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유리병 속 나비(4)
‘과연. 그 남자가 쓸 만한 계책이네.’
비앙카의 입술이 비틀렸다. 만약 이 쥐들이 영지에 풀렸더라면,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방화한 뒤 쥐를 풀어, 양쪽에서 도시를 교란할 생각이었던 모양이었지만, 이쪽에서 이렇게까지 밀정의 존재를 빨리 깨닫고 움직일 줄은 몰랐을 것이다. 이번 참사를 막아낸 것은, 전적으로 이본느의 공이었다.
주변 영지민들의 살기 어린 눈빛이 상인을 향해 쏘아졌다. 몇몇 혈기 넘치는 이들은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당장 칼로 목을 내려쳐야 합니다! 어디 불을 지르고 쥐를 풀려고!”
“주인이 있는 쥐새끼는, 주인에게로 돌려보내 줘야겠지.”
비앙카는 턱 끝을 치켜든 채, 조용히 말했다. 비앙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두가 숨을 죽이고 이어질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만 같아서는 저 쥐들을 성벽으로 내던지라 하고 싶었지만, 성벽 너머 또한 아르노 영지였다. 지금 적들이 있다고는 하나 괜히 전염병이 돌기라도 하면, 훗날 그로 인해 홍역을 치르는 것은 그들이 될 것이다. 성질대로 할 수 없었던 비앙카는 쯧, 혀를 찼다.
“저자를 성벽 밖으로 내던져 버려라.”
“마님, 살려주십시오, 마님!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전부 말하겠습니다!”
상인은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비앙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잡혔다고 비밀을 술술 불려는 자에게 자코브가 무슨 정보를 알려주었겠는가? 어차피 쓸모없는 것들일 뿐이다.
비앙카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병사들이 발버둥 치는 상인을 번쩍 들어 성벽으로 끌고 갔다. 상인은 필사적으로 뒤를 돌아보며 비앙카를 부르짖었다.
“마님! 마님!”
“쥐들이 병을 옮기지 않게 확실히 처리하거라.”
멀어지는 상인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비앙카는 다른 병사들에게 단단히 말했다.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만큼, 쥐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한시름 던 비앙카는 한숨과 함께 몸의 긴장을 풀었다. 내색은 안 했지만, 혹여 일이 잘못되기라도 할까 걱정한 것 때문에 몸이 뻣뻣이 굳어 있었다.
가는 몸이 작게 휘청이기가 무섭게, 이본느가 냉큼 다가오며 그녀를 부축했다. 이본느는 비앙카의 눈치를 보며 슬쩍 물었다.
“쥐를 풀 거라는 걸 알고 계셨어요?”
“아니. 하지만 불만 지르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지.”
비앙카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비앙카와 이본느는 다시 성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지민들은 다들 경외의 시선으로 비앙카를 흘끔이며 길을 비켜 주었다.
“전부 네 덕이다. 나중에 전쟁이 끝나면, 너에게 상을 내려 줘야겠구나.”
“상은 됐으니, 전쟁이나 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마님.”
“그건 나도 마찬가지로구나. 자, 이렇게 쉬고 있을 틈이 없다. 얼른 돌아가자, 이본느.”
비앙카와 이본느는 가벼운 대화를 나누며 발을 재촉했다.
한차례 위기를 막아내긴 했지만, 언제까지고 승리의 기쁨에 젖어 들어 있을 수는 없었다. 위기는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위태한 상황 속에서, 비앙카는 정신을 단단히 붙든 채 숨을 들이켜고는 앞만을 내다보았다.
한 달 반. 자카리가 돌아올 그때가 너무나 멀고 멀었다.
* * *
전쟁은 일촉즉발로 치달았다. 뒤늦게 투석기를 구해 왔는지, 자코브군은 성벽 안으로 돌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투석기로 돌만 던지면 다행이었다. 가끔은 시체나 동물의 사체 등을 함께 던지기도 했다. 하늘 높이 던져진 시체가 돌바닥에 떨어지며 역겨운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가는 꼴은 썩 보기 좋은 편이 아니었다.
거기다가 비위생적이기까지 했다. 쥐를 풀려고 했던 것처럼, 갖은 수단을 가리지 않는 자코브군의 행태에 아르노군은 오히려 오기가 났다.
계속해서 하늘에서 투석물이 떨어져 내리자, 비앙카나 이본느처럼 무장하지 않은 이들이 삽시간에 위험해졌다. 가스파르가 다급히 외쳤다.
“마님, 지금은 일단 성안으로 들어가 계십시오!”
“알았네.”
고집을 부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비앙카는 군말 없이 냉큼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녀의 앞을 떨어져 내리는 투석물들이 가로막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비앙카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님, 이쪽으로!”
먼저 용기를 낸 것은 이본느였다. 비앙카보다 한발 앞서서 길을 뚫은 채 비앙카를 향해 손짓했다.
