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 신의 뜻(7)
프란시스의 답에 다른 추기경들도 동의했다. 그들은 다른 각도로 상황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아르노 공작의 생존이 신의 뜻이 아닌 것은 아닐까요? 아르노 공작이 무언가 달성해야 하는 위업이 있다거나….”
“그 또한 일리가 있습니다만….”
그때, 지금까지 추기경들이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교황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형제님들. 성인은 어디까지나 공작 부인, 비앙카입니다. 아르노 공작이 아닙니다.”
핵심을 짚어 내는 교황의 말에 추기경들은 그제야 불현듯 깨달음을 얻었다.
그래. 맞다. 신께서 미래를 바꿀 의지를 건넨 것은 자카리가 아니라 비앙카였다. 자카리의 강한 존재감에 매몰되어 다른 쪽으로는 생각도 못 했다.
신이 바라는 미래. 비앙카가 바라는 미래. 그것이 정말로 자카리가 죽지 않는 미래가 맞을까? 비앙카가 착각한 것은 아닐까?
애초에 신께서 바라시는 바가 자카리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래도, 성인께 남은 과업이 있는 것 같습니다….”
교황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추기경 회의실의 천장에 그려진 성화 속 신이 그들을 자비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교황은 다시 추기경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결정을 내린 듯, 그의 눈은 견고하게 빛났다.
“일단 성인께 계시에 대해서 말씀드려 보도록 합시다. 작은 기적이라 전쟁에 묻혀 별거 아니라 생각하고 넘어가신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추기경들을 모두 옳은 선택이라 입을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성인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는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선택지가 몇 없었다.
하지만 교황의 제안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덤덤한 낯으로 충격적인 제안을 던졌다.
“그리고 아르노 영지에 대주교급의 인사를 파견하지요. 이번 일도 어찌 보면 그분과 긴밀한 연락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니, 그분이 바로 교황청으로 연락할 수 있는 연락책이 필요해요.”
“대주교 말입니까? 하지만 대주교는….”
추기경의 희비가 교차했다. 추기경들에게 있어 교구는 일종의 땅따먹기였다. 모두 자신의 세력을 조금이라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런데 갑자기 대주교령이 하나 더 생긴다?
기득권을 갖고 있는 추기경들로서는 새로운 세력이 등장하게 되는 상황이 마냥 반갑지는 않을 것이다. 반면 비기득권인 추기경들에게는 이번이 기회일 것이다. 게다가 성인을 전담하게 되니, 다른 대주교구와는 그 이득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교황은 천연덕스럽기 그지없었다. 추기경들의 혼란 속에서,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히 대꾸했다.
“이제 아르노 영지도 공작령 아닙니까. 대주교가 파견되기엔 충분한 조건입니다. 게다가 성인께서 머무시는 영지이니까요.”
“만약 아르노 공작이 거부한다면 어떻게 할까요? 영지에 교황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성인과 관련된 일인 만큼, 아르노 공작도 저희의 제안을 마냥 거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희 쪽에서도 공작가의 체면을 생각하여 어느 정도 조율을 해야겠지요.”
교황이 그렇게까지 말하니, 추기경들로서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어떻게든 아르노 영지에 가는 대주교는 자신의 세력이어야 했다. 추기경들의 눈이 빛났다.
아직 신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신의 뜻에 도움이 될 기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 해야 자신의 사람을 천거할 수 있을까. 추기경들은 모두 머리를 굴렸다. 꿍꿍이로 가득 들어찬 머릿속은 성직자라기엔 지나치게 간교하였으나, 인자한 미소만큼은 성인이 따로 없었다.
교황은 그런 추기경들의 의욕을 보며 빙긋이 웃을 뿐이었다.
* * *
비앙카가 태교를 하며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던 와중, 교황청으로부터 서신이 날아왔다.
그러고 보니 프란시스가 추기경이 되었다 했지. 평범한 안부 인사인 줄 알았던 비앙카는 여상스레 서신을 잡아 들었다.
하지만 편지를 봉인한 인장은 교황의 직인이었다. 화들짝 놀란 비앙카가 인장을 두 번, 세 번 확인했지만 교황의 인장은 그대로였다.
비앙카는 조심스레 서신을 펼쳤다. 서신의 내용에 집중하는 비앙카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졌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곁에 앉았다. 비앙카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서신을 핑계 삼아 뱅상 대신 찾아온 참이었다. 비앙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자카리는 넌지시 물었다.
“뭐라고 쓰여 있소?”
“아르노 영지를 대주교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에요. 대주교를 파견한대요. 딱히 공물의 양이 달라지지도 않고, 영지에 간섭도 없는….”
“그렇다면야 쌍수 들고 환영이지.”
