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유리병 속 나비(8) / 실패한 결혼장사(1)
비앙카가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지기 직전, 제일 가까이에 있던 이본느가 그녀를 받아내었다. 이본느는 혼비백산하여 비앙카를 부르짖었다.
“마님, 정신 차리십시오! 마님!”
“서신의 내용이 무엇이기에….”
이본느가 비앙카를 추스르는 사이, 뱅상은 비앙카의 손에서 떨어져 내린 자코브의 서신을 낚아챘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는 뱅상의 표정 또한 비앙카와 다를 바 없다가, 끝내 자카리의 부고를 읽은 그의 낯 또한 망치로 뒤통수를 후려 맞은 듯 멍해졌다.
“거짓말….”
쓰러진 비앙카의 의식이 가물가물 흐려졌다. 마치 안개에 둘러싸인 숲에 홀로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귓가에 들리는 목소리는 멀어져만 가는데 머릿속에 울리는, 자카리와 나누었던 대화는 더할 나위 없이 선명했다.
-그대는 아직도 우는군.
눈가에 닿아 오던 그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했다. 투박하면서도 조심스러운, 세상에서 제일 귀한 진주라도 매만지는 듯한…. 이제는 더 이상 느끼지 못할 그 손길.
-그대는 나만 마주하면 항상 울었지.
맞아요, 자카리.
나는 항상 그대 앞에서만 울었죠. 그대가 받아주니까. 그대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받아줄 이가 없는 눈물은, 그저 말라 갈 뿐이에요.
나는 이제 더 이상,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요….
비앙카의 뺨은 건조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은 겨울바람이 스치고 간 들판처럼 버석했다. 차라리 화마에 활활 불타올랐다면 재라도 남았을까. 서리가 낀 단단한 흙은 곡괭이질 할 의지마저 송두리째 빼앗았다.
비앙카의 머릿속에 수많은 후회가 오르내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전쟁에 내보내지 말걸. 애초에 꿈에서 깨자마자 어떻게 된 일인지 자카리에게 고백할걸. 내 염치 따위 내려놓고. 까짓 자존심이 뭐라고….
이미 한 번 후회 가득한 인생을 살았으니, 이번만큼은 후회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결국, 이번 생조차도 후회의 연속이었다.
비앙카는 자신이 자카리의 죽음을 막기 위해 노력했던 일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모두 의미 없는 짓이었다. 결국 자카리는 죽었으니까.
비앙카는 자신이 아무리 날갯짓해도, 결국 유리병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나비와 같다는 걸 깨달았다.
운명이라는 새장 속의 새. 신이 그녀를 선택했지만, 그녀는 운명을 거스를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녀의 날개는 거센 바람에 찢길 정도로 연약하여, 결국 의미 없는 발버둥만 계속했을 뿐이었다.
‘철저히 방비한다면서. 죽지 않을 거라면서…. 죽으려야 죽을 수 없을 것 같다 했잖아요…. 이 거짓말쟁이….’
비앙카는 오갈 데 없는 원망을 자카리에게 돌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서러워졌다. 더욱 깊숙이 스며드는 자카리의 부재에 비앙카는 숨을 헐떡였다.
왜 당신이 없어서. 왜 내가 이렇게.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좌절, 무력감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허우적대며 앞으로 나아가려 해도, 오히려 몸뚱이에 납이라도 매달아 둔 것처럼 바닥으로 가라앉을 뿐이었다.
기어코, 정신을 다잡지 못한 비앙카는 그대로 까무룩 기절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끝없는 무저갱 같은 꿈속으로.
* * *
비앙카는 열에 시달렸다. 들끓는 고열에 땀을 뻘뻘 흘렸다. 밤새 고통스러움으로 몸을 뒤척였지만, 차라리 이 고통이 기꺼웠다. 몸이 괴로운 와중에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으니, 적어도 마음만큼은 편안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뜨문뜨문, 정신이 들 때가 있었다. 비앙카가 완전히 눈을 떴을 때는 한밤중이었다. 그녀의 귓가에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이 여전히 전쟁 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방 안에는 그녀 혼자였다. 침대에 누워 있던 비앙카는 몸을 일으키고 싶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로 몸이 무거웠다.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비앙카는 멍하니 천장을 보았다. 십여 년간 봐 온 그녀의 방 천장이 오늘따라 낯설었다. 비앙카의 방에 달빛이 들이쳤다. 달빛을 받은 그녀의 흰 피부가 창백하게 물들었다.
이성이 수면으로 떠오르기가 무섭게 수도 없이 많은 감정의 파문이 해일처럼 비앙카에게 몰아닥쳤다. 비앙카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카리가 죽었다니…. 나는, 나는 성인이 아니던가.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그가 죽은 거지? 내가 더 뭘 했었어야만 했어?
