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신의 뜻(8)
5월. 비앙카가 임신한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이제야 비앙카의 배가 눈에 띄게 불러 오기 시작했다.
원체 마른 편에 배까지 홀쭉하니 아이가 도대체 어디에 들어찬 걸까, 건강은 한 걸까 걱정했는데, 활발한 태동에 그제야 다들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지금껏 걱정한 것이 우습게도 아이의 움직임이 어찌나 활발한지, 하루 온종일 뒤집기를 하고 날뛰기를 반복했다. 태동에 깜짝 놀라 잠에서 깨는 일이 다반사였다.
수면 부족. 게다가 최근 비앙카는 허리가 아파 오래 걷지 못하고 쉽게 주저앉기가 일쑤였다. 자카리를 비롯한 측근들의 걱정도 더욱 커져만 갔다.
오래지 않아, 비앙카는 꼼짝없이 방에 누워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영지에 두문불출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비앙카가 방을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이본느와 가스파르의 결혼식이었다.
영지민들의 축하 속에서, 드디어 두 사람의 결혼식 날이 도래했다.
결혼식은 아르노 성의 만찬장에서 이루어졌다. 보통 가신의 결혼식이라 하여 성의 만찬장을 내주는 일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비앙카를 곁에서 지킨 중역들이었다. 충분히 만찬장을 내어줄 자격이 있었을뿐더러, 몸이 무거운 비앙카가 부득불 결혼식에 참석하겠다 하니 성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 결혼식 장소를 잡아야만 했다.
비앙카가 우긴 덕에 오월의 신부가 된 이본느는 다른 하녀들에게 둘러싸여 평소보다 좋은 옷을 입고 예쁘게 단장하고 있었다. 좋은 날이라 그런지, 이본느의 얼굴이 말갛게 피어올랐다.
항상 틀어 올렸던 연갈색 머리카락을 곱게 땋아 내렸고, 사이사이 꽃으로 장식했다. 단장을 돕던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예쁘다 입을 모았다.
“가스파르 경도 오늘만큼은 눈이 휘둥그레질걸?”
“무슨 소리야. 가스파르 경은 항상 이본느를 볼 때마다 눈이 휘둥그레 했어.”
“아, 이렇게 예쁜데. 베일이 없는 건 좀 아쉽네.”
“어쩔 수 없지. 우리 같은 평민 결혼식에 베일은 사치잖아. 그나마 이본느나 되니까 이렇게 호화롭게 결혼하는 거지.”
하녀들은 이본느의 머리를 매만지며 수다를 떨었다. 이본느는 살짝 웃었다. 베일이 없어도 그녀는 충분히 행복한 신부였다.
그때, 이본느의 단장실에 비앙카가 찾아왔다. 방 안에 있던 하녀들을 비롯해 이본느까지 모두 화들짝 놀랐다. 단장을 하던 이본느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는 것을 비앙카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됐어. 앉아 있으렴. 축하 인사를 하러 온 거니까.”
“마님, 여기까지 어떻게…!”
“너는 지금 그게 중요하니?”
“그럼요!”
비앙카가 어이없어 하며 되묻자, 이본느는 사색이 된 낯으로 버럭 외쳤다.
안 그래도 비앙카는 낯을 가려 곁에 아무나 두지 않는 편이었다. 오늘 결혼 당사자인 이본느가 어쩔 수 없이 비앙카의 곁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비앙카는 혼자나 다름없었다.
계속해서 걱정하는 이본느에게 비앙카는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일축했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을 쉽게 내려놓을 수 없던 찰나에 홀로 등장한 비앙카의 모습은 이본느를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하녀인 그녀가 공작 부인인 비앙카에게 소리 높이는 모습에 다른 하녀들이 화들짝 놀라 이본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걱정 마렴. 공작님이 앞까지 함께해 주셨단다.”
그제야 이본느는 안도할 수 있었다.
신부의 대기실에 오는 것은 친한 친구들, 혹은 가족들뿐이다. 비앙카가 일부러 대기실까지 찾아온 것에 감격한 이본느의 말끝에 물기가 묻어났다.
“연회장에서 뵈어도 되는데….”
“이걸 먼저 건네주어야 할 것 같아서.”
별거 아니라는 듯 툭, 건네는 말과 함께 비앙카가 꾸러미를 내밀었다. 모두의 눈이 비앙카가 건넨 물건에 꽂혔다. ‘그’ 비앙카가 건네는 물건이니 예사 물건은 아닐 것이다. 이본느가 꾸러미를 푸는 동안, 모두는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꾸러미 속에서 드러난 것은 길고 화려한 레이스 베일이었다. 좋은 견사를 썼는지, 레이스는 비단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같은 부피만큼의 황금을 얹어주어도 살 수 없을 만큼 귀한 물건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하물며 비앙카, 그녀가 직접 짠 것이 아니던가?
“신부니까, 베일이 있어야 할 것 아니니.”
민망했던 비앙카는 고개를 홱 돌렸다. 남들의 감탄을 듣는 건 익숙했지만, 온전히 호의로 선물을 주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본느는 믿기지가 않는 듯 레이스를 몇 번이고 만져 보았다. 이렇게 커다란 레이스라면 분명 짜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렸을 텐데…. 비앙카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는 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이건 도대체 언제 짜신 거예요, 마님?”
