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 실패한 결혼장사(8)
그 꼴을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자코브는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렇게 자코브가 전전긍긍하며 머뭇거리자, 주변에서 가신들이 그를 잡아끌었다.
“왕자님! 퇴각하셔야 합니다! 이대로 전선을 유지하면 전멸일지도 모릅니다!”
“전멸이라니! 군사 수의 차이가 있는데, 이렇게 쉽게…!”
“이미 저희는 많은 군을 소비했습니다. 상대는 아르노 경이고요. 게다가 영주인 그가 멀쩡히 살아 있는 이상, 백작 부인을 데려오게 되더라도 명분을 갖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젠장….”
자코브는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믿기 힘들지라도,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자카리가 등장했다는 이야기가 퍼지기가 무섭게 그들의 사기는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자코브는 속이 뒤집힐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거의 다 되었는데. 저자가 조금만 늦게 왔으면, 비앙카가 나의 것이 되었을 텐데….
“젠장!!”
자코브는 이를 악다물었다. 하지만 가신들의 말대로였다. 지금은 도망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퇴각! 퇴각이다!”
자코브가 말에 훌쩍 올라타며 박차를 가했다. 백마가 목을 쭉 빼고 투레질하더니, 냉큼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자코브의 뒤를 쫓아 다른 이들도 퇴각하기 시작했다.
자코브는 말을 몰아 도망치며, 자카리가 있는 곳을 노려보았다.
그의 군사를 유린하는 자카리의 위로 태양 빛이 내리쬐었다. 은빛 갑옷이 햇빛을 받으며 눈부시게 빛나는 모습은 성화 속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장엄하기 그지없었다.
그에 비해 자코브는 패배한 개처럼, 꼬리를 말고 도망칠 뿐이었다. 얻은 것 하나 없이. 무엇부터 잘못되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자코브는 패전의 원인을 알기 위해 몇 번이고 과거를 곱씹었다. 하지만 그는 비앙카를 얻기 위한 자신의 어긋난 바람이 문제였다고는 한 톨도 생각하지 않았다.
“2왕자가 도망친다! 소뵈르! 2왕자를 잡아라!”
자코브의 도주를 눈치챈 자카리가 외쳤다. 자카리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소뵈르는 히죽 웃으며 말을 몰았다. 허허실실 방정맞지만, 전쟁에서는 누구보다도 집요한 사내였다. 그는 마치 토끼를 뒤쫓는 사냥개 무리처럼, 군사들을 몰아 자코브의 뒤를 따라붙었다.
아르노 영지의 평야를 까맣게 메웠던 적군들이 물러나고, 남은 것은 시체와 적막, 포로, 그리고 대지에 당당히 선 아르노군뿐이었다.
로베르는 자코브의 뒤를 따르지 못한 채 남겨진 포로들을 모았다. 줄줄이 밧줄에 묶여 가는 이들은 자신의 참담한 미래를 떠올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전쟁은 준비하는 것만큼이나 마무리 또한 중요했다.
헤집어진 땅을 정돈하고 무너진 가옥을 올려 세우는 등 내실을 다져야 했다. 그나마 전쟁이 일어난 것이 겨우내여서, 내년 농사에 큰 지장이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밖으로는 자코브의 편에 참전한 귀족들에 대한 처우를 비롯해 자코브, 본인에 대한 판결도 현명하게 내려야만 했다. 왕실이 얽힌 일인 만큼, 흠 잡힐 것 없이 매끄러이 처리하는 게 중요했다.
일단은 자코브를 사로잡는 것이 문제지만…. 소뵈르는 지금껏 한 번도 목표를 놓친 적이 없는 이이니,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문제점이 많았지만, 지금 자카리의 머릿속을 메운 것은 바로 비앙카였다. 자카리의 흑마가 저벅, 저벅. 전장을 가로질러 성으로 향했다.
도개교가 내려오고, 한 달 반 동안 굳건히 닫혀 있던 성문이 영주를 맞이하기 위해 활짝 열렸다.
그리고 한 사람이 성문을 가로질러 말을 몰고 자카리를 향해 달려왔다.
허공에 펄럭이는 녹색 천 자락이 유난히도 선명했다. 녹색 직물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귀하게 여겨지는 것이었고, 아르노 영지에서 녹색 옷을 입는 것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상대를 깨달은 자카리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비앙카!”
“자카리!”
자카리가 입성하기까지 기다리지 못한 비앙카가 냉큼 말을 타고 달려오던 중이었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선물해 주었던 크림색 팔로미노. 작년 겨울 이후로 승마 연습을 소홀히 한 탓인지, 달려오는 비앙카의 모습이 불안불안했다.
어떻게 멈춰야 하는지 몰라 당황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자카리가 냉큼 달려갔다. 비앙카에게 도착한 그는 비앙카의 고삐를 대신 쥐고 말을 진정시켰다. 순한 말인지라 그리 애를 먹이지 않았다.