비앙카는 자신이 지금껏 했던 일을 곱씹고 또 곱씹었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자신은 자코브의 마수에서 자카리를 구해내지 못했다. 성기사단도, 왕족과의 인연도 모두 부질없는 발버둥이었을 뿐이다.
허탈한 무기력함이 그녀를 잠식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하지?’
비앙카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코브가 그녀의 안전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 말에 따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고려 대상조차 아니었다. 되레 그의 목을 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보았던 미래와 달리, 이제는 그녀를 아르노 영지에서 쫓아낼 명분이 없다. 집사인 뱅상도 그녀를 배신할 생각이 없고, 자카리의 유언장의 존재도 알고 있다.
아직 아버지와 조아생도 살아 있고, 왕녀인 오델리와도 친분이 있다. 조금이나마 마음을 터놓게 된 친구 카트린도 있으니, 설령 아르노가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예전처럼 수도원에서 뼈가 시린 추위 속에서 덜덜 떠는 비참한 인생을 보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비앙카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녀가 놓쳐버린, 자카리와의 미래가 자꾸만 생각났다.
자카리와 그의 아이를 키우며 함께 살아가는 삶은 행복했을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녀가 그린 미래에는 항상 자카리가 함께하고 있었다.
“하, 하하….”
비앙카는 웃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은 웃음이라기보다는 건조하게 바싹 메마른 울음에 가까웠다. 그녀의 웃음은 이내 꺽꺽이는 숨넘어가는 소리로 뒤바뀌었다. 가슴이 죄는 고통. 비앙카는 금방이라도 소리 내어 오열하고 싶은 마음을 이를 악물고 참아냈다.
이제 지쳤다.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어. 미래고 뭐고, 아무 의미도 없어….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비앙카의 가는 손가락이 이불을 그러쥐었다. 마치 의지를 다잡는 듯이.
여전히 전쟁은 진행 중이었고, 자카리가 죽었으니 자코브는 더더욱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길고 지루한 전쟁이 될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싸워야 했고, 이겨야 했다. 그렇게 버티고 버텨서, 자카리의 장례를 치러야만 했다.
영주의 장례를 치르는 것은 영주 부인의 의무였다. 그녀가 아니면, 자카리의 시체는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세브랑의 어디 한구석에 홀로 묻히게 될 것이다.
그의 용감했던 전적을 찬양하는 비석조차 없이, 외롭고 쓸쓸히….
그녀가 보았던 꿈속에서는 자카리가 죽고 어떻게 되었더라. 뱅상이나 세 부장 중 하나가 어떻게든 시신을 수습했을 것이다.
그제야 비앙카는 자신이 과거, 자카리의 시체가 묻혔던 곳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의 그녀는 그토록 잔인하고 무심한 여자였다.
이번 생 또한 그럴 수는 없어. 정말, 죽고 나서 자카리를 볼 염치가 없다.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잔뜩 버석해진 입술이 갈라지며 터진 피가 흰 이를 붉게 물들였다.
‘그대는 항상 내 아내였소, 비앙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상대는 그대뿐이었고, 내가 사랑한 상대도 그대뿐이지.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사랑을 모를 것이오.’
“저도 마찬가지예요, 자카리…. 나는 항상 당신의 아내였죠. 그건 앞으로도 다를 바 없어요.”
비앙카가 작게 미소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연록빛 눈동자는 생기를 잃고 죽어 있었지만, 최후의 발악이라도 하듯 형형하게 빛났다.
이번만큼은 부끄러운 이가 되지 않으리라. 떳떳하게, 그에게 당당하게….
그렇게, 그녀가 해내야만 하는 마지막 임무와 의무, 모든 것을 다 끝내고 나면….
비앙카는 미소 지었다.
이번 생에는 제대로 결혼 장사를 해 보려고 했다.
지참금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한 채 쫓겨나는 게 아니라, 그가 죽은 뒤에도 어떻게든 지참금을 두둑이 챙겨 재혼하려고. 혹은 어엿한 아르노가의 후계자를 낳아 내 권리를 다 누리려고.
예전처럼 비참하고 서러운 마지막을 보내는 게 아니라 이기적으로, 사치스럽게 살려고….
하지만 그에게 이토록 빠져버릴 줄은 몰랐다. 그녀가 아득바득 노력해서 손에 쥔, 아직 손아귀에 남아 있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싶을 정도로.
아아. 이번 생의 결혼 장사는 단단히 망했다.
비앙카는 자조했다. 금방이라도 훌훌 날아 자카리에게로 갈 것 같은, 아스라한 미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