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81화 (181/192)

#181 신의 뜻(2)

“아라곤과 협력하여 세브랑의 주요 정보를 팔고 그들의 침략을 도운 죄.”

고티에의 암살이 들켰을 때도 흔들리지 않았던 자코브의 얼굴이 그제야 경악으로 물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바람 빠지는 듯한 쇳소리로 중얼거리는 그의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카리가 받은 오델리 왕녀의 전서에는 자코브가 지금껏 저지른 일에 대한 증거가 구구절절 적혀 있었다. 오델리 왕녀는 비앙카의 전서를 받기가 무섭게 자코브의 숙소를 비롯하여 세브랑 성 내를 탈탈 털었다.

그녀는 자코브가 알베르 왕세손을 암살하려 세워 둔 암살자를 발견하여 증언을 받아내었으며, 기어코 아라곤과의 협력 관계에 대한 밀서까지도 발견해냈다. 비앙카가 구체적으로 자코브의 행적에 대해 알려준 덕분에 찾는 범위를 좁힐 수 있었던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증거로 들이밀며 왕을 설득했다.

자코브의 친족 살해에 왕 또한 충격을 받았다. 안 그래도 고티에의 죽음 이후로 쇠약해진 왕은 자리에 드러누운 뒤 도통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 남은 아들이 아니던가. 처음에는 적당히 유배를 보내는 정도에서 마무리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아라곤과 협력은 친족 살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대한 일이었다. 왕은 결국 자코브를 왕적에서 박탈한다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등의 이유로 인하여, 빅토르 드 세브랑의 대리인, 오델리 드 세브랑이 해당 죄인의 죄를 인정하고, 그에게서 왕족의 지위를 박탈하겠노라.”

“말도 안 돼! 그건 날조된 서류다…!”

자코브가 바락 외쳤다. 전서 속 내용은 그를 지옥으로 밀어 넣기 충분했다.

왕족의 지위를 박탈당하면 자코브는 그저 귀족, 아니, 영지와 작위가 없으니 일반 기사나 다름없었다. 그렇다면 아르노 영지를 침략한 것 또한 귀족법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영지가 있고 보석금을 준비해 줄 수 있는 상황이라면 해당 영지와 협상을 하는 것이 관례이나, 상황에 따라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기도 했다. 하물며 자코브는 영지가 없으니, 그의 처분은 온전히 자카리와 비앙카의 손에 달리게 되었다.

“왕의 직인이 찍혀져 있소. 당신이야말로 왕을 의심함으로써 왕의 명예를 능멸하는 것이오?”

“오델리가 왕의 대리인이라고? 그 계집애가? 여자가 무슨 일을 한단 말인가!”

자코브는 믿을 수가 없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해당 전서가 그의 아버지이자 세브랑의 왕인 빅토르 드 세브랑이 아닌, 그의 누이 오델리에 의해 작성된 것이 그러했다.

자코브의 얼굴이 좌절로 무너져 내렸다. 고작 그런 계집애 때문에, 내가….

자카리는 물끄러미 자코브를 바라보았다. 마치 벌레의 찌르륵 소리에 누가 신경이라도 쓰겠느냐는 듯한 건조한 눈빛. 자코브의 주장을 의미 없는, 쓸모없는 저항일 뿐이라 치부해 넘기는 것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아무리 자코브가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오델리가 대리인이라는 건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왕이 허락하였으며, 혈통상으로도 적법했다.

더군다나 오델리를 반대할 만한 2왕자파의 귀족들 모두가 이번 전쟁에 나왔다. 그 덕에 큰 소란 없이 오델리는 대리자가 될 수 있었으니, 어찌 보면 이번 일은 자코브의 덕이라 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자코브의 실책은 바로, 오델리를 우습게 본 것이었다.

어린 알베르에게는 암살자를 붙였으면서, 오델리에 대해 견제조차 하지 않았으니 그리도 쉽게 성을 비운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저 여자라고, 왕의 돈으로 사치만을 즐기는 철없는 왕녀라고 생각한 것이 그에게 비수가 되어 돌아왔다.

자코브가 현실을 부정하고 있던 찰나, 비앙카가 나서며 말했다.

“당신은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어요, 왕자. 아니, 자코브.”

“비앙카.”

자코브의 얼굴에 돌연 화색이 돌았다. 아까 전 절망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그는 비앙카를 향해 사르르 눈을 휘어 웃었다.

비앙카의 뒤에 서 있던 자카리의 몸이 뻣뻣이 굳으며 표정에 여유가 싹 사라졌다. 아까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노골적인 불쾌감. 자카리의 손가락이 금방이라도 비앙카를 제 뒤에 숨길 듯 움찔거렸다.

비앙카는 두 남자의 신경전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는 무표정으로 자코브를 비난했다.

“당신은 형제를 죽인 패륜에, 나라마저 팔아먹은 매국노가 아닙니까?”

“그대는 왜 그렇게 나에게 매정한가? 나는 그대에게 많은 걸 줄 수 있었어. 아르노 백작이 주는 것보다 더한 명예, 사치, 권력! 그리고 사랑까지도.”