자카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주교구이면서 공물의 책임은 없다는 건, 아르노 영지에 있어서 무척이나 이득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표정은 쉽사리 풀어지지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서신이 뚫어질 정도로 그녀의 시선은 한데 못 박혀 있었으며, 서신을 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자카리는 서신의 내용이 비단 대주교구에 관한 것뿐만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다. 교황이 도대체 무어라 했기에….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조심스레 물었다.
“단지 그뿐인 표정이 아닌데, 비앙카. 그대의 심기를 거스르는 내용이 있소?”
“신의 뜻이 이루어지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당신이 살았으니, 혹시 무슨 기적이 일어난 것이 없냐고.”
비앙카는 더듬더듬 말했다. 그녀는 몹시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기적 같은 것은 본 적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번 전쟁에서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 정도가 기적이랄까….
자코브를 죽이고 전쟁에서 이겼으며 자카리는 살았다. 모든 것이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자카리 또한 상황을 이해했다. 그의 낯 또한 당황스러움으로 물들었다.
“기적은 없었지 않소.”
“네. 없었어요. 딱히, 아무것도….”
“그렇다면, 아직 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뜻이오?”
“어떻게 하죠?”
비앙카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임신한 뒤 억지로라도 챙겨 먹게 된 덕분에 혈색 있게 올라온 뺨이 차게 식었다. 비앙카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전전긍긍했다.
“만약, 당신에게 또 목숨의 위협이 생기는 거라면….”
비앙카의 머릿속에 온갖 불안한 상상이 떠올랐다. 태교를 하기 위해 긍정적인 생각만 하려고 노력했지만, 갑자기 왕에게 불려 갔을 때도 그렇고, 마음을 편히 갖는 것이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또다시 아라곤이 침략하는 걸까요? 아니면 내전이라도 벌어지는 건 아닐까요?”
“비앙카. 비앙카. 진정하시오.”
자카리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비앙카의 곁으로 다가갔다. 비앙카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턱이 덜덜 떨릴 정도로 겁에 질려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어깨를 끌어당겨 자신의 품 안에 안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비앙카의 어깨와 등을 연신 쓰다듬으며 그녀를 안정시키려 했다.
“그럴 리가. 걱정 마시오.”
“하지만….”
“내 그대가 아이를 낳기까지 영지를 한 발짝도 나서지 않겠소. 그러면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서임식을 비롯하여 급한 일은 대충 다 처리되었으니, 다른 자잘한 일들은 부장들을 보내서 처리하면 될 것이다.
변경의 침략 문제가 문제긴 하지만…. 계속되는 전쟁의 후유증으로 아라곤에서도 손해가 막심할 테고 그들과 내통한 자코브도 죽었다. 아라곤에서도 근 시일 내 선뜻 다시 군을 일으키지는 못할 것이다.
설령 그가 참여해야만 하는 큰일이 벌어진다 해도 영지를 떠나지 않겠다는 결심은 마찬가지였다.
이번에 비앙카만 두고 영지를 떠났다가 어떤 일이 벌어졌던가. 영지가 침략당하고, 임신한 비앙카가 위험천만한 상황 속에 그대로 내동댕이쳐졌다….
이번 전쟁으로 가슴 철렁한 것은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자카리는 단호한 어조로 비앙카를 설득했다.
“성인의 의무니 신의 계시니, 아이를 낳을 때까지만이라도 잠시 잊고 있으시오. 만약 지금 아이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그대 또한 큰일 나오. 나에겐 그것만큼 끔찍한 일이 없소.”
어떻게 다시 품에 안게 된 아내인데. 마음고생으로 몸이 상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전전긍긍하며 그녀를 위로했다. 거의 애원에 가까운 위로였다.
“곧 있으면 이본느의 결혼식 아니오. 경사롭고 좋은 일만 생각합시다. 응?”
“…좋아요. 약속 지켜야 해요.”
“나만 믿으시오. 나, 자카리 드 아르노. 한번 입에 올린 말은 꼭 지키는 사내 아니오.”
“그게 뭐예요.”
답지 않게 목소리 높여 호언장담하는 것이 어지간히도 마음이 급했구나 싶었다. 비앙카는 피식, 작게 웃었다.
자카리와 이야기하며 흥분도 많이 가라앉았고, 머리도 차분해졌다.
설마 신께서 자카리의 목숨을, 비앙카 홀로 지키기를 원하시는 건 아닐 테고 무언가 다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무엇인지 전혀 감도 못 잡겠지만.
이미 꿈속의 인생과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이대로만 가다 보면 신의 뜻에 다다르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단지 그게 언제인지 모르는 것일 뿐이다.
그때만을 목 빼어 기다리며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일희일비 심력을 소모하느니, 그냥 느긋하게 보내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예전보다 훨씬 여유로워진 비앙카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우리, 좋은 일만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