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69화 (169/192)

#169 유리병 속 나비(5)

하루가 길고 길었다. 어둠이 내려앉고, 일시적으로 전쟁은 소강상태가 되었다. 병사들은 이 틈을 타 쪽잠을 잤다. 하지만 자면서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만큼, 몸에 켜켜이 쌓인 피로가 완벽하게 해소되지는 못했다.

가스파르가 투구를 벗기가 무섭게, 비앙카는 뱅상을 시켜 가스파르를 살펴보게 했다. 어느 정도 의학적 지식이 있던 뱅상은 꼼꼼히 가스파르의 상태를 살폈다.

“이마의 상처는 생각만큼 심하지 않지만, 어깨는…. 당분간 오른팔을 쓸 수 없을 겁니다. 뼈가 탈골되었어요.”

뱅상은 쯧, 혀를 차며 가스파르의 팔을 붕대로 단단히 동여맸다. 다친 부위를 붕대로 꽉 죄니 고통스러울 텐데도, 가스파르는 미동도 없이 무뚝뚝이 답했다.

“지휘하는 데는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백작님이 돌아오시려면 아직 한참 남았고…. 그동안 한쪽 팔만으로 버틴다는 것은 무척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전선에서 이탈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현재 아르노에는 저를 대신할 사람이 없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전황이 근접전까지 번지기는 아직 멀었으니까요.”

뱅상의 걱정에도 가스파르는 단호했다. 뱅상의 주름진 뺨이 씰룩였다. 가스파르의 부상을 생각하면 그를 말려야 했지만, 가스파르의 말대로 그를 대신할 사람이 없었다. 쉬어야만 한다 강하게 말 못 하고 그가 전쟁에 나서는 걸 바라만 봐야 하는 이 상황이 무척 안타까웠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건 뱅상뿐만이 아니었다. 가스파르가 치료받는 것을 확인하고 있던 비앙카의 안색이 어두웠다. 비앙카는 가스파르의 팔을 동여맨 붕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녀 때문이다. 비앙카의 손이 치맛자락을 쥐었다.

“내가…. 괜히 돌아다녀서, 그래서.”

“아닙니다, 마님.”

뱅상이 황급히 부정했다. 전쟁이 시작한 이래, 뱅상은 비앙카에게 거듭 놀라고 있었다. 솔직히 뱅상은 비앙카가 안전한 곳에서 가만히 몸을 피한 채, 평소와 같은 생활을 누리고 싶다 주장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무척 고마웠을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손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전쟁터를 누비는 그녀를 바라보는 아르노 영지민들의 두 눈이 휘둥그레 했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힐 일 없는 귀한 신분의, 심지어 성인이기까지 한 그녀가 고생하는 모습은 아르노 영지민들의 사기를 들끓게 했고, 전쟁의 분위기를 고취시켰다.

더불어 그녀의 예리하고도 날카로운 판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도 몇 차례나 되었다. 그는 어린 마님이 이렇게까지 전쟁에서 잘해 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영주의 대리자로서 더할 나위 없을 귀감이었다.

그리 생각하는 것은 가스파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비앙카를 바라보는 가스파르의 눈이 곧았다.

“마님은,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잘 해내고 계십니다. 그런 마님을 보필하는 것이 저희 가신들의 의무.”

가스파르는 붕대에 감긴 제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아리며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 손으로 자신이 지켜낸 것을 생각하면, 상처를 입은 것이 전혀 후회되지 않았다.

가스파르는 다시 비앙카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리고, 이본느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봤구나. 하도 정신없던 찰나라 거기까지는 모를 줄 알았다. 비앙카는 그건 당연한 거라고, 나에게도 이본느는 소중하다고 말하려 입을 열었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언가가 그녀의 목에 콱 틀어박혔다. 비앙카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울컥 치미는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당시의 비앙카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눈매가 괜스레 달아오르는 기분에 침묵한 채 눈에 힘을 줄 뿐이었다.

그건, 그녀가 처음으로 제 손으로 무언가를 해냈다는 성취감, 그리고 인제야 진정한 아르노 백작 부인으로 인정받았다는 자부심이었다.

과거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과거에서는 그리도 바랐던.

* * *

나쁜 일이 생기면, 좋은 일도 뒤따르기 마련이다. 가스파르의 부상으로 전전긍긍하기도 잠시, 뜻밖의 지원군이 찾아왔다. 바로 비앙카의 오라버니, 조아생 드 블랑쉐포르였다.

지원군이 누구인지 깨달은 비앙카는 재빨리 옆 도개교를 내리라 하여 그들을 성안으로 받아들였다.

“비앙카!”

“오라버니!”

남매는 마주치기가 무섭게 서로를 끌어안았다. 젊고 잘생긴 기사는 누이의 영지가 침략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하여 황급히 말을 몰았는지, 흰 뺨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채였다. 그는 비앙카를 살피며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으냐? 어디 다친 데는 없고? 네 꼴이 이게 무엇이냐?”

“영지가 침략당한 걸요. 영주 부인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요.”

