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 실패한 결혼장사(3)
비앙카가 실신한 이후, 뱅상은 전령의 목을 졸라 죽이고 싶은 심정을 애써 참으며 그를 돌려보냈다. 자코브가 비앙카에게 치근덕거리는 발정 난 개처럼 군다 하여 그들 또한 명예를 잊어도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전령의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다시피 한 뒤, 뱅상과 가스파르, 조아생은 회의를 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병사와 영지민들에게 자카리의 죽음을 숨기자 결정했다. 그리고 비앙카가 전령을 만나던 당시 홀에 있던 이들의 입단속을 했다.
하지만 자카리의 부고는 그 정도로 잠재워질 내용이 아니었다. 이 엄청난 소문은 알음알음 사람들의 입을 타고 퍼져 나갔다.
영지의 분위기가 파도치듯 술렁였다. 영주님의 죽음이 사실일까? 아니면 잘못 왜곡된 뜬 소문인 걸까? 자카리의 죽음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영지의 사기를 바닥으로 치닫게 했다.
더불어 영지의 최고 결정자이자 영주 대리인인 비앙카가 한동안 전쟁터에 보이지 않는 것 또한 영지민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성벽을 지키고 있던 젊은 병사, 토마스가 그 옆을 지키고 있던 장년의 병사 긱에게 슬그머니 물었다.
“정말로 백작님이 전사하신 걸까요?”
“글쎄….”
“마님은 성인이시잖아요. 성인의 가호가 있는데, 어떻게 백작님이….”
긱이 침중한 낯으로 말을 아꼈지만, 토마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할 말을 했다. 납득 가지 않는다며 투덜거리던 그는 잠시 골몰하다 넌지시 운을 떼었다.
“설마, 마님이 성인이 아닌 건….”
“그런 말은 쉽게 입에 담는 게 아니야, 토마스.”
“마님께서도 두문불출하시고…. 긱 아저씨는 이 상황이 답답하지도 않아요?”
긱이라고 해서 어찌 답답하지 않겠는가? 토마스를 힐난하기는 했지만, 긱의 얼굴 또한 착잡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토마스는 긱의 제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안한 속내를 줄줄이 털어놓았다.
“마님께서 전쟁을 포기하신 게 아닐까요? 백작님이 그렇게 되셨다는데, 버틸 상황이 아니잖아요.”
“그러면 마님께서 저 왕자인지 무뢰배인지 하는 놈하고 재혼이라도 하고자 한다는 말이야?”
“그게 아니라…. 아니, 솔직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잖아요. 어차피 우리가 목숨 내걸고 싸워 봤자….”
토마스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의 갈색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태연한 척 주절주절 말했지만 속내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그의 하얗게 질린 입술이 달달 떨렸다.
토마스는 아직 죽기엔 너무 이른, 창창한 나이의 젊은이였다. 사십 줄 먹은 긱 또한 토마스의 두려움이 이해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자카리가 죽었다면 전쟁을 계속하든, 계속하지 않든 이 영지는 더 이상 아르노의 것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아르노 땅은 적법한 후계에게 넘어간다. 자카리는 왕에게 직접 작위와 영토를 받은 귀족이었고, 그에게는 후계자나 영지를 물려받을 친척이 없었다. 아르노가 되기 전에 위그였으니, 위그 자작이 이 땅을 물려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물며 전쟁에서 지기라도 하면 그들은 패전의 책임을 물어 새로운 영주에게 막중한 세금을 내게 된다.
비앙카가 성인이라 할지라도, 후계자를 낳지 못한 그녀는 아르노를 계승하지 못하고 결국 친정으로 돌아갈 뿐이다. 아니면 자코브가 바라던 대로 재혼하든가. 어느 쪽이든 그녀가 아르노의 영지민들을 신경 써 줄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떻게 해도 그들의 주인이 바뀐다. 그렇다면 굳이 아르노를 위해 목숨 걸 이유가 없었다. 냉정하거나 이기적인 생각이라 하여도, 제 목숨과 가족의 목숨을 두고 그 누가 이기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자신의 생활 터전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데, 이러다가 전부 물거품이 될 거라 생각하니 심란한 것도 당연했다.
토마스보다 두 살 어린 샘이라는 병사는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넌지시 운을 뗐다.
“마님은 그저 백작님의 전사 소식에 충격받아 쓰러지신 뒤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게 아닐까요? 애초에 건강하신 분은 아니니까요. 전쟁 내내 성벽과 마을을 오가며 손을 보태신 것도 이미 충분히 무리하신 일일 텐데….”
토마스와 긱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다. 그녀와 함께 전쟁을 견뎌 내면서, 알게 모르게 정이 많이 들었던 찰나였다. 아르노의 어린 마님이 안타까워진 그들은 침중한 신음을 흘렸다.
“이러다 줄초상이라도 치르면….”
“어허! 괜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긱은 다급히 샘의 입을 막았다. 말이 씨가 된다고, 전쟁에서는 재수 없는 추측조차 삼가야 했다.
현재에 대한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흔들리는 건 비단 긱과 샘, 토마스 사이에서의 일이 아니었다.
아르노 성의 분위기가 뒤숭숭해지니, 성벽에서 적군을 막아내는 데 구멍이 많이 생겼다. 노골적으로 드러난 약점이 적군의 눈에 보이지 않을 리 없다. 자코브는 희희낙락하며 그 약점을 공격했고, 가스파르와 조아생은 그를 막기 위해 힘들게 허덕였다.
