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 실패한 결혼장사(2)
한밤중 다시 기절하듯 까무룩 잠이 든 비앙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다음 날 낮이었다. 귀를 찌르는 함성 속에서, 비앙카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비앙카가 일어나자,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이본느가 화들짝 놀랐다.
“드디어 일어나셨군요, 마님…!”
“이본느.”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이 한참만인 모양이었다. 이본느는 숫제 울 기색이었다. 비앙카는 입술을 달싹였다. 이본느는 눈치 빠르게 비앙카가 물을 원한다는 걸 깨닫고 그녀에게 대령했다.
물로 입술을 축인 비앙카는 쉰 목소리로 물었다.
“전쟁은…? 전쟁은 어떻게 되고 있니.”
“조아생 경과 가스파르 경이 잘 막아내고 있어요. 서신 속의 내용은 일단 함구령을 내렸고요.”
이본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그녀는 흐트러진 이부자리를 다시 잘 정돈해 덮어 주었다. 이불 위로 도닥이는 손길이 다정했다. 그녀는 부드러운 어조로 비앙카가 좀 더 쉬기를 설득했다.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계세요. 마님께서 건강하셔야지 저희도 사기가 치솟죠.”
하지만 영주의 죽음이라는 큰 화두가 언제까지 덮어질까? 자카리의 죽음이 밝혀지면 사기에 큰 영향이 있을 테고, 그것은 곧 패전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만큼은 안 된다. 이렇게 누워 있을 여유가 없었던 비앙카는 몸을 일으켰다.
“아니야. 내가. 내가 나가 봐야겠다.”
“안 돼요!”
이본느가 황급히 저지했다. 온몸을 날려서라도 비앙카를 침대에 다시 눕히려는 그녀의 기세에 비앙카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생각보다 반응이 과했다. 그녀가 밖에 나가면 안 되는 이유가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도대체 방 밖이 무슨 꼴이기에?
비앙카는 픽 웃었다. 그저 그녀가 이렇게 오랫동안 기절한 건 처음이라 이본느가 많이 걱정한 것일 뿐이다. 과민 반응하는 건 제 쪽이리라.
비앙카는 자신 앞을 가로막은 이본느에게 손을 내저으며 침대 밖으로 발을 뻗었다.
“나는 괜찮으니 걱정 말거라.”
괜찮다고는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렸다. 카펫 위에 위태롭게 선 비앙카는 하얀 속옷용 드레스만을 입은 채 이본느를 빤히 바라보았다.
당장 옷을 입히라는 무언의 채근이 담긴 눈빛에, 이본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몇 번이고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마치,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목에 탁 걸려 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순간 이본느의 눈빛이 바뀌었다. 단단히 각오한 표정. 이본느는 비앙카의 손을 이끌고, 그녀를 침대에 다시 앉혔다. 이본느의 기세가 자못 무시무시하였기에, 비앙카는 순순히 그에 따랐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조곤조곤 운을 떼었다.
“마님, 이제부터 제가 할 이야기에 너무 놀라면 안 돼요.”
“더 놀랄 일이 남아 있겠니?”
비앙카가 자조적으로 되물었다. 그 무슨 일이 벌어졌다 해도, 자카리의 죽음만큼 충격적이지는 않으리라. 이미 그녀는 죽을 각오까지 한 몸이었다. 모든 것을 놓아버린 그녀에게선 허무함이 흘러넘쳤다.
이본느는 그런 비앙카를 빤히 응시했다. 순박하고 선량한 눈동자가 걱정과 우려로 그득했다.
다짐했음에도 쉽사리 꺼내기 쉬운 이야기가 아닌지, 이본느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비앙카는 참을성 있게 그녀를 기다렸다.
맞잡은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이본느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그녀의 떨림이 비앙카에게까지 전해졌다.
“마님께선…. 지금 홀몸이 아니세요.”
“뭐?”
“임신하셨어요. 마님의 배 속에, 아르노가의 희망이 잠들어 있어요. 마님께선, 어떻게든 버티셔야 해요, 아셨죠?”
처음엔 제법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끝이 되어선 울먹이는 울음기가 목소리에 스며들어 있었다. 이본느는 비앙카를 붙들고 오열했다.
이본느의 오열을 바라보는 비앙카의 머리가 멍했다. 그녀는 느릿하게 시선을 떨구어, 자신의 마릇한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그의 아이가 있다고?
그녀의 손끝이 조심스레 배에 닿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납작하여 믿어지지가 않았다.
“마님께서 충격을 받아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아기씨께서 백작님을 닮았는지 강하게 버텨주셨어요. 하지만 정말 조심하셔야 해요. 아셨죠, 마님? 마음 단단히 잡수셔야 해요. 마님만이 우리 희망이에요….”
이본느는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헐떡이며 비앙카의 팔뚝을 강하게 잡았다. 윽박지르는 태도는 시녀의 본분에 맞지 않았지만, 그만큼 이본느가 필사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비앙카 또한 갑작스레 알게 된 임신 사실에 정신을 추스르기가 쉽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전쟁터에 나갈 수는 없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비앙카의 낯은 여전히 넋이 빠져나간 듯 멍했다.
