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실패한 결혼장사(9) / 신의 뜻(1)
“그날, 아이가 생겼어요.”
“아이….”
자카리는 여전히 현실을 인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날이라면, 자카리가 출전하기 직전의 밤이 분명했다. 피임하지 않은 유일한 밤이었으니까.
애초에 비앙카가 그리도 임신하기를 원하니, 그녀의 기분이라도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막상 임신한 걸 보니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여전히 비앙카는 작고, 어렸고…. 뒤늦게 자신이 성급한 결정을 한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그를 뒤흔들었다.
물론 비앙카의 고집이 강경하여, 또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자카리가 어쩔 수는 없었겠지만….
반면 비앙카와 자신의 아이라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아들일까, 딸일까. 비앙카를 닮았으면 좋을 텐데….
기대가 되기도 하고, 비앙카의 몸이 걱정되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혼란스럽던 와중, 자카리는 비앙카의 뒤로 얌전히 어슬렁거리는 크림색 말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아까 비앙카가 말을 타고 달려오던 불안불안한 모습 또한 연달아 떠올랐다. 얼굴이 시퍼렇게 질린 자카리는 기겁을 하며 외쳤다.
“아니, 그러면 임신하고 말도 탄 것이오? 잘못되면 어쩌려고!”
“전쟁도 견딘 아이인걸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비앙카는 태연했다. 진심으로 괜찮다고 믿고 있는지, 목을 빼고 천연덕스레 대꾸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때, 저 멀찍이서 한 박자 늦게 달려오는 뱅상과 가스파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노고를 위로하는 것도 위로하는 것이지만, 지금은 눈앞의 상황에 눈이 돌아간 뒤였다. 자카리는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버럭 외쳤다.
“내가 안 괜찮소. 뱅상, 뱅상!! 어째서 마님이 말을 타게 내버려 두었느냐!”
자카리의 타박에, 애꿎은 뱅상의 얼굴이 울 듯 웃을 듯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그가 말리기도 전에 비앙카가 냉큼 말 고삐를 잡고 뛰쳐나갔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말을 가져오라, 안장을 채워라, 잔뜩 느긋하게 남들을 부려 먹으시더니, 이럴 땐 또 눈 깜짝하기가 무섭게 재빠르다.
한참을 씨근덕거리며 마음을 다스린 자카리는 비앙카를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고맙소.”
딱딱한 말투와 달리 비앙카에게로 향하는 그의 눈빛과 손길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자카리는 조심스레 앞으로 흘러내린 비앙카의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겼다. 그의 손끝이 비앙카의 뺨을 스치듯 매만졌다. 새끼 고양이의 털을 손바닥으로 굴리듯, 그의 손짓 하나하나에선 조심성이 묻어났다.
“죽지 않고 살아줘서. 나를 기다려줘서.”
“저야말로 고마워요.”
비앙카가 자카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갑옷을 차려입은 단단한 허리는 비앙카의 팔이 감기지 않을 만큼 두꺼웠다.
자카리의 서코트 위에 걸친 검은 망토가 비앙카의 몸을 휘어 감쌌다. 세상의 모든 풍파를 걷어내듯이.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에 고개를 기울여 기대며 속삭였다.
“죽지 않고 살아줘서. 나에게로 돌아와 줘서.”
두 사람의 뒤로 먹구름이 흩어지고, 태양이 평야를 비췄다. 눈이 차츰차츰 녹아내리며, 드러난 땅을 비집고 새싹이 싹을 틔웠다. 길고 긴 겨울이 끝나고 드디어 봄이 도래했다.
유난히도 길고 험난했던 겨울의 종식이었다.
* * *
하나, 둘. 가신들이 떨어져 나갔지만, 자코브는 계속해서 달렸다. 뒤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그는 치욕스러움에 이를 악물었다. 그가 언제 이렇게 쫓겨 본 적이 있던가?
그는 언제나 쫓는 쪽이었다. 왕좌도, 비앙카도…. 얻기 위해 달려드는 쪽이었던 그가 일순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진 채 패배자가 되어 도망치기만 하고 있으니 그 속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자코브를 앞질러 온 아르노군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자코브가 바로 말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그쪽 또한 이미 가로막혀 있었다. 그들은 서서히 자코브를 포위하며 다가왔다.
“큿!”
“도망은 이제 끝났습니다, 왕자님.”
병사들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자카리의 삼익 중 하나인 소뵈르였다.
평민 출신에 그다지 눈에 띄는 무용도 없는 자. 토너먼트에서도 별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 자코브가 저런 놈에게 쫓기는 신세가 될 줄이야. 굴욕적이기 그지없었다.
자코브는 도망칠 구석을 찾아 눈을 굴렸지만, 아르노군은 그를 단단히 봉쇄하고 있었다.
소뵈르는 넉살 좋게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왕자님께서 전쟁에 몇 번 나가 본 적 있으시다고는 하지만, 저는 반평생 전쟁터를 전전했습니다. 도망치는 군사를 쫓는 것은 일도 아니지요. 왕자님이라 하여 그다지 창의적으로 달아나시는 건 아니니까요.”
“…나는 어차피 왕가의 혈통. 네가 여기서 날 잡아간다 하여도 아르노 백작은 날 놓아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된다면 내 이 수모를 잊지 않을 것이다. 반면 날 놓아준다면, 내 나중에 크게 사례하마. 작위와 영토를 주겠어.”