그렇게 패배를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다가가던 어느 날, 두문불출하던 비앙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비앙카는 두꺼운 모피를 껴입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오히려 바싹 마르고 가는 몸이 두드러졌다. 모피라도 걸치지 않으면 그대로 겨울바람에 쓸려 날아갈 것만 같았다.
평소에도 건강해 보이는 편은 아니었다지만, 비틀거리는 그녀의 안색은 유난히도 해쓱하고 퀭했다. 병사들은 추측한 그대로인 그녀의 모습에 안타까이 신음을 흘렸다.
비앙카는 옆에 있는 이본느에게 몸을 의지한 채 발을 내디뎠다. 이본느는 전전긍긍하며 비앙카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신경 썼다.
비록 병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낯에서는 어딘지 모를 각오와 위엄이 느껴졌다.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견고함. 귀족으로서의 자존심과 고집이 맞물린 눈빛은 흔들림 하나 없었다.
성벽에 오른 비앙카가 영지민들에게 외쳤다.
“병사들이여, 그리고 아르노의 영지민들이여!”
얼마나 앓았는지, 그녀의 목소리는 벽을 긁는 듯 쉬어 있었다.
잔뜩 앓은 비앙카의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가 입을 열기가 무섭게 소란이 단번에 멈췄다.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모였다.
비앙카의 움푹 팬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형형했다. 비앙카는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불안해하는 심정은 잘 알고 있다. 영주 대리로서 확실히 말하건대, 아르노 영지는 투항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소란스러웠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던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숙덕거렸다. 비앙카를 향해 쏟아지는 시선이 마냥 긍정적이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쯤이야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비앙카는 자신의 임신을 깨달은 뒤, 정신을 다잡기가 무섭게 자신과 영지의 상황을 이성적으로 분석했다.
자카리의 죽음을 알려 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코브다.
그의 말을 마냥 믿기엔, 그에게 신뢰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자카리가 죽었다는 증거조차 없지 않던가.
물론 자코브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다. 자카리의 죽음을 확인하려면 변경으로 사람을 보내야 했고, 그사이에 아르노 영지를 혼란스럽게 하여 사기를 꺾을 뿐만 아니라 혹여 비앙카가 그에 휘둘려 항복하기를 기대하는 속셈이 있을 것이다.
그 이야기인즉슨, 변경에 확인하여 답을 듣기까지 그들이 버티면 되는 일이었다. 안 그래도 전선에 전령을 보내 두었다. 그쪽에 아르노 영지의 침략 사실을 밝혔으니, 좀만 버티면 무언가 답이 올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카리의 죽음을 믿을 수가 없었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기대한 만큼 훗날 더 마음이 아파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사정이 있어 변경에 나가 있는 용감한 아르노의 군대가 돌아오기까지 시일이 걸리게 되었으나, 우리에겐 성기사단이 있고, 내 친정인 블랑쉐포르가가 있다. 그들이 지원해 준다면, 이 전쟁에도 승산은 있다. 내 염치없이도 고하건대, 아르노를 위해 조금만 더 힘을 내달라!”
비앙카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듯 외쳤다. 얼마나 있는 힘껏 외쳤는지, 그녀의 가는 몸이 휘청 흔들렸다.
비앙카는 영지민들을 설득해서, 전쟁을 계속하게 해야 했다. 적어도, 전령이 소식을 들고 올 때까지.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걸 알았기에, 그녀가 내밀 수 있는 모든 패를 끄집어냈다.
귀스타브가 현재 알베르 왕세손을 돌보고 있다지만, 지금은 그 손이라도 빌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만약 패배하기라도 하면 그녀는 자코브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 그녀 홑몸이라면 자진이라도 하겠지만 그녀에게는 자카리의 아이가 있다. 자코브가 과연 자카리의 아이를 가만둘 것인가? 유산시키려고 들 게 분명했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다들 비앙카가 의도적으로 자카리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것을 눈치챘다. 주저하던 이들 중 하나가, 용기 있게 외쳤다.
“백작님이…. 백작님이 전사하셨다는 소문은 어떻게 된 겁니까, 마님?”
“확실치 않다.”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소문이 완전 거짓말은 아니었다는 사실에 병사들과 영지민들의 웅성거림이 더욱 커져 갔다.
비앙카는 긍정하지 않았지만, 자카리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이 사실이라는 걸 영지민들은 깨달았다. 설마 했던 이들도 그제야 자카리의 죽음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고, 모두가 공황에 빠져 우왕좌왕했다.
소란은 폭동이 될 것처럼 거세어졌다. 이본느가 불안하게 비앙카를 응시했다. 비앙카가 영지민들에게 사실을 밝히겠다 나섰을 때 걱정과 우려 섞인 반대를 건넨 뱅상의 낯도 딱딱하게 굳었다.
영지민 하나하나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앙카의 눈에 쏙쏙 박혔다. 혼란한 군중의 외침 속에서도 비앙카는 흔들림 없었다.
그녀는 척추를 바로 세우고 턱 끝을 치켜든 채, 몰아치는 태풍의 앞에 우뚝 선 바위처럼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의연히 말했다.
“나는 아직 아르노 백작의 시신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했다. 그의 목이라도 가져오지 않는다면, 나는 그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이 백작의 아내요, 영주의 대리자로서 나의 결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