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77화 (177/192)

#177 실패한 결혼장사(6)

위그 자작은 자카리의 시체를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카리의 시체를 둘러싼 군사의 벽을 쉽사리 뚫을 수가 없었다. 이 기회에 저들을 완전히 밟아 없애고 싶었던 위그 자작은 총공격을 내렸다.

하지만 아르노군이 괜히 백전의 군사들이 아니었다. 자카리의 죽음이 그들의 사기를 꺾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았다. 그들은 있는 힘껏 저항하며 위그 자작의 군에 맞섰다.

아르노군을 쉽사리 제압할 수 없을 것 같자, 위그 자작의 얼굴이 못마땅함에 일그러졌다. 당장에라도 2왕자에게 달려가 백작 위를 받는 제 모습이 코앞에 어른거렸는데, 저들의 저항으로 지지부진 길어지자 속이 탔다.

위그 자작은 욕심이 많은 것에 비해 인내심이 짧았다. 어차피 자카리가 죽었으니, 굳이 여기서 군사나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다. 그렇게 판단한 위그 자작은 군사들을 선동했다.

“이만 퇴각하자! 자카리가 죽었으니, 목적은 달성했다!”

그리고는 냉큼 말을 몰아 자코브가 있을 아르노 영지로 달려갔다.

위그 자작의 머릿속 한편에는 정말로 자카리가 죽었을까 하는 의심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위그 자작은 피로 물든 자카리의 가슴과 정신을 놓은 듯 희게 질렸던 자카리의 얼굴만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했다.

‘그래…. 그 상황에서 살아 있을 리 없어. 활에 맞은 데다 낙마까지 하지 않았던가.’

그러던 와중, 그는 아르노군의 후방이 소란스러운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끊어 놓은 후방을 아라곤이 급습한 모양이었다.

무척 공교로운 우연이었다.

아라곤이 자코브의 사주를 받았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그는 하늘이 저를 돕는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혼란한 군을 급습하였으니, 자카리가 생존할 확률은 더욱 줄어들 것이다.

설령 자카리가 죽지 않았더라면…. 자코브의 반응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자카리는 죽어야만 했다. 죽었을 것이다…. 위그 자작은 끔찍한 가정에서 회피한 채 애써 행복한 상상을 했다. 그런 그를 비웃듯, 뺨을 스치고 가는 바람이 유난히도 칼처럼 시렸다.

머리가 복잡했던 탓일까. 위그 자작은 누군가가 자신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 * *

위그 자작이 매복지를 뜨기가 무섭게 자카리가 그에게 붙인 밀정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위그 자작이 자카리의 생사를 확실히 확인하지 않으리라는 건 예상대로였다. 단지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라곤이 그들의 후방을 노린 것이었다. 다행히도 미리 방비하고 있었기에 큰 피해는 없었지만, 무언가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적군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도 자카리는 한참을 죽은 척했다. 그렇게까지 철두철미한 작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감시를 붙여 두고 갔을 수도 있으니까. 일단은 계속해서 죽은 척하며 상황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자카리는 철두철미하게 보안이 이루어지는 곳에 머물며 회의에 참석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의 후방을 치다가 되레 당한 통에, 아라곤의 기세가 많이 죽은 것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위그 자작에게 붙인 밀정이 돌아왔다. 얼마나 급하게 말을 몰았는지,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다. 밀정은 다급히 자신이 본 것을 고했다.

“큰일 났습니다! 위그 자작이 달려간 곳이 바로 아르노 영지였습니다!”

“뭐? 아르노 영지엔 도대체 왜?”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백작님. 아르노 영지에서 영지전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

막사 안, 모든 이들의 표정이 딱딱히 굳었다. 자카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릅뜬 눈이 그가 얼마나 경악하고 있는지를 알려주었다. 자카리는 다급하게 밀정을 다그쳤다.

“누가…. 누가 영지를 침략한 것이냐?”

“그게….”

밀정은 머뭇거렸다. 그 또한 자신이 보고 온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2왕자입니다. 위그 자작 또한 2왕자에게 향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상황이 급박해 보였습니다, 백작님.”

자코브가 도대체 왜, 아르노 영지를 침략했단 말인가? 위그 자작까지 시켜서 자카리의 발목을 잡아 두고는…. 이게 마냥 우연은 아닐 것이다.

혹시 몰라 가스파르를 두고 오기는 했지만, 영지에 남은 군사 수는 오백여 명이다. 수성이 유리한 입장이라고는 하나, 자코브가 얼마만큼 되는 군사를 이끌고 왔는지 알 수가 없으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자카리가 처음으로 출전했을 때가 열여섯의 나이였다. 지금의 비앙카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때 자신은 어떠했던가? 두려움을 견디려 이를 악물지 않았던가.

