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75화 (175/192)

#175 실패한 결혼장사(4)

“아직 나는 아르노 백작의 시신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목이라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백작의 아내요, 영주의 대리자로서 나의 결정이다!”

그것이 바로 비앙카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를 잃는 고통을 두 번 겪게 된다 하더라도, 현실에 무력하게 굴복하지만은 않으리라 다짐했다.

늑대는 잔뜩 굶어 비쩍 마른다 해도 사람이 건네주는 고기를 집어 먹지 않는다. 경계심 가득한, 야생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들을 버티고 서게 만든다.

사람들은 지금껏 비앙카가 여우라고 생각했다. 연약하고 예민한 성정으로 자카리를 들었다 놨다 한다고. 그녀가 바라는 것은 어떻게든 자카리를 구슬려 얻어 낸다고….

그것은 그녀가 백작 부인의 의무를 짊어지고, 성녀임이 밝혀진 뒤에도 마찬가지인 평가였다.

하지만 그녀는 늑대의 아내였다.

늑대의 아내 역시 늑대인 법. 아르노를 지키기 위해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늑대가 된 것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몸을 웅크린 늑대였던 건지. 모두가 혼란스러워하는 와중, 비앙카는 서슬 퍼런 기세로 말을 이었다.

“백작님의 생사가 불분명하다지만, 우리에게는 차기 아르노 백작이 있다.”

차기 아르노 백작!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후계자가 될 수도 있는 새 생명의 존재에 모두의 눈빛이 달라졌다. 암운이 드리운 와중 한 가닥 희망이 내려왔다.

비앙카는 영지민들의 추가 기울었다는 걸 눈치챘다. 모피를 잡은 가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쐐기를 박아야 했다. 비앙카는 숨을 들이켰다. 겨울바람의 건조한 냄새가 그녀의 코에 맴돌았다.

비앙카는 난간을 짚고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필사적임을, 영지의 모두가 알 수 있도록. 폐부 깊은 곳의 힘까지 끌어낸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

“그러니 그대들은, 아르노를 위해 검을 들어라! 활을 들어라! 돌이라도 좋다! 손에 힘이 남아 있는 한, 들 수 있는 모든 것을 들어 저들을 무찌르라!”

“와아아아아아!!!”

비앙카의 처절함은 그들에게 다시 한 번 불을 붙였다. 비앙카의 의지에 화답하듯, 사람들은 모두 손을 하늘로 치켜들고 함성을 내질렀다. 외침이 얼마나 쩌렁쩌렁했는지, 피부가 떨릴 정도였다.

비앙카가 결단을 내린 것처럼, 영지민들도 마음을 다잡았다. 그들이 자카리의 죽음으로 흔들린 건, 패배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주인이 사라진 이상, 그들이 아무리 싸워 봐야 이 전쟁의 명분을 얻을 수 없다는 현실! 그들에게는 구심점이, 상징이 필요했다….

그리고 비앙카가 그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차기 아르노를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미래를 위하여.

아르노 영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 * *

그렇게 전쟁은 장기전에 돌입했다. 비축된 식량을 셈해 본 뱅상은 아직 석 달은 더 버틸 수 있을 거라며 긍정적인 소식을 전했다.

영지민들 또한 의욕이 넘쳤다. 모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오히려 속이 타는 것은 자코브 쪽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아르노 영지에서 항복 의사를 보이지 않으니 속이 탔다.

머리가 혼란해하면 손발 또한 우왕좌왕하는 법이다. 자코브군은 손발이 제대로 맞지 않아 실수를 거듭했다.

그렇다 하여 아르노가 이기는 쪽으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팽팽히 당겨진 실, 혹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는 저울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만약 여기에 작은 추 하나만 올라가도 금방 균형이 깨지리라.

자코브군과 아르노군은 모두 자신이 추를 얹기 위해 노력했다. 서로 지원군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이들이란 이들에겐 모조리 전령을 보냈다. 하지만 다들 변방의 전쟁에 지원을 나가 있어 좀처럼 긍정적 회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과연 누구의 지원군이 먼저 도착할 것인가.

그렇게 하루하루 버틴다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전황이 지지부진하게 흘러가는 와중, 저 먼 평야 너머 지평선부터 우르르 먼지구름이 일었다. 마치 군사가 몰려오는 것 같은 모양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말을 탄 군사들이 아르노 영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망대 위에서 상황을 살피던 파수꾼이 그 모습을 발견하고는 크게 외쳤다.

“원군! 원군입니다!”

“누구의?”

파수꾼의 보고를 들은 비앙카가 다급히 되물었다. 하지만 파수꾼에게선 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거리가 꽤 되는 만큼, 상대가 누군지 바로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파악하기엔 거리가 멉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까이 오면 원군의 세력을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파수꾼은 집중하여 지평선 너머를 노려보았다. 모든 이들이 초조하게 침을 삼켰다. 잠깐의 찰나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블랑쉐포르가? 자코브의 가신? 아니면 성기사단?