말에서 내린 자카리가 안장에 앉아 있는 비앙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앙카의 작은 손이 자카리의 손 위에 얹어지고, 그의 단단한 팔에 안긴 비앙카의 몸이 깃털처럼 땅에 내려왔다.
비앙카와 자카리의 시선이 얽혔다. 3개월 만에 재회였다.
두 사람은 침묵한 채 하염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작 3개월이었지만, 그사이에 겪은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을 글썽인 것과 달리, 비앙카를 바라보는 자카리의 눈동자는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건조하다고 생각했던 눈동자는 사실 저 먼 사막에 작열하는 태양처럼 이글거렸다. 모든 것을 불태우다 못해 자신의 감정마저도 태워 잠식한 듯한 열기가 비앙카를 향해 내리쬐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피부의 솜털 하나까지도 눈에 담을 듯 그녀를 살폈다. 하지만 살피면 살필수록, 그의 억장이 무너져 내릴 뿐이었다.
항상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던 머리끝은 엉키고 그을려 있으며, 흰 뺨은 흙먼지가 묻어 있었고, 보드라웠던 입술은 잔뜩 갈라져 있었다.
누가 보아도 가만히 방 안에 있지 않은 꼴이었다.
전쟁이 일어나기는 했어도, 비앙카가 전선에 나왔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던 자카리의 말문이 턱 하니 막혔다.
누구보다도 귀할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
자카리는 사색이 되어 물었다.
“그 꼴이 무엇이오. 설마, 그대가 직접 전쟁에 선 것이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떻게…? 당신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들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수작이었소.”
자카리는 침중한 신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자신의 선택이 비앙카를 고생하게 했다는 괴로움과 비앙카가 위험했던 순간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그를 괴롭혔다. 비앙카를 바라보는 마음이 찢어질 듯 아려 왔다.
그와 동시에 비앙카가 영지를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지키려 노력한 것에 감동하였다. 영주의 대리인으로서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녀는 영지를 잘 지켜내 주었다.
“그런 수작을 부리려면…. 미리 알려주란 말이에요! 정말…. 정말…!”
비앙카의 목소리 끝이 떨리며 울음에 잠식되었다. 아까부터 그렁그렁하던 눈물은 기어코 차올라 뺨을 타고 흘렀다.
자카리가 원망스러웠던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을 떠밀듯 밀어내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가는 팔뚝에 산처럼 우뚝 선 자카리가 꿈쩍할 리 없었다. 평소의 자카리였다면 순순히 그녀의 손짓에 따라 멀어져 주었겠지만, 지금의 그는 반대로 비앙카를 와락 끌어안았다.
비앙카 또한 바르작거리며 더 이상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자카리의 품에 안긴 채, 그녀는 흐느껴 울었다.
“정말 죽은 줄 알았잖아요….”
“미안하오. 내 할 말이 없소.”
자카리가 거듭 사과했다. 비앙카는 빼꼼히 고개를 들어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비앙카가 전쟁을 치른 것은 한 달 반이지만, 자카리는 석 달 동안 전쟁터를 전전했다.
거칠해진 뺨과 헝클어진 머리칼. 피로한 눈매. 비앙카는 손을 뻗어 자카리의 뺨을 매만졌다. 손끝에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느낌이 안쓰러웠다.
당신도, 나도 힘들었구나. 하지만 이겨내서, 여기에 있구나….
그토록 처절했는데. 막상 전부 끝나고 나니 허심탄회한 기분이었다. 비앙카는 별거 아닌 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죽으려고 했어요.”
“뭐?”
자카리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그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게 분명하다 여겼다. 비앙카가 죽다니…. 자신이 전쟁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죽는다는 말에 익숙해진 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런 환청도 듣는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확인 사살하듯, 다시 한 번 쐐기를 박았다.
“당신이 죽어서…. 나도 죽으려고 했어요.”
“그러지 마시오.”
자카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비앙카의 자살이라니,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두려운 일이었다. 그는 절박한 낯으로 비앙카를 설득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생각 하지 마시오. 알겠소? 그대가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낮게 잠식된 목소리가 먹먹했다. 그는 비앙카에게 그러지 않겠다는 확답을 받아야지만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듯 재차 애원했다. 그만큼 그는 필사적이었다.
자카리가 초조해하는 것과 달리, 비앙카는 여유로웠다. 의뭉스러움을 부드러운 미소로 숨긴 그녀는 살풋 웃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절 죽지도 못하게 하더군요.”
“?”
“임신했어요.”
비앙카의 얼굴이 화사하게 피었다. 활짝 만개한 꽃처럼 웃는 그녀의 얼굴 어딘가에는 드디어 해냈다는, 승리감마저 도사리고 있었다.
반면 자카리는 청천벽력 같은 말에 멍하니 넋을 놓았다. 그에게는 너무 갑작스럽고 충격적인 일이었다.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자카리가 쉽사리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는 듯 보이자, 비앙카는 자카리의 이해를 도와주려는 듯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번복했다. 사실상 재촉에 가까웠다.
“그날, 아이가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