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71화 (171/192)

#171 유리병 속 나비(7)

최근 들어, 비앙카는 좀처럼 식사를 하지 못했다. 유난히 속이 역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입이 짧아 잘 먹지 않는 편이다 보니, 딱히 의아할 일은 아니었다. 길어지는 전쟁으로 인한 심적 부담 때문이 분명했다.

다만 전쟁 중인지라, 비앙카의 체력이 버텨낼까 걱정될 뿐이었다.

“마님, 그래도 조금은 드셔야 힘이 나지요.”

“되었다. 괜히 힘들게 먹었다가 얹히기라도 하면 더 큰일이다.”

이본느의 애달픈 간청에도 비앙카는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자기 몸은 자기가 제일 잘 아는 법이다. 분명 한술 뜨기가 무섭게 구역질이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비앙카의 요리를 하라며 안 그래도 없는 손을 들들 볶을 수는 없지 않은가. 차라리 굶는 쪽이 속 편했다.

그래도 조아생의 참전으로, 가스파르의 부상에 대한 부담감이 한결 덜어졌다. 여차할 때 믿고 맡길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심리적인 안도감이 들었다. 그건 가스파르 또한 마찬가지인지, 성벽 위를 오가며 명령하는 가스파르의 발걸음이 주저 없었다.

비앙카는 성벽 위에서 가스파르와 함께 자코브군을 막아내는 조아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가 그토록 막고자 했던 조아생의 참전이, 그녀의 영지에서, 그녀 때문에 일어나게 될 줄이야….

여전히 비앙카는 조아생이 이번 전쟁에서 죽을까 전전긍긍했다. 조아생이 그저 자카리의 죽음 뒤 비앙카의 신변을 맡아줄 보호자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많은 것이 바뀌었고, 비앙카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그녀는 자카리의 죽음을 가볍게 입에 올리지 못했고, 조아생을 살리고자 하는 것도 뭔가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사랑하는 오라버니이기에.

조아생뿐만이 아니었다. 이본느, 가스파르, 뱅상…. 그 누구의 죽음이 기껍겠는가? 비앙카는 모든 죽음이 두려웠다.

니콜라의 목숨은 괜찮은가? 그녀의 말을 관리하는 마부는? 레이스를 가르쳐 준 하녀는? 그 하녀의 남편은?

하지만 그렇다 해서 그들 모두를 살리기 위해 전선에서 물러서라 한다면, 이 영지는 누가 지키겠는가?

모든 이들이 자신의 죽음을,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싸우고 있다. 전쟁의 원흉이 바로 비앙카 그녀임에도, 그들은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영지와 그녀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다….

그들에게 보답하는 것은, 비앙카가 영주의 대리인으로서 자카리의 명예를 위해 앞장서 저들에게 대적하는 것이었다.

비앙카는 타인의 목숨의 소중함을 깨달았고 그와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목숨을 내걸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본인의 목숨이라 하여 다를 것은 없었다.

지금껏 그녀는 미래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보아라! 결국 고티에는 죽었고, 그녀는 생각지도 못한 침략을 받았다. 무엇 하나 그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일이 없었다.

미래는 마치 모래를 손으로 움켜쥐려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미래는 그녀의 통제에서 벗어나 손가락 사이로 흘러 내려가며, 그녀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은 무척 소수일 뿐. 게다가 그녀가 바라는 모래알을 움켜쥔다는 보장도 없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무력한 인간일 뿐이다. 미래를 안다 하여 신이 된 것이 아니니만큼, 모든 미래를 통제하려 하는 시도는 오히려 그녀의 발목을 붙잡았다.

어떻게 해야 옳은 길로 갈 수 있을지 제자리에서 생각을 곱씹고 또 곱씹고만 있는 것보다, 한 발짝이라도 앞을 향해 걸어 나가는 쪽이 낫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러니 그녀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그저, 현재를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발버둥뿐이었다.

* * *

자코브는 끈질기게 저항하는 아르노군을 보며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굳건한 성벽은 도저히 뚫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 비앙카가 이렇게까지 버틸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에 치솟는 것은 감탄이 아닌 분노였다. 비앙카가 이렇게 발버둥 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카리에 대한 믿음? 아니면 자코브에 대한 거부? 어느 쪽이든 그의 신경을 거스르기 충분했다.

‘그래, 좋아. 어디까지 하나 보자고.’

자코브는 씨근덕거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아르노의 드높은 성벽을 무너트리고, 그녀를 품에 안을 생각을 하면서.

그때, 전령이 자코브를 불렀다.

“저하.”

“무슨 일이냐.”

“위그 자작이 돌아왔습니다.”

자코브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자코브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곤 전령의 뒤를 바라보았다. 자코브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그 자작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라 하라.”