자코브의 외침에 영지민들이 수군거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비앙카에게 치근대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그들이 보기에도 자코브는 단단히 돌아 있었다.

비앙카는 얼굴을 찡그리며 질색했다. 그녀의 연록빛 눈동자가 경멸로 물들었다.

“당신은 여전히 오만하군요. 제가 그걸 원한 적이라도 있단 말입니까? 그저 당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제시하는 화대가 아닙니까?”

“그게 아니야. 나는….”

“당신이 라호즈 성의 정원에서 저에게 치근댔을 때.”

화대라는 말에 당황한 자코브가 변명하려 했으나 비앙카는 그 말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자코브의 말을 딱 잘라 낸 비앙카는 단호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그때 다짐한 게 있어요.”

“비앙카.”

“기필코 당신만큼은 죽여 버리겠다고.”

“믿어줘. 난 그대를 사랑해.”

비앙카의 적개심에도 자코브는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사랑한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비앙카를 바라보는 자코브의 푸르른 눈동자는 햇살에 반짝이는 호수 표면처럼 빛났다. 영지를 침략한 자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가슴 설렐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달콤한 시선이었다.

“당신의 사랑은 자신만을 위한 사랑이지요. 그것은 저에게 필요 없는 사랑이로군요.”

하지만 비앙카에게는 지긋지긋할 뿐이었다. 정말 끔찍한 사내다. 이미 비앙카의 마음은 단단히 굳은 암석과도 같았다.

“잘 가요, 자코브.”

“비앙카! 비앙카!!”

비앙카가 그리 말하며 뒤돌아섰다. 자코브는 비앙카의 등에 대고 거듭해서 그녀를 부르짖었지만, 비앙카가 돌아보는 일은 없었다. 멀어져 가는 비앙카의 등은 자코브에게 더 이상의 분노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냉정했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에스코트해서 단상을 내려왔다. 그들이 물러서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이 자코브의 목을 잡아 눌렀다.

자코브가 이리저리 몸을 들썩이며 저항했지만, 온몸을 단단히 감은 밧줄과 내리누르는 병사들의 힘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단상에서 내려간 비앙카가 영지민들을 보며 날카롭게 외쳤다.

“아르노에서는 영지를 침략하고 성인을 위협한 매국노 자코브에게 참수형을 내린다!”

“와아아아아!!”

영지민들의 함성이 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본디라면 자카리가 자코브의 처우에 대해 전하는 것이 옳았으나, 이번은 예외였다.

전쟁을 끝낸 것이 자카리이기는 하지만, 비앙카가 버텨주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승리였다. 실질적으로 따지면 비앙카가 칼자루를 잡는 것이 맞았다.

영지민들 또한 비앙카가 자카리를 대신하여 앞에 나선 것을 일말의 저항감 없이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이제 비앙카는 믿고 따라야 할 마님이었다.

함성 속에서, 가스파르가 도끼를 잡은 채 나섰다.

본디라면 사형 집행자가 도끼를 잡았겠지만, 그래도 한때 왕자였던 것을 참작하여 기사인 가스파르가 대신 나섰다.

가스파르는 전쟁에서 부상당한 한쪽 팔이 아직 낫지 않은 상태였다.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일이다. 로베르가 걱정스레 물었다.

“내가 대신할까?”

“아니.”

가스파르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겐, 아직 남은 숙원이 있었다. 가스파르의 굵은 손이 단단히 도끼를 잡았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비앙카는 자연스레 그의 팔뚝에 머리를 기댔다.

참수라는 것이 보기 좋은 꼴은 아니다. 더군다나 비앙카는 임신 중이 아니던가. 혹여나 하는 걱정에 자카리가 우려의 기색을 내비쳤다.

“보지 마시오.”

“볼 거예요.”

하지만 비앙카는 고집스러웠다. 그녀는 눈을 부릅뜬 채 자코브를 바라보았다.

자코브와 비앙카의 눈이 마주쳤다. 자코브는 꿇려진 채 참수대에 목을 내놓고 있는 상태에서도 비앙카를 응시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비앙카 또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자코브의 죽음을 자카리에게 간청했을 당시에는 비앙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더 이상 자카리의 보호 속의, 새장 속 작은 새가 아니었다.

그녀는 케케묵은 원한을 씹어뱉듯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말했다.

“최후를, 똑똑히. 그래야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앙카의 오기 어린 중얼거림은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자카리는 그녀를 만류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강경한 눈빛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준비가 끝나고, 시간이 되었다. 비앙카가 손을 들었다. 그에 따라 가스파르의 도끼가 하늘 위로 번쩍 치켜 들렸다. 햇빛을 받아 번쩍이는 도끼의 시퍼런 날이 유난히도 날카로워 보였다.

그러는 와중에도 자코브는 눈을 부릅뜨고 비앙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비앙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눈에 담으려는 듯. 하지만 그의 눈에 담긴 비앙카는 싸늘할 뿐이었다.

자코브는 억울했다. 세상은 너무나 그에게 불공평했다. 신도 너무하시지. 그가 갖지 못할 것이라면, 애초에 눈에 띄게 하지도 마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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