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 신의 뜻(5)
“그래…. 비앙카, 그녀의 믿음이라면.”
오델리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하늘이 그녀의 눈을 말갛게 메웠다. 오델리는 전쟁 중 그녀에게 날아왔던 비앙카의 서신을 떠올렸다.
그것이 오델리를 이 자리에 올려주었다.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코브는 숙청당하지 않았을 테고, 어쩌면 살아남은 그가 왕이 되었을 수도 있겠다. 세브랑을 장악한 그는 오델리를 쫓아냈겠지.
아니면 고티에 오라버니처럼 죽였을 수도 있고.
더 최악은 별 볼 일 없는 사내에게 물건처럼 팔려 가는 일이었다.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면, 오델리 그녀는….
오델리는 자신에게 기회가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더불어 그녀를 믿어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에 용기를 얻었다.
매번 그녀의 등을 떠밀어주는 비앙카에게 감사하며, 오델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창에서 시선을 뗀 채 자카리를 돌아보는 그녀의 푸른 눈동자에는 더 이상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 * *
공작이 된 자카리는 가신들과 함께 위풍당당히 영지로 돌아왔다. 아르노 백작령은 공작령이 되었고, 좀 더 넓은 땅과 광산을 하사받았다. 이제 전쟁을 나가지 않아도, 비앙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사 줄 수 있게 되었다.
뿐만이랴. 명실상부 세브랑의 최고 권력자가 된 자카리에게 축하와 뇌물이 쏟아졌다.
2왕자 파에 섰던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카리가 아라곤과 맞설 당시 지원 나오지 않은 이들 또한 자카리의 눈치를 보았다. 혹여나 자카리에게 보복이라도 당할까, 그들은 더욱 납작 엎드려서 어떻게 해서라도 자카리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다. 자카리가 안되면 비앙카에게라도.
영지로 온갖 사치품이 쏟아져 들어온 덕에, 신이 난 건 비앙카였다. 간만에 의욕이 넘쳤던 그녀는 로비에 궤짝을 일렬로 늘어놓고 그 사이를 거닐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 비앙카와 달리, 자카리는 비앙카의 옆에서 전전긍긍하며 발을 굴렀다. 자카리에겐 공작 위도, 주변의 칭송도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지금 그의 관심은 전부 비앙카에게 쏠려 있었다.
비앙카가 한 발짝 걸을 때마다 자카리는 심장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비앙카의 안색에 조금이라도 힘든 기색이 비치면 당장 그녀를 침실로 돌려보낼 생각이었건만, 비앙카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릴 정도로 신이 난 상태였다.
궤짝 속에 있는 커다란 흑진주에 정신이 팔린 비앙카가 슬쩍 허리를 기울였다. 그러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화들짝 놀라며 덥석 비앙카의 팔을 잡았다.
“비앙카, 조심하시오.”
“괜찮아요. 몸이 휘청인 것도 아니고, 그저 진주가 궁금했을 뿐인걸요.”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허리 숙여 궤짝 안의 진주함을 꺼냈다. 그는 비앙카의 앞으로 들이밀며 간청했다.
“관심이 가는 게 있으면 말하시오. 내가 꺼내 보여주리다. 아니. 차라리 그대는 앉아 있는 것이 어떻소? 궤짝을 하나하나 그대 앞에 보여주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소.”
“아주 안 움직이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운동하는 쪽이 낫다 그랬어요. 안 그래도 정원 산책은 밖이라 위험하다 한 게 누군데요. 이런 식으로라도 움직여야지요. 몸도 튼튼해지고, 마음도 평안해지고.”
자카리가 안절부절못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느긋하게 코앞의 진주를 확인하며 대꾸했다.
자카리의 우려를 비앙카가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자, 자카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앙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분명 틀리지는 않았는데…. 마음만 같아서는 비앙카를 아주 업고 다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뱅상과 이본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자카리가 저렇게 팔불출처럼 행동하는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지만, 볼 때마다 신기했다.
물론 그런 자카리의 심정이 어느 정도 이해 가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뱅상 또한 몇 날 며칠간 밤을 새 가며 비앙카의 건강을 진단하지 않았던가.
안 그래도 병약한 비앙카가 임신한 상태로 전쟁을 치렀으니 걱정이 안 되는 쪽이 이상하리라.
실제 비앙카는 용케 유산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위험한 상태였다. 유산하지 않은 것은 비앙카가 건강해서가 아니라, 아이의 생명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배 속에 있는 것이 아들이라면 희대의 기사가 될 거라 다들 입을 모았다.
그래도 자카리는 해도 너무했다. 이본느가 혀를 내두르며 두 사람 사이를 중재했다.
“마님 말씀이 맞아요, 공작님. 넘어지면 큰일 난다지만 조금은 움직여 주셔야 한다고요. 하지만 마님도 그렇게 허리를 숙이시면 안 돼요. 마님이 마르신 덕에 배가 덜 나와서 불편하지 않게 느껴지시는 것뿐이지, 충분히 조심하셔야 하는 시기라고요.”