자코브는 되레 뻣뻣이 고개를 치켜들며 허세 어린 협박을 건넸다. 뻔뻔한 그의 낯과 달리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자코브 또한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먹힐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은 자코브가 제시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였다.
“글쎄요…. 저는 평민 출신이라 그런지, 머리가 좀 나빠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네요.”
소뵈르는 평소와 같은 경박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비아냥대는 것이 노골적일 정도라서 자코브는 잇새를 악물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뵈르는 방심하지 않은 채 바로 병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주인이 쏘아 올린 화살에 맞은 토끼를 제대로 물어 가는 것이 사냥개의 역할 아니겠는가. 토끼로 가장한 독사의 간청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
매가 발톱으로 움켜쥔 먹이를 놓지 않듯이, 소뵈르는 자코브를 철저히 사로잡았다.
* * *
자코브가 끌려온 곳은 아르노 성의 한가운데 있는 널찍한 공터 위에 세워진 단상이었다. 갑옷이 벗겨진 채 밧줄로 꽁꽁 묶인 그는 누가 보아도 포로의 꼴이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왕족으로서, 이런 곳에 굴하지 않으리라는 기개. 하지만 병사 둘이 강제로 꿇어앉히니, 어찌 반항할 도리가 없었다.
헝클어진 황금빛 머리칼이 그의 얼굴 위로 쏟아져 내리듯 흘러내렸다. 아직도 포기하지 않은 푸르른 눈동자가 반짝이는 호수의 조약돌처럼 빛났다. 전쟁을 하며 고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감출 수 없는 미모였지만, 아르노 영지의 영지민들에게는 그저 염치 모르고 명예를 모르는 왕자일 뿐이었다.
몰려든 영지민들은 다들 수군수군 욕설을 뇌까리며 자코브를 손가락질했다. 성난 군중 속에서, 자코브는 구경거리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주저하더니, 돌연 누군가가 자코브에게 돌을 던졌다. 돌은 자코브의 머리에 맞고, 그의 금발에 선연한 붉은 피가 흘렀다. 누군가가 물꼬를 튼 뒤는 쉬웠다. 다들 하나, 둘,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자코브에게 던졌다.
자코브는 그 와중에도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낯이었다. 되레 너무 조용하니 소름이 끼쳤다. 사람들은 술렁이며, 저도 모르게 자코브를 향해 휘두르려던 돌을 조용히 내렸다.
그러던 와중, 웅성거리며 군중이 갈라졌다. 등장한 것은 바로 자카리와 비앙카였다. 자카리가 비앙카를 에스코트하며 걸어오는 모습은 마치 추종자가 여신을 숭배하는 것 같았다.
자코브 앞에 비앙카와 자카리가 섰다. 그제야 자코브의 눈에 감정이 서렸다. 자코브는 굴욕과 갈망, 분노가 가득한 시선으로 비앙카와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그는 비아냥거리듯 이죽였다.
“너희는 날 죽일 수 없어. 세브랑 왕가에 한 충성 맹세를 잊은 건 아니겠지?”
“가신의 성에 칼을 들이민 왕에게 충성을 지킬 가신이 얼마나 있겠는가?”
자카리가 차갑게 되물었다. 지금껏 왕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억지 존대를 해주었지만, 이제 더 이상의 존대는 없었다. 자카리의 검은 눈동자는 불씨가 잠들어 있는 숯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자네가 왕족이라 귀족의 영지 내에서 처벌 불가능함은 나 또한 익히 알고 있고, 내 사랑스러운 아내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네.”
갑자기 비앙카의 이야기가 왜 나왔는지 이해하지 못한 자코브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카리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설마 그대가 영지를 침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아내가 승리의 이 순간을 위해 아무런 대책도 세워 두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자카리는 비앙카의 선견지명을 자랑하듯 거들먹거리며, 전서를 펼쳐 들었다. 오델리 왕녀가 보낸 전서였다.
자카리의 옆에서 비앙카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왕녀의 전령이 언제쯤 오나 목을 빼고 기다렸는데, 자카리가 귀환하는 길에 마주쳤을 줄이야. 시기를 맞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자카리가 목소리를 높여 전서의 내용을 읽었다.
“자코브 드 세브랑. 왕자로서의 명예를 잊고 유부녀인 아르노 백작 부인을 취하기 위해 아르노 영지를 침략한 죄, 성인인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은 죄.”
자코브의 얼굴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그 정도로는 아직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낯이었다. 하지만 전서의 내용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왕위 후계자이자 형이었던 고티에 왕자를 암살한 죄, 그리고 조카인 알베르 왕세손의 암살을 사주한 죄.”
영지민들의 웅성거림이 커졌다. 고티에 왕자의 죽음은 이미 소문이 퍼진 상태였다. 그것이 바로 자코브의 사주였다니….
한낱 귀족 집안의 후계 문제도 왕왕 칼부림이 나곤 했다. 왕위 다툼 또한 치열하니 자코브가 그런 수를 쓴 게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실제로 자신들의 왕가에 그런 암투가 있었다 하니 경악스럽기 그지없었다.
자카리의 목소리는 고저가 없었다. 그는 담담하게 전서를 읽어 내려갔다.
“아라곤과 협력하여 세브랑의 주요 정보를 팔고 그들의 침략을 도운 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