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신의 뜻(4)
“나는 오델리를 왕위에 올릴 생각이야.”
자카리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오델리가 왕이 되는 것도, 왕이 그 사실을 그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도.
남들이 보기엔 전심전력으로 나라를 지키며 항상 전쟁과 함께하는 자카리만큼 충성스러운 신하가 없었다. 그러나 왕은 자카리가 그렇게까지 세브랑 왕가에 충성을 바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왕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자카리 또한 알았다.
그러니만큼 그를 따로 불러 이런 중대 사항을 전하는 것이 얼떨떨했다. 그의 공작 위와 오델리의 왕위, 그것이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
“내가 그 애를 알아. 그 애는 결혼도, 자식에게도 관심이 없어. 그렇다 하여 그 애가 수도원에 가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아. 그 다른 누가 왕이 되더라도, 그 아이는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 거야….”
왕의 목소리가 먹먹히 잦아들었다. 본디 정통성을 따지자면, 차기 왕은 고티에 왕자의 아들인 알베르 왕세손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알베르 왕세손은 이제 막 열 살이 되었고, 그 결혼 상대는 카스티야의 공주다.
알베르의 어머니인 1왕자비는 성격이 유순하고 심약하기에, 섭정이 된다 하여도 주도권을 제대로 쥐지 못한 채 카스티야에 끌려갈 것이 우려되었다.
알베르가 왕위에 오르는 건, 스스로 카스티야와의 거리를 조절할 수 있을 정도의 나이가 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오델리는 아무도 챙겨 주는 이 없이 이리저리 치이게 될 게 분명했다. 남편이, 아버지가 없는 여자의 삶이란 으레 그런 것이니까…. 오델리가 권력을, 힘을 쥐지 않으면….
오델리는 똑똑한 아이였다. 다들 오델리가 사치스럽고 예쁘기만 하다고 알고 있지만, 그녀가 책을 얼마나 많이 읽는지, 공부를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왕은 알고 있었다.
오델리라면 세브랑을 충분히 지켜낼 수 있다. 적어도 고티에나 자코브보다는 훨씬, 더.
하지만 마냥 오델리에게 왕위를 넘겨준다 하여 불안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었다. 뜬금없는 여왕의 등장에 귀족들은 모두 반발할 것이다. 오델리에겐 방패가 필요했다.
“그대는 공작이 되어, 다음 대 여왕의 측근으로서, 내 딸의 신변을 보호해주게. 백작으로는 안 돼. 딸아이에겐 좀 더 강력한 지원이 필요해.”
왕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저 마음이 약해졌기에 충동적으로 생긴 변덕이 아니었다. 왕의 생각이 그렇게까지 확고하다는 사실에 자카리는 한참을 침묵하다 되물었다.
“…왜 하필 저입니까?”
“자네는 아직 젊으니 오래 버틸 수 있고, 주변 귀족들을 충분히 누를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하며, 그렇다 하여 권력욕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나. 설령 그대가 왕위를 욕심낸다 하여도 그대의 장인인 블랑쉐포르 백작이 그 꼴을 가만 보지는 않을 걸세.”
자카리가 공작 위에 올라야 하는 이유를 줄줄 말한 왕은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오델리에게 별 관심이 없지. 그 아이에겐 그런 이가 필요해.”
자카리는 침묵했다. 세브랑의 난다 긴다 하는 결혼 적령기 남자 귀족들 대부분은 오델리에게 구애해 본 전적이 있었다. 왕의 걱정이 기우가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이것이 최선이라고는 하나, 왕위는 마냥 사치스럽고 행복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던 부인을 똑 빼어 닮은 첫째 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그 아이에게 이런 가시밭길을 넘겨주는 것이 마음 아팠다.
현 왕비의 소생인 두 왕녀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델리를 왕위에 올리면 그녀들까지도 자연스레 오델리가 챙겨 줄 테니, 상대적으로 한시름 덜 수 있었다.
오델리에게 많은 책임을 떠넘기게 된 왕은 씁쓸히 웃었다.
“이건 내가 해야 해. 오델리가 막 왕이 되고 나서는, 자네를 공작 위에 올리고 싶어도 반대에 부딪혀 올리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늙어서 자식을 잃고 미친 왕의 고집이라면, 그 누구도 거부하지 못할 테지.”
왕은 자카리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살 거죽밖에 남지 않은 손으로, 그는 자카리의 단단하고 강인한 손등을 꽉 쥐었다.
“이건 내 마지막 임무야. 알겠나? 난 어떻게든 자네를 공작 위에 올릴 것이고, 그대에겐 거부권이 없네….”
한평생을 남에게 명령만 내리며 살아온 왕이었지만, 죽은 뒤의 일까지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입으로 내뱉는 말은 기필코 그리하겠다는 듯 강경했지만, 그의 희뿌연 눈동자는 처절할 정도로 애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 또한 숙연해졌다.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은 늙은 왕을 모욕 주는 것이었다. 결심한 자카리는 진중하게 왕을 바라보며, 처음 기사 서약을 했을 때처럼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꼭, 차기 왕을 전심전력으로 지키겠나이다.”