비앙카가 이본느의 뒤를 따르기 위해 무거운 발을 들어 옮긴 순간, 그녀는 하늘에서 이본느의 머리 바로 위로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를 보았다. 저걸 그대로 맞으면 즉사가 분명했다.
“안 돼!”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외쳤다. 아까는 꿈쩍도 안 하던 발이 어찌해야 할 바 모르고 제멋대로 움직였다. 다급하게 땅을 박차면서 느껴지는 진동이 몸을 울렸다.
시녀를 위해 목숨을 거는 주인이라니. 예전의 그녀가 들었다면 가당치도 않다며 코웃음 쳤을 일이었다. 그녀 본인이 이렇게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비앙카는 이본느의 죽음을 그대로 두고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비앙카는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이본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조금만이라도, 그녀 쪽으로 잡아당기면.
“이본느!”
아직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본느가 멍하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갑자기 제 이름을 부르며 헐레벌떡 달려오는 상전의 모습에 어리둥절한 것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비앙카는 이를 악물고, 이본느의 손을 훽 하니 잡아당겼다. 그녀보다 손 반 뼘 정도 큰 이본느의 몸이 휘청이며 비앙카를 향해 기울어졌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비앙카의 뺨 위로 자잘한 돌조각이 튀었다. 느릿하게 날아오는 돌덩이는 정확히 그들을 향하고 있었다.
아니, 느릿해 보일 뿐이었다. 마치 주마등처럼. 비앙카는 그것을 피하지 못할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뒤늦게 상황을 깨달은 이본느가 당황하며 비앙카를 품에 끌어안았다. 하녀 일을 하느라 억세진 손아귀 힘이 비앙카를 꿈쩍도 못 하게 단단히 고정했다. 그리고는 그대로, 이본느는 비앙카를 감싼 채 바닥에 웅크려 앉았다.
“이본느!”
“꺄악!”
이본느의 비명이 비앙카의 귀청을 울렸다. 돌을 맞은 이본느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지금은 손으로 비앙카를 단단히 고정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손에 힘이 빠지고 그대로 바닥으로 고꾸라지게 될 것이다….
끔찍한 미래가 다가오기만을 무력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분했다. 어찌나 입술을 꽉 깨물었는지, 비앙카의 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이본느의 손은 여전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비앙카의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녀의 거친 숨결도 그대로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비앙카는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와 이본느의 위를 덮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
은빛 갑옷 뒤로 비치는 햇빛이 눈을 찌르며 상대의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이런 커다란 덩치가 영지에 둘 있을 리 없었다….
“가스파르!!”
“괜찮, 괜찮으십니까, 마님…?”
날아오는 돌덩이에게서 비앙카와 이본느를 구해낸 것은 바로 가스파르였다. 이본느를 구해냈다는 안도감도 잠시였다. 갑옷을 입고 있었다고는 하나 육중한 돌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내었으니 멀쩡할 리가 없다. 비앙카는 다급히 물었다.
“나야 괜찮네. 자네는? 자네는 괜찮은가?”
“어서 들어…. 들어가십시오, 마님. 이본느, 마님을 서둘러 안으로.”
그는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고 평소와 같은 표정으로 이본느를 재촉했다. 하지만 안색은 확연히 좋지 않았다. 숨을 단번에 가득 들이켜 허파에 공기가 가득 찬 듯, 어딘가 새어 나간 목소리 또한 평소의 묵직함과는 달랐다.
이본느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듯 차올랐지만, 이본느는 슬픔을 토해내는 대신 비앙카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른 가요, 마님.”
“가스파르 경, 당장 상처를 확인해야 하네.”
비앙카가 고집을 피웠다. 가스파르를 제일 걱정하는 것은 이본느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에게 전쟁터의 책임을 고스란히 지운 채 저 혼자 몸을 피할 수는 없었다.
“저는 성을 지키는 기사고,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이 정도 상처로 전선을 이탈할 수 없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가스파르는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여전히 얼굴은 미동 없이 무뚝뚝한 채였다. 크게 숨을 내쉰 가스파르는 다시 한 번 차근차근, 그러나 다급히 비앙카를 설득했다.
“마님마저 다치시면 제가 백작님 뵐 낯이 없습니다. 어서!”
보다 못한 이본느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비앙카의 어깨를 끌어안은 이본느는 억지로 잡아끌듯 그녀를 성안으로 데려갔다.
“가스파르 경의 말이 맞아요. 얼른 들어가요, 마님.”
울음을 애써 삼키는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비앙카는 어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이런 상황에서 몸을 피하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자기 자신의 무력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가스파르는 이본느가 비앙카를 데리고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지켜본 뒤, 전선으로 돌아갔다. 뒤돌아선 가스파르의 이마에 뒤늦게 피가 비쳤다.
아까 