“내 손에 걸리면 금방 뚝딱이지.”
비앙카가 젠체하며 우쭐해했다.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덧붙이는 것이, 심드렁하기까지 했다.
감격으로 말문이 막힌 이본느는 베일을 하염없이 만지작거렸다. 그녀가 본 그 어떤 것보다도 손이 많이 들어갔으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레이스였다. 오델리 왕녀조차도 이런 레이스를 갖지는 못했으리라.
하지만 예쁜 것 이상으로, 비앙카가 그녀를 그렇게 챙겨 주었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이본느의 목에 울음이 끓었다.
“저, 이걸 가보로 여길 거예요. 대대로 물려주면서….”
“이렇게 나풀나풀한 건 네 딸까지도 못 물려질 게다, 이본느. 너나 열심히 걸치거라. 그러면 이따 보자.”
이본느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그렁그렁한 표정인 것과 달리,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툴툴대었다.
비앙카는 말을 끝내자마자 방을 후다닥 나섰다. 모두가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순식간에 대기실의 분위기를 들었다 놓은 것이, 마치 태풍 같았다.
비앙카가 방을 나서기가 무섭게 대기실이 소란스러워졌다. 모두가 이본느를 부러워하는 소리가 대기실 밖까지 울려 퍼졌고, 당연지사 비앙카의 귀에도 들렸다. 비앙카의 귀가 시뻘게졌다.
대기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자카리는 비앙카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왔다. 그는 비앙카의 팔을 자신의 팔뚝 위에 얹으며, 나직한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그대가 노력한 만큼 좋아하는 것 같아 다행이로군.”
“그럼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짰는데요.”
비앙카는 벌게진 얼굴로 뿌듯하다는 듯 웃었다. 이본느의 앞에서 애써 태연했던 얼굴은 방 밖으로 나서기가 무섭게 사라진 뒤였다.
이본느에게 만큼은 꼭 깜짝 선물을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선물을 준비하는 과정은 평탄치 못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본느의 시선을 피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다.
이본느 몰래 조금씩 뜬다고 얼마나 노력했던가! 이본느가 결혼 준비를 한다며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틈틈이 떴지만….
끝물쯤에는 시간이 부족해서, 자카리와 같이 시간을 보내는 척 핑계를 대기까지 하며 이본느를 내보냈다. 그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비앙카는 목표를 달성했지만, 방치당한 원한에 자카리는 뚱해 있었다. 걱정되니 일찍 자라고 그렇게 애원해도 그놈의 레이스를 부득불 붙들고 있더니, 건네줄 게 이리도 신이 날까. 발그레하게 상기한 채 콧노래라도 부를 것처럼 기뻐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는 못내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지나가듯 툭 하니 중얼거렸다.
“가끔은 그대가 나보다도 더 이본느를 신경 쓰는 것 같아.”
“네?”
비앙카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리곤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비앙카의 작은 손이 자카리의 팔을 찰싹찰싹 내려쳤다.
“무슨 소리예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난 진지해.”
“당신은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하는 게 취미잖아요.”
“날 놀리는군.”
자카리의 입술이 꽉 다물린 채 입꼬리 끝만 들썩였다. 이제 비앙카는 자카리의 저런 표정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거나 다름없다는 걸 알았다.
자카리는 입씨름으로는 도저히 비앙카에게 당해낼 수 없다며 투덜거렸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가 팔을 위로 쭉 뻗어야 닿을 정도로 그의 키는 컸다.
이렇게 커다란 사람이 귀여워 보이는 걸 보면, 정말 눈에 콩깍지가 단단히 꼈구나.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손끝이 제법 매울 텐데도, 자카리는 묵묵히 그녀에게 고개를 내어주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뺨을 쭉 잡아당겼다가, 튕기듯 놓았다. 그러고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사르르 웃었다.
“당신이 사실은 이렇게 귀여운 사람이라는 걸, 나만 아는 게 너무 좋아요.”
* * *
악단이 연주하고, 사람들은 환호했다. 모두의 축복 속에서 가스파르와 이본느의 결혼식은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이본느가 활짝 미소 지은 채 주변을 향해 손을 흔들 정도로 여유로웠던 것과 달리, 가스파르는 결혼식 내내 눈에 띄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무뚝뚝하고 표정이 없어 철벽의 기사라 불리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안색은 하루 종일 시시각각 변했다.
결혼식의 주례가 끝나고 서약서까지 썼음에도 믿기지 않는지, 그는 옆에 있는 이본느의 손을 꽉 쥐어 보았다. 그리고는 기어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본 소뵈르는 마시던 와인을 뿜었고, 로베르는 얼굴을 구겼으며, 뱅상은 턱이 빠질 듯 입을 떡 벌렸다. 그만큼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결혼식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때, 상석에 앉아 있던 자카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같이 좋은 날, 상이 빠질 수 없지. 가스파르는 들으라.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를 성심껏 보필하였으며, 이번 전쟁에서 목숨을 걸고 내 아내와 아르노가의 후계자를 지켜낸 공을 인정하여, 내 그대에게 남작 위와 함께 영지를 내리도록 하겠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