“알았다, 알았어. 아주 기가 살아서 큰소리를 치는구나. 네가 결혼하고 임신했을 때 두고 보자.”
비앙카가 웃으며 농을 건넸다. 비앙카가 이본느의 목숨을 구해 준 것을 계기로, 그들은 그냥 시녀와 마님이라고는 정의 내릴 수 없는, 부쩍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이본느는 엄살을 떨며 대꾸했다.
“아이고. 마님이 으름장 놓은 걸 잊어버리시게, 아이는 최대한 늦게 갖는 쪽으로 계획을 잡아 봐야겠네요.”
“가스파르가 나에게 달려올지도 모르겠군.”
비앙카가 소리 내어 웃었다.
현재 아르노 영지는 자카리의 공작 서임과 비앙카의 임신과 더불어 이본느와 가스파르의 결혼식까지, 겹경사로 소란스러웠다.
원래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민들레가 피기 시작할 때쯤 결혼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전쟁으로 어수선해진 영지를 재건하는 것을 비롯한 많은 일들로 인해 시기를 맞출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비앙카가 해산을 한 뒤에 결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 늦다며 비앙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여름은 어떠하느냐 제안하니, 비앙카는 봄의 신부가 행복해진다는 속설을 들어 봄이 지나기 전에 결혼하도록 강경하게 밀어붙였다.
결국 이본느와 가스파르는 민들레가 질 때쯤 결혼하기로 결정했다. 최대한 당길 수 있는 만큼 당긴 시기였다.
곧 있으면 결혼하게 되는 새 신부였지만, 단지 결혼식 준비가 추가되었을 뿐 비앙카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본느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이본느 본인이 그러길 원했다. 자신이 비앙카에게 소홀한 사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면 견딜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비앙카의 임신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비앙카 본인이 심드렁한 것이 신기할 정도로. 실제로, 누구보다도 후계자를 원했던 이가 비앙카 아니었던가?
최근의 비앙카는 어딘지 모르게 초탈해 보였다. 성인이 되었다 하여 신실하고 경견한 신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실제로 비앙카는 방금 전만 하더라도 흑진주를 보며 활짝 웃지 않았던가. 성인다운 금욕과는 거리가 먼, 세속적인 모습에 이본느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싱숭생숭하신 것이겠지. 전쟁을 통해 마음고생도 많이 하셨고….
비앙카의 마음이 편하다면, 그것만으로도 되었다. 어차피 비앙카가 신경 쓰지 않더라도 주변 이들 모두가 그녀의 임신에 목을 매고 있으니까.
당시 아르노 영지를 지키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뒤늦게 비앙카의 임신을 알게 되었다. 남편인 자카리는 물론이거니와, 아버지인 귀스타브 또한 전쟁이 끝나고 영지로 돌아간 조아생의 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모두가 펄쩍 뛸 정도로 놀라 하며 기뻐했다. 블랑쉐포르 백작은 눈물이 그렁그렁하여 일평생 한 번도 흘린 적 없던 눈물을 줄줄 흘려냈으며, 오델리는 왕위를 잇느라 정신없는 와중에도 자카리를 통해 임신에 좋은 귀한 약재와 액운을 막아준다는 보석을 보냈다.
니콜라는 미래의 영주님이 누울 요람을 조각하는 데에 빠져 있었다. 그것이 어찌나 화려한지, 아이의 요람이 아니라 왕의 왕좌 같아 보일 정도로 웅장했다.
카트린은 아르노 영지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다. 그녀는 손수 수를 놓은 겉싸개를 선물하며 수줍게 얼굴을 붉혔다.
“비앙카의 실력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아니에요, 카트린. 정말 예뻐요. 색도 화사하고….”
“서둘러 수를 놓느라 잘 보면 엉성할 거예요. 너무 자세히 보지 마세요.”
“아녜요. 제가 온종일 수를 놓아도 이것보단 못할 거예요. 정말 대단해요.”
비앙카는 감탄하며 천을 매만졌다. 자수로 문양이 안 들어간 곳이 없는 것이, 품이 많이 들어 보였다. 게다가 들어간 색실이 어림잡아 봐도 다섯 개 이상이다.
감격한 비앙카가 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카트린의 얼굴이 붉은 머리색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달아올랐다. 카트린은 손끝을 꾸물꾸물 얽으며, 조용히 속삭이듯 덕담을 건넸다.
“분명 비앙카를 닮은, 예쁜 아기가 태어날 거예요.”
“남편을 닮을 수도 있어요.”
“공작님을 닮는 쪽도 좋을 것 같아요. 부러워라. 저도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하기는 하는데….”
카트린의 어깨가 축 처졌다. 카트린은 비앙카보다 결혼 연차는 부족해도, 합방 시기는 훨씬 이른 편이었다. 하물며 한 번도 피임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애가 들어섰어도 진즉 들어서야 했지만 하늘은 야속했다.
“남편은 후계자가 급하지 않으니 괜찮다고 하지만…. 후계자의 문제가 아닌 걸요. 저는 그냥 남편의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일 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