 비앙카가 영지의 일이라면 손을 놓다시피 하여 뱅상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는 만큼,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들 소리 내어 웃었다.

웃을 수 없는 것은 뱅상뿐이었다. 노집사는 짐짓 표정을 엄히 하며 비앙카를 타일렀다.

“이제부터는 마님께서도 일을 배우셔야지요! 곧 있으면 어머니가 되지 않습니까! 본보기가 되셔야….”

“내 자식은 나보단 내 남편을 더 많이 닮을 것이라, 내가 좀 게을러도 잘 자랄 것이네.”

비앙카는 천연덕스레 대꾸했다. 너무 당연하다는 듯 확신하는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었던 뱅상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어떻게 그리 확신하십니까?”

“남편을 닮았으니, 그 전쟁 통에도 꿈쩍도 안 했겠지. 날 닮았어 봐라.”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너무나 태연자약했다. 비앙카의 말에 묘하게 설득되어버린 뱅상의 입이 딱 다물렸다. 뱅상은 무언가 반박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비앙카의 논리를 깰 만한 주장이 생각나지 않았다.

“하여튼, 이본느.”

비앙카가 이본느의 앞에 다가가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던 이본느는 비앙카의 손에 머뭇머뭇 손을 얹었다.

비앙카가 이본느의 손을 잡아당겼다. 비앙카의 악력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이본느는 비앙카의 의도를 읽고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앙카는 이본느의 손을 양손으로 감싼 채, 그녀의 다정한 암갈색 눈동자에 눈을 맞추며 읊조리듯 조용히 말을 건넸다.

“내 아이를 잘 부탁하네. 나는 유모가 일찍 죽어서 홀로 외롭게 컸어. 그대는 내 아이에게 그런 슬픔을 주어서는 안 돼. 알았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야 하고….”

침착하게 말하려 했지만, 기어코 울컥임을 참아내지 못한 비앙카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걱정 마세요, 마님. 저는 마님과 달리 튼튼하잖아요.”

이본느는 입버릇처럼 항상 건네던 말을 중얼거리며, 비앙카의 작은 어깨를 끌어안았다. 비앙카에게서 나는 장미향이 이본느의 머리를 장식한 마거리트 꽃향기와 뒤섞였다.

둘은 마주 보며 빙긋 웃었다. 이제 그들은 그저 주인과 시녀 관계가 아닌, 평생을 함께 지낼 친우였다. 두 사람 사이에 웃음이 반짝반짝, 별똥별처럼 떨어졌다. 서로의 행복을 빌듯이.

* * *

결국 가스파르에게 내려 준 영지는 일정 기간 동안 아르노에서 관리하고, 영지의 수익금을 봉급에 얹어서 내려 주는 것으로 결정 내렸다. 가스파르도, 이본느도 그것까지 거부하지는 않았다.

피로연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떠들썩한 노랫소리가 결혼식장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아쉽게도 비앙카는 일찍 침실로 돌아갔다. 비앙카가 걱정되었던 자카리 또한 같이 자리를 비웠다. 더불어 이런 날일수록 상관이 일찍 빠져 주는 게 분위기를 살리는 것이라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비앙카와 자카리는 침대에 나란히 누웠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팔베개를 해주었고, 비앙카도 자카리의 곁에 딱 달라붙었다.

창문 너머로 깔깔거리며 웃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넘어왔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에 머리를 뉘인 채, 고요히 그 소리를 들었다.

그러던 와중, 비앙카가 뜬금없이 물었다.

“당신은 우리 결혼식 날 기억나요?”

“물론이지.”

자카리는 손가락으로 비앙카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대답했다. 그날을 어찌 잊겠는가. 결혼식을 떠올린 자카리의 입가에 빙긋이 호선이 그려졌다.

비앙카는 결혼식을 떠올리려는 듯 인상을 썼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미간이 찡그려지며 주름이 잡혔지만, 야속하게도 기억은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전 좀 가물가물해요. 엄청 울었던 것밖에.”

“그러면 전부 기억하는 거나 다름없지.”

자카리의 목소리 끝에 낮은 웃음이 번졌다. 결혼식의 처음부터 끝까지 엉엉 울던 어린 비앙카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 사람의 주장은 무력할 뿐이다. 비앙카가 입술을 삐죽였다.

“요즘 당신, 은근히 능글맞아진 것 같아요.”

“당신 말대로 취미를 좀 바꿔 봤지. 진지한 얼굴로 농담하는 걸로.”

“지금은 전혀 진지한 얼굴이 아닌걸요. 날 놀리는 걸 재밌어하고 있잖아요.”

비앙카가 투덜거렸다. 그녀의 머리 위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졌다. 목소리만 들어도 자카리가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훤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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