조아생은 그런 비앙카가 기특했지만, 동시에 안타깝기도 했다. 항상 귀한 것만을 걸친 채, 먼지가 이는 곳에는 발걸음도 안 하던 아이가 지금은 너덜너덜한 소매와 얼룩진 치맛단으로 그를 맞이하는 모습이 마음 시렸다.

“오라버니야말로, 알베르 왕세손은요? 안전한 거예요?”

“아버지가 계시니 걱정 말아라.”

“하지만 아버지는.”

귀스타브에게 호위를 맡기기엔, 그의 나이가 나이였다. 더군다나 그는 문관이지 않던가. 검을 잡지 않은 지 벌써 수십 년이었다.

비앙카는 불안스레 조아생이 끌고 온 군을 살폈다. 그리 많은 인원수는 아니었고, 기사는 조아생과 그의 종자였던 다른 기사 단둘뿐이었다. 아마 남은 군사와 기사들은 알베르 왕세손을 지키고 있을 테지만, 불안한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걱정 말아라. 알베르 왕세손께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아버지도, 나도 잘 알고 있으니까.”

“혹여나 왕세손께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우리 가족은 이 선택에 후회하지 않을 거란다, 비앙카. 우리는 더 이상 너를 잃을 수 없어!”

조아생이 단호하게 외쳤다. 그들은 이미 어리석은 선택은 여러 번 했다.

비앙카를 아르노가와 결혼시키고 난 뒤, 그들은 의도적으로 비앙카를 외면했다. 어차피 연락해 봐야 울고불고한다는 소식만을 들을 게 뻔하기 때문이었다. 아르노 백작은 믿을 만한 사내이니 비앙카를 잘 보살필 거라며 믿고 넘기는 쪽이 마음 편했다.

그 결과가 어떠했던가? 뒤늦게 비앙카를 만나려 했으나, 그녀에게 외면받을 뿐이었다. 관심에는 관심을, 외면에는 외면을. 인과율에 의해 비앙카를 잃을 뻔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편이 지끈거렸다.

그와 같은 일을 번복할 수 없다. 더군다나 이번엔, 정말로 목숨이 위태한 순간이 아니던가.

입을 딱 다물고 비앙카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비앙카가 고집을 부릴 때와 똑 닮아 있었다.

가족과 화해했다 하나, 마음속 깊은 곳에 아주 조금 남아 있던 응어리가 삽시간에 전부 풀어졌다. 자신을 바라보는 연록빛 눈동자에서 뭉클함을 느낀 비앙카의 눈가가 발개졌다.

요즘 눈물샘이 약해졌나 보다. 이래서야 자카리가 맨날 운다고 해도 반박할 말이 없겠는걸. 비앙카는 울컥 치솟는 눈물을 꾹꾹 누른 채, 의아했던 것을 물었다.

“제가 블랑쉐포르가에는 연락하지 말라 했는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오델리 왕녀님이 알려주셨지.”

“!!”

뜻밖의 인물의 등장에 비앙카가 눈을 크게 떴다. 안 그래도 오델리 왕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찰나였다. 조아생은 살짝 웃으며 어린 여동생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네가 보낸 서신을 받으신 오델리 왕녀님은 바로 나와 아버지를 불렀단다. 그분 혼자만의 힘으로는 힘들다고 판단하셨기 때문이지.”

비앙카가 보낸 서신에는 자코브에 의해 아르노 영지가 침략당한 현 상황과 자코브와 아라곤 사이의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에 대해 적혀져 있었다.

비앙카가 원한 것은 지원군이 아니었다. 지금 수도는 군사를 섣불리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오죽하면 알베르 왕세손의 호위를 블랑쉐포르가에게 따로 부탁했겠는가.

비앙카가 오델리에게 부탁한 것은, 바로 자코브와 아라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증명할 증거를 찾아 왕을 설득하여, 자코브를 왕실에서 내쫓는 것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그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얻는 것에 가까웠다.

귀족은 왕족을 죽일 수 없다. 자카리에게 부득불 그를 전쟁 중에 암살하라 말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암살과 같이 몰래 죽이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에겐 자코브를 죽일 명분이 없다. 그가 아르노 영지를 침범했더라도.

이 전쟁이 아르노군의 승리로 끝나고, 자코브를 사로잡게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왕족이었고, 왕족의 판결은 왕이 내린다. 만약 거기서 자코브가 입바른 소리로 변명을 한다면….

최근 이미 한번 아들을 잃은 왕은 불안하고 변덕스러웠으며 감정적이었다. 남은 아들마저 죽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가 측은지심을 발휘하지 않을 거라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라곤과의 내통 증거가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요 몇 년간 아라곤의 기묘할 정도로 집착적인 침공이 자코브 때문이라는 것을 밝히게 되면, 아무리 왕이라 할지라도 자코브를 옹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역시 변수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를 비롯한 귀족들이 움직였다가는, 어린 알베르를 허수아비처럼 휘둘러 권력을 잡기 위해 자코브에게 누명을 씌운다는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잘못했다가는 반역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는 법이었다.

그렇기에 오델리가 나서야 했다. 그녀는 왕가의 사람이었고, 왕이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딸이었다. 그녀의 말이라면 믿을 것이고, 자코브를 왕가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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