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유리병 속 나비(6)
하지만 왕녀인 그녀가 움직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왕가의 하인과 하녀들을 움직일 수는 있지만, 단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블랑쉐포르가의 손을 빌렸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들은 아르노 영지가 침범당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아생은 비앙카를 안심시키려는 듯 덧붙였다.
“왕녀님께서 라호즈 성을 탈탈 털어서라도 자코브와 아라곤과의 내통 증거를 찾아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 하셨단다.”
“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필요해요.”
오델리 왕녀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으로 한시름 놓기는 했지만, 여전히 초조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자코브가 왕가에서 쫓겨나야, 아르노 영지를 침범한 죄에 대해 아르노가에서 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만약 시기가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이번 전쟁의 판결은 왕이 내리게 된다.
그러면 자코브를 수도로 이송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그가 비겁한 수를 쓸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왕가의 판결 후 자코브가 도주하기라도 하면…. 화근을 남겨 두는 일이다.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했다.
비앙카가 어떤 생각으로 자코브의 반역을 알린 것인지, 오델리 또한 비앙카의 속셈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현명한 여자니까. 자코브가 왕위에 오르면 오델리부터 수도원에 처넣을 테니, 그녀 또한 자코브가 왕이 될 가능성을 아주 뿌리 뽑는 것이 속 시원할 터였다.
오델리가 작정하고 자코브의 흔적을 샅샅이 뒤진다면, 뭐 하나 정도는 발견될 것이다. 그것이 아라곤과의 내통 증거이든, 아니면 고티에 암살에 관한 증거이든.
지금의 비앙카로서는 오델리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 * *
위그 자작은 일부러 그들의 탁자에 레이스를 남겨 두고 막사를 나섰다. 레이스를 남겨 둠으로써 그들을 심란케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투박한 탁자 위에 놓인 섬세한 레이스가 참으로 이질적이었다.
위그 자작이 무슨 생각으로 레이스를 가져왔는지, 막사에 남아 있던 이들의 눈에 그 속셈이 뻔히 드러났다. 로베르나 소뵈르, 다보빌 백작, 성기사단장 앙리까지도 이것은 함정이 분명하다 입을 모았다.
“수상쩍기 그지없습니다. 아르노 영지에 잘 계실 마님의 손수건이 왜 여기 떨어져 있단 말입니까?”
“마님께서 납치당했다는 상황을 꾸미고 싶었나 봅니다.”
소뵈르가 어깨를 으쓱였다. 앙리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런 식으로 성인의 신변에 대한 불안함을 자극해서 저희를 그쪽으로 꾀어낼 속셈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뻔해서야. 누가 여기에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이렇게 뻔한 수작을 부리니, 오히려 신선하군요. 이 레이스만으로 우리가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니…. 위그 자작의 말은 무시하는 게 어떻습니까, 아르노 백작.”
주변에서 시끄럽게 자기주장을 펼치는 와중, 자카리는 레이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비앙카가 직접 짠 레이스 특유의 섬세한 무늬가 자카리의 투박한 손끝에 고스란히 느껴졌다.
“납치당한 상황을 꾸민 게 아니라, 정말 납치당한 것이라면…?”
자카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지금껏 상대가 무슨 계책을 내놓는다 해도 냉정하게 중심을 잡았던 자카리가 이번만큼은 사정없이 흔들리는 기색을 보였다. 당황한 로베르가 다급히 덧붙였다.
“그럴 리가요. 생각해 보십시오, 백작님. 마님께 무슨 문제가 있었더라면, 가스파르나 뱅상이 서신을 보내도 진즉 보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만약 정말로 이것이 그녀가 떨어트린 손수건이라면….”
자카리 또한 이것이 함정임은 알았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이 레이스 손수건을 간과해 넘길 수 없었다.
아무리 자카리가 사치품에 막눈이라고는 하나, 비앙카가 짠 것과 아닌 것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애초에 그 화려함 자체가 달랐다. 이것은 비앙카가 직접 짠 것이 틀림없다 확신했다.
그 이야기인즉슨, 설령 비앙카가 이 손수건을 떨어트린 것이 아닐지라도 위그 자작이 비앙카의 물건을 빼돌릴 정도로 그녀에게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과연, 그녀라고는 안전할까?
혹시 몰라 영지에 가스파르를 두고 오긴 했지만, 여전히 안심하기엔 불안한 점이 많았다.
자카리를 불안하게 하여 충동질하는 것. 그것이 바로 위그 자작이 손수건을 보여 준 속셈이라는 걸 자카리 또한 알았지만, 쉽사리 마음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자카리의 불안함이 막사 안에 있는 이들에게 전염되었다. 그들은 모두 골몰히 생각에 잠겨 침묵했다.
자카리의 말이 맞았다. 안타깝게도, 그들에게는 이것이 거짓이라는 증거가 없다.