자카리의 결연한 맹세를 들은 왕이 활짝 웃었다. 주름진 입꼬리 가득 배어 있는 안도감. 이제 세상에 남은 미련이라곤 하나 없는 사람 같은 미소였다.
* * *
그렇게 자카리가 공작이 되고, 왕녀는 왕위 후계자가 되었다. 갑작스러운, 생각지도 못한 일에 오델리는 얼떨떨해했다.
왕이 살아 있는 동안 왕위 계승을 위한 준비를 부랴부랴 마쳐야 했기에, 오델리는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냈다.
오델리를 차기 왕으로 세울 거라는 말에 신료들은 반발했다. 왕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마땅한 후계가 없는 것은 그들 또한 동의했다.
알베르를 지지하는 귀족이 강경하게 밀고 나가야 했는데, 그것이 블랑쉐포르가인 만큼 마땅한 협력을 구하는 것은 힘들었다.
결국 귀족들은 오델리를 받아들였다. 대신 노선을 바꾸어, 미혼인 귀족 자제를 오델리와 결혼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 대공이 되어 오델리를 꼭두각시 삼아 세브랑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내들의 속셈에 휘둘릴 오델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알베르를 양자 삼아 후계자로 내세웠다.
그리고 알베르의 어머니인 1왕자비 또한 여전히 성에 머물게 하여, 알베르를 교육하고 오델리가 미처 신경 쓰지 못할 내궁의 일을 맡겼다.
그에 반발하는 이는 아직 왕위에 머물러 있는 왕이 강제로 억제시켰고, 이제 공작이 된 자카리 또한 오델리의 편을 들어주었다.
자카리가 공작 위를 서임 받은 것은 아주 속전속결이었다. 왕이 공작 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서임식의 날짜를 잡았고, 자카리 또한 부랴부랴 아르노 영지로 전령을 보냈다.
자카리가 공작 위에 서임된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그의 세 부장이 라호즈로 날아왔다.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한가득 넘쳐흘렀다.
비앙카 또한 자카리의 서임식에 참석하고 싶었으나, 임신 때문에 요양해야 하는지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대신 사랑이 가득 담긴 서신으로 자카리를 축복했다.
그리고 오델리의 왕위 계승 또한 기쁜 일이었다. 비앙카는 친구로서, 그리고 자코브의 일로 인한 동맹자로서 오델리를 축하하는 서신을 함께 동봉했다.
그 서신을 건네주기 위해, 자카리가 오델리를 찾아갔다. 일을 어느 정도 해결하고 한숨 내돌리고 있던 오델리가 자카리를 반겼다.
자카리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든 오델리는 한참 동안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서신을 정독한 그녀는 서신이 구겨지지 않게 도로 잘 접었다. 그녀의 잘 다듬어진 손끝이 양피지 끝을 슬슬 매만졌다.
침묵하던 오델리가 넌지시 운을 떼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라호즈에 오래 머물려니 좌불안석이겠군. 자네도 이제 영지로 돌아가야지, 아르노 공작.”
“예. 안 그래도 며칠 뒤 떠날 계획입니다.”
“내가 임신에 좋은 것들을 좀 챙겼으니, 공작 부인에게 전해 주도록 하게.”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하.”
오델리의 앞에 서 있던 자카리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예전 고티에를 대할 때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정중한 태도였다.
오델리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서신을 무릎 위에 내려 두었다. 서신은 고작 종이가 겹쳐 있을 뿐이었지만, 그보다 더 무거울 수가 없었다. 오델리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는 여전히 부왕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네. 나에게 있는 것은 오로지 혈통뿐이고, 그 혈통마저 이을 생각이 없거늘.”
“저하께는 혈통마저 있으신 것이겠지요. 전하의 결정에는 저 또한 동의합니다. 저하께서는 능히 성군이 되실 수 있습니다.”
자카리가 대꾸했다. 자카리의 말은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그득 차 있었다.
하지만 자카리와 오델리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믿음과 신뢰로 가득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들이 대면하여 말이라도 섞어 본 것은 왕의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있고 나서부터였으니까.
자카리의 신뢰가 의아했던 오델리는 고운 눈썹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그건 공작의 생각인가?”
“아뇨. 제 아내의 생각입니다.”
자카리는 무표정으로, 천연덕스레 답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는 빤한 눈동자가 진심이라는 걸 역력히 드러내고 있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여름에 내리는 서리를 모아 오라고 해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이었다.
비앙카가 오델리를 믿었기에, 아버지인 블랑쉐포르 백작이 아닌 그녀에게 자코브의 약점을 잡아 달라 부탁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델리는 기대대로 비앙카의 부탁을 완벽하게 들어주었다.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보낸 서신에는 오델리라면 성군이 될 것이라 쓰여 있었다. 그렇다면 자카리 또한, 그렇게 될 것이라 믿는 게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