“뭐라도 좀 드셔야 해요. 어쩐지 최근 들어 식사를 힘겨워하시더라니…. 제가 그래도 마님이 좋아하는 음식을 좀 챙겨 올게요. 쉬고 계세요.”
이본느는 손등으로 황급히 눈물을 훔치고는, 부산스레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앙카가 괜찮다는 이야기를 할 새도 없이, 그녀는 쏜살같이 방을 빠져나갔다.
비앙카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망연자실하여 몸을 가누기가 힘들었다. 무의식중에도 그녀의 손은 계속해서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당신은 정말이지….”
비앙카가 쓰게 웃었다. 자카리가 출전하기 전, 마지막 밤에 생긴 아이가 분명했다.
그토록 그리던 후계자였다.
그런데 하필, 마음을 전부 정리하고 각오한 지금 그 존재를 알게 되다니…. 참 얄궂은 일이었다.
“제가 죽음을 결정 내리지조차 못하게 하네요.”
비앙카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러 보였다. 내리쬐는 햇볕이 어찌나 밝은지, 비앙카의 눈에 눈물이 비쳤다.
만약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일찍 애가 생겼더라면 자카리가 아이의 이름을 지어 주었을 텐데…. 그토록 아이가 생기길 거부한 그였지만,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들었더라면 참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자카리가 기뻐하는 모습을 상상한 비앙카의 눈가가 흐려졌다. 그녀의 해쓱한 뺨을 타고 뚝뚝, 멈췄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치, 자카리가 죽음과 함께 앗아 간 눈물을 아이와 함께 돌려받은 듯이.
비앙카는 밀려드는 피로에 다시 눈을 감았다. 놓을 땐 그렇게도 가벼웠던 삶이, 다시 잡으려니 너무 무거웠다.
* * *
자카리의 부고를 전했는데도, 아르노 성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서신을 읽은 비앙카가 혼절했다는 전령의 보고에 자코브는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녀가 정신을 차려야 무슨 결정을 내려도 내릴 테니까.
하지만 시일은 길어졌고, 아르노 성에서는 묵묵부답일 뿐이었다. 초조해진 자코브 쪽에서 다시 전령을 보냈다. 이번에는 답이 돌아왔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자카리가 죽었다는 데도 여전히 저항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한 자코브는 버럭 분통을 터트렸다.
“도대체 뭐가 문제야! 그놈이 죽었다잖아. 이제 그녀를 보살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
자코브는 신경질스레 방 안을 오갔다. 그의 눈동자에는 핏발이 섰고, 이죽거리는 입꼬리는 잔뜩 비틀린 채였다. 잘생긴 외모가 무색할 정도로 귀기 어린 표정은 마치 악마 같았다.
“하, 블랑쉐포르가가 받아줄 거라 믿고 있는 건가…. 어차피 블랑쉐포르가에서도 아르노 백작의 죽음을 알면 그녀를 재혼시키려 할 텐데. 그럴 거면 차라리 나에게 오는 게 낫다 그리도 말했건만.”
그럼에도 자코브를 거부하는 것은, 그렇게도 자코브가 싫다는 뜻으로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솔직히, 자코브는 자카리만 죽으면 일이 바로 해결될 줄 알았다. 그랬던 만큼 배신감은 곱절이 되었다.
“그놈이나 나나 뭐가 달라! 출신도, 처지도, 상황도! 둘째 부인의 아들로 태어나, 능력도 없는 첫째한테 정당한 밥그릇을 빼앗기고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도록 내몰린 건 똑같잖아!”
버럭 외친 그는 숨을 몰아쉬었다. 들썩이는 어깨가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를 보여주었다. 악다문 이가 갈리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역시 자카리가 죽었다는 증거를 보여 주었어야 했나…. 하여간 위그 자작, 쓸모없는 놈…. 자카리의 목이라도 잘라 왔었어야지….”
자카리를 죽였다는 위그 자작의 보고에 반색했던 것이 거짓말처럼, 자코브는 태도를 바꿔 그를 비난했다. 이 모든 것이 위그 자작의 모자란 일 처리 때문 같았다.
“흥분하지 말자…. 그래. 어차피 자카리의 죽음은 얻어걸린 거니까. 애초 계획대로 하는 거야.”
자코브의 낯이 순식간에 정돈되었다. 자카리가 죽음으로써 지원군이 오는 시기가 늦춰진 것 정도로 만족했다.
물론 아직 성기사단이 남기는 했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교황의 군대. 자카리가 죽었다면 다시 교황청으로 돌아가 교황의 명을 받고 움직여야 한다.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비앙카가 끈질기게 저항해 봤자, 자코브가 더 끈질기게 따라붙으면 이기는 게임이었다.
조금만 버티면 비앙카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자코브를 독려했다.
비앙카가 그토록 자코브를 싫어한다 해도 소용없다. 자코브는 강제로라도 제 곁에 앉힐 생각이었다. 비록 그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그녀의 몸뚱이뿐일지라도, 그것마저 얻지 못하는 것보다 나았다.
남들이 보기엔 결국 자코브의 여자가 아니겠는가? 자코브는 그것으로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