절대 비앙카가 엮이지 않았으며, 영지에 무사히 있을 거라 확신할 수가 없었던 그들의 눈이 흔들렸다. 괜찮을 거라 큰소리쳤다가, 정말로 비앙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무것도 아닐 거라 가볍게 넘기기엔, 저울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의 가치가 너무나 컸다.
성기사단장인 앙리 또한 초조한 기색이었다. 자카리를 구하기 위해 성인의 명을 받고 출전한 만큼, 자카리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는 이번 일에 대해선 적극적으로 반대해야만 했다. 하지만 성인인 비앙카의 안위가 달려 있으니 어찌해야 할지 결정 내릴 수 없었다.
그들은 위그의 말을 무시하는 대신, 다른 타개책을 제시했다.
“위그 자작을 고문해 보는 것은 어떠합니까? 정보를 술술 불어낼 것입니다.”
“오히려 거짓 정보를 줄 수도 있지요. 백작님께서 직접 움직이지 마시고, 군사 몇 명만 추려서 근방을 확인해 보시는 건 어떠합니까?”
여러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자카리는 모든 제안에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불안해할 것이네.”
“하지만…. 함정이 있을 겁니다.”
“나도 알고 있네.”
자카리는 단호히 답했다. 이미 결정을 내린 목소리였다.
비앙카의 안위가 불확실한 것과 달리, 저 손수건을 주웠다 주장하는 곳에 함정이 있으리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위그가 굳이 이런 광대 짓까지 해 가면서 변경에 올 리 없으니까.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는 때때로 함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두 발로 직접 걸어 들어가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자카리에게 있어선 지금 이 순간이 그러했다.
* * *
그들은 결국 위그 자작이 말한 곳을 살펴보자는 결론을 내렸다. 자카리는 위그 자작을 앞세워, 직접 칼리아 숲으로 향했다.
우거진 숲속을 더듬더듬 헤쳐 나가면서, 위그 자작은 자코브의 혜안에 혀를 내둘렀다. 전부 자코브의 말대로 됐다. 이대로 자카리를 처리하기만 하면….
위그 자작은 자신이 백작이 되는 몽상에 빠져들었다.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맞습니까?”
딴생각을 하는 것 같은 위그 자작의 모습에 소뵈르가 이죽거렸다. 대놓고 비꼬는 그의 건방진 말투에 위그 자작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고작 평민 출신 기사 나부랭이가 감히….
“당연히 기억하고말고! 날 어떻게 보고.”
“아니, 처음 보는 길을 가는 것 같아 보여 걱정했을 뿐입니다. 뭘 그리 발끈하십니까?”
소뵈르가 실실 웃으며 능청스레 물었다. 위그 자작은 튀어나오려는 욕설을 애써 억눌렀다. 자칫하다가 자카리나 이들이 이상한 것을 눈치채면 끝이었다. 위그 자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사근사근한 척 답했다.
“걱정 말게. 조금만 더 가면 되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위그 자작은 주변을 흘끔거렸다. 이번 고개만 넘으면, 좁고 험난한 숲길이 길게 이어진다. 바로 군사를 미리 매복시켜 둔 곳이다.
지형적 특성 때문에, 아르노군은 대열을 유지하지 못하고 길게 늘어서게 된다. 아르노군이 어느 정도 숲 속 깊숙이 들어섰을 때, 매복시킨 군사를 이용해 중간에서 허리를 자를 예정이었다.
그리고 아라곤이 뒤에서부터 침공하면 열의 후미는 혼비백산하여 흩어질 테고, 자카리와 소수의 군사만이 고립될 것이다.
그리고 혼란을 틈타 자카리를 암살하는 것이 위그 자작의 목표였다. 아무리 그가 전쟁 영웅이라고는 해도, 이번에는 호락호락 벗어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정말로 이번 계획이 잘 될까? 불안함을 지울 수 없었던 위그 자작은 뒤에 오는 자카리를 흘끔 바라보았다.
묵묵히 말을 몰고 있는 그의 낯짝은, 마치 네 속셈 따위는 다 알고 있다는 듯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들킨 건 아닐까?’
식은땀 한 줄기가 위그 자작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숨이 막힌다. 위그 자작은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내 착각일 뿐이야. 저 자식의 낯짝은 항상 저랬어. 지금 태연해 보이는 것도, 아무것도 몰라서 그러는 거겠지.’
자카리는 어렸을 때부터 저랬다. 위그 자작이 그를 못살게 굴어도 비명 한번 내지르지 않고, 서늘한 검은 눈동자로 그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너 따위와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그 눈동자 앞에 서면, 위그 자작은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불쾌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다.
‘제 잘난 맛에 사는 역겨운 자식.’
어렸을 때의 일을 떠올린 위그 자작의 속이 다시 활활 타올랐다. 그래. 이제 우리의 악연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때다. 위그 자작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