비앙카는 얼마나 두려울까. 성안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을 비앙카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전쟁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인생을 살게 하고 싶었다…. 그런데 영지전이라니. 이 모든 것이 그가 부족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자책과 걱정이 뒤섞여 자카리를 잠식했다. 머리가 핑 돌며 현기증이 왔다. 자카리의 커다란 몸이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가까스로 팔을 뻗어서야 탁자에 몸을 지지할 수 있었다.

“빨리.”

자카리는 숨을 몰아쉬며 간신히 단어를 내뱉었다. 혹시, 하는 불안에 가슴이 탁 틀어 막혔다. 누군가가 그의 목을 옥죄는 것만 같았다.

그런 자카리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화들짝 놀란 로베르와 소뵈르가 자카리를 부축했다. 자카리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허덕이며 말을 이었다.

“빨리 가자. 가서….”

“얼른 군을 꾸리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로베르가 바로 움직였다. 소뵈르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급박한 상황을 깨닫고 서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소가 상황을 정리했다.

“아라곤의 잔당이 아직 남아 있으니, 저와 앙리 경은 변경에 남아 그들과 대치하겠습니다. 백작은 걱정하지 마시고 얼른 아르노로 돌아가서 영지전을 마무리 지으십시오.”

“다보빌 백작과 앙리 경만 믿겠소.”

아르노군만으로도 충분히 영지전을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군사들을 더 많이 데려가면 가는 시일만 늦어질 뿐이었다.

출정 준비를 하는 군사들의 눈동자가 분노로 활활 타올랐다. 그들 또한 영지에 두고 온 가족이 있었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영지가 침략당했다니,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렇게 한시바삐 영지로 돌아갈 군을 꾸리고 있던 와중, 때마침 비앙카가 보낸 전령 또한 자카리의 군이 자리 잡은 변경에 도착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엇갈릴 뻔했을 정도로 절묘한 시기였다.

“백작님!”

“아르노 영지가 공격당했다는 소식은 들었다. 안 그래도 영지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준비하고 있던 찰나였다. 비앙카는? 비앙카는 괜찮나?”

“마님께서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계십니다…. 아니, 이럴 때가 아니에요. 얼른, 얼른 가셔야 합니다…! 2왕자가 노리는 것은 바로 마님이세요!”

“비앙카?”

짐작도 못 한 전령의 발언에 자카리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를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 사소한 예의조차 지키지 못할 정도로, 그는 혼이 나가 있었다.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친 것 같은 충격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비앙카가 고통스러워할 것이라는 건 짐작했다. 하지만 자코브가 비앙카를 노린다니? 자카리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비앙카를 왜?”

“마님이 성인이시니까요! 그는 마님의 신변을 원하고 있어요. 백작님이 죽었다는 말로 마님을 협박하시고…. 얼른 영지로 가셔야 합니다.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전령이 자카리를 재촉했다. 일개 전령이 백작인 자카리에게 소리를 높일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위그가 자신을 죽이려 한 것과 결부하니 상황이 훤히 그려졌다. 자카리를 죽이고 미망인이 된 그녀를 맞아 결혼하고, 성인인 그녀의 신분을 이용하여 교황청의 세력을 등에 업고 왕위에 오를 생각임이 틀림없었다.

자카리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그가 변경에 와 있는 사이, 비앙카에게 드리운 마수의 존재가 더할 나위 없이 그를 위협했다.

그 순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색이 된 자카리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만약 2왕자가 위그 자작을 통해 내 죽음을 알게 되었다면….”

“아마 그 사실로 아르노 영지를 혼란스럽게 하겠지요. 항복을 받아 내려 할 것입니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아르노 백작.”

마르소가 다급히 자카리를 재촉했다. 수성은 어지간해서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수성하는 쪽의 의지만 있다면. 그 이야기인즉슨, 의지가 사라지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자카리의 죽음에 대해 알기 전, 영지를 떠난 전령은 지금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2왕자가 나의 죽음으로 비앙카를 협박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확신합니다. 그러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

마르소가 자카리를 또렷이 응시했다. 그의 매끈한 낯은 평소와 같이 흔들림 한 점 없었지만, 침중한 그의 눈빛에서는 그가 차마 말로 표현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느껴졌다.

그의 죽음이 비앙카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자카리는 참담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그저, 위그 자작이 누구의 사주를 받았는지 캐내기 위한 함정을 팔 생각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비앙카의 귀까지 흘러 들어갈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비앙카가 그의 죽음을 알고는 얼마나 절망했을까. 차라리 무덤덤했으면. 아니, 그건 싫다. 하지만 그녀가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싫다. 제발 그녀가 몰랐으면…. 안 그래도 힘겨울 그녀에게 이런 마음고생을 시키고 싶지 않다….

수많은 생각이 자카리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비앙카의 일에 한해서만큼은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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