과연 비앙카와 자코브, 어느 쪽의 원군일 것인가?

긴장한 병사들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원군의 세력에 따라 전쟁의 승패가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니만큼, 그들이 초조해하는 것은 당연했다.

잠시 뒤, 파수꾼이 탄식했다. 원군 가문의 문장을 알아본 그는 바로 소리 높여 외쳤다.

“검은 늑대!!”

검은 늑대는 아르노가의 상징이다. 파수꾼의 외침을 들은 모두의 눈이 등잔만 해졌다.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르노가의 깃발입니다!!”

자코브의 원군이 아니니 기뻐해야 할 일이건만, 비앙카는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일찍, 자카리의 생존 여부를 맞닥트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자카리가 살아 있는 건 아닐까…. 아니야, 기대하지 마. 그저 로베르와 소뵈르가 귀환하는 걸 수도 있어….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한번 싹이 튼 기대는 그녀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대를 품고 있는 것은 비앙카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뱅상 또한 다급히 파수꾼을 재촉했다.

“선두에서 군을 이끄는 것은 누구인가?”

“…늑대.”

“늑대?”

파수꾼은 이 쉽사리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몇 번이고 눈을 비비며 원군을 보았다. 정말 내가 본 것이 사실인가? 하지만 그가 본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한참을 입을 달싹이던 그는, 자신이 본 것에 대한 확신을 얻기가 무섭게 황급히 외쳤다.

“늑대가 조각된 투구입니다. 백작님의 투구예요!!”

파수꾼의 환희에 찬 외침이 아르노 성을 쩌렁쩌렁 울렸다. 파수꾼의 입꼬리가 광대까지 씰룩이며 올라갔다.

비앙카는 멍하니 파수꾼을 올려다보았다. 믿지 못하는 표정. 아니, 차마 믿을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파수꾼 또한 그런 비앙카의 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이 성안에서, 그가 본 것에 가장 가슴 졸일 이는 응당 비앙카일 테니까. 파수꾼은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확신을 담아, 비앙카에게 전했다.

“백작님이, 백작님이 계세요!”

* * *

변경으로 찾아온 위그 자작이 던지고 간 레이스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칼리아 숲으로 가기 전. 막사에서는 함정임이 뻔한 곳에 걸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탁상공론이 한참이었다.

상황은 의심스러웠지만 자카리는 고집스러웠다. 의심스럽다는 것을 알면서도 꺾지 않는 고집이니, 설득할 수 없다시피 했다.

하다못해 비앙카가 관련 없다는 것만 알아도 함정에 방비하기 위한 계획을 좀 더 유동적으로 짤 수 있을 텐데. 그들이 아는 것이 없는 만큼, 생각의 폭이 좁았다.

그때 대뜸 나선 이가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소뵈르였다.

“잠깐만요.”

“무슨 일이지, 소뵈르?”

“그 레이스…. 제가 잠시 살펴볼 수 있겠습니까?”

살펴봐서 무얼 알 수 있단 말인가. 소뵈르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모두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소뵈르가 이렇게 나선 데에는 무언가 이유가 있기 마련. 자카리는 흔쾌히 소뵈르에게 레이스 손수건을 넘겼다.

소뵈르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이스의 무늬를 살폈다. 그렇게 한참 레이스를 조사하던 소뵈르의 안색이 환하게 뒤바뀌었다.

“이건…. 마님이 쓰시는 물건이 아닙니다. 마님이 선물용으로 만드신 거예요. 가장자리 무늬가 달라요.”

소뵈르의 확답에 모두가 웅성거렸다. 그걸 소뵈르가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아해했다.

평민 출신인 소뵈르는 사치품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소뵈르가 레이스의 가장자리 무늬 따위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상했다. 당황한 로베르가 어이없어 하며 물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래 봬도 마님께서 레이스를 만들기 시작하셨을 때 곁에서 종종 지켜본 적이 있다고. 가스파르도 알고 있을걸? 가끔 지나가듯 말씀하시곤 했으니까. 이렇게 될 줄 알고 알려주신 건 아닐 테지만….”

소뵈르는 으스대며 대꾸했다. 거들먹거리며 말하긴 했지만, 실상은 간식을 얻어먹으러 간 김에 겸사겸사 보게 된 것일 뿐이었다.

물론 소뵈르라 하여 레이스의 무늬를 자세히 구분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행히도 그가 봤던 종류의 무늬였기에 파악이 빨랐을 뿐.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운이 좋았다.

자카리는 미간을 찌푸린 채, 레이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선물용 물건이라고?”

“네. 마님께서는 직접 쓰실 물건과 선물용, 그리고 하녀에게 알려준 레이스 문양을 다 구분해서 만드셨어요. 차별성을 두기 위해서라고 하셨는데…. 마님께서 직접 만든 레이스는 무척 소수였고요. 그중에서도 마님이 직접 사용하시는 레이스는 아주 복잡하고도 정교한 무늬예요. 이건 절대 마님의 것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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