자코브의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전령이 위그 자작을 데려왔다. 위그 자작의 뺨은 상기되었고, 입꼬리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씰룩였다.

“어떻게 되었느냐?”

전쟁의 아우성이 공간을 잡아먹었다. 귀를 찌를 듯한 함성과 병장기의 부딪힘, 투석기가 돌을 쏘아내는 소리…. 위그 자작의 목소리가 소란에 먹혀 사그라졌다.

“…합니다.”

제대로 들렸을까 싶을 정도로 시끄럽고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자코브는 위그 자작의 보고를 똑똑히 들었다. 자코브의 입가가 들썩이며, 기이하게 올라갔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 * *

자코브의 전령이 아르노 성을 찾아왔다.

휴전을 제의할 리는 없고…. 도대체 무슨 꿍꿍이가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비앙카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령은 뻣뻣한 태도로 비앙카에게 서신을 건넸다. 비앙카는 서신에 오물이라도 묻은 듯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서신을 만지기도 싫었던 그녀는 이본느에게 고갯짓했다. 눈치 빠른 이본느가 재빠르게 움직여 대신 서신의 봉인을 풀었다.

이본느는 비앙카가 서신의 내용을 잘 볼 수 있도록 펼쳐 주었다. 비앙카는 고개를 치켜든 채 눈만 슬쩍 내려 서신을 읽었다.

-사랑하는 비앙카, 전쟁 속에서 안녕한가. 아름다운 그대가 피폐한 전쟁 속에서 하루하루 시들어 갈 것을 생각하니 내 마음이 아프군. 그대는 참으로 고집쟁이야. 그대가 얼른 내 품에 안기면, 더 이상 밤중에 언제 화살이 쏟아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오.

전문은 시시껄렁한 안부 이야기였다. 이따위 이야기를 하자고 전령을 보낸 건가. 비앙카의 미간 사이에 골이 더욱 깊게 파였다.

이걸 계속 읽어야 하나. 하지만 보통, 서신을 보낸 핵심은 제일 아래에 배치하는 법이다. 비앙카의 시선이 서신을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고도 길게 이어졌다.

-내가 그대에게 한 약조는 모두 진심이오. 하지만 내가 이렇게 달콤한 말로 그대를 설득하여도 그대는 쉽사리 고집을 꺾지 않을 테지. 혹시 아르노 백작에 대한 의리 때문에 그러는 것이오? 하지만 걱정 마시오.

비앙카의 심장이 두근거렸다. 허공에서 땅바닥으로 추락하는 듯한 느낌. 장갑 안쪽 비앙카의 손끝이 차게 식었다. 동상에 걸린 것처럼 느낌이 없이 뻣뻣했다.

비앙카의 불안은 고스란히 밖으로 드러났다. 갑자기 안색이 달라진 비앙카의 모습에 이본느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녀의 기색을 살폈다.

비앙카는 다급히 이본느의 손에 들려 있던 서신을 낚아챘다. 얼마나 거세게 잡았는지 서신이 구겨졌다. 손끝으로도 잡기 싫어하던 아까와 확연히 다른 태도였다.

비앙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재빨리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내 변경에서 연락을 받았소. 아르노 백작의 부고였소.

뭐?

비앙카는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본 것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비앙카는 부고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이 단어에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어지는 자코브의 확언은 그런 그녀의 바람마저 산산조각 냈다.

-백작이 죽었으니, 그대 또한 가문과 그대의 몸을 위탁할 사내가 필요할 것 아니오. 그대에게는 아직 아이가 없고, 그대의 나이는 창창하오.

어차피 블랑쉐포르가에서는 그대를 이용하여 장사를 할 것이오. 그렇다면 이왕지사 그대를 사랑하는, 그리고 고귀한 혈통인 나와 결혼하는 것이 어떻소? 내 그대를 세상에서 제일 고귀한 여자가 되게 해주리라.

그대가 나와 재혼해 준다면, 그대의 친정인 블랑쉐포르가에게도 좋은 일일 테니 모쪼록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시오. 내 품은 언제나 그대에게 열려 있소.

그러면, 아르노 백작의 명복을 비오.

멋들어진 자코브의 서명으로 서신이 끝났다. 서신을 전부 읽고 난 뒤에도 비앙카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비앙카의 초점이 흐려지며 서신의 글자가 물에 퍼진 것처럼 사라졌지만, 그 흔적만큼은 또렷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자카리가, 죽었다고? 정말? 아니야, 거짓말이야. 이건 전부 자코브가 나를 흔들기 위한 함정이야….

머리가 멍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 같았다.

거짓말이야….

몸을 가눌 의지조차 사그라진 비앙카의 몸이 휘청였다. 마치 끈을 잘라낸 마리오네트처럼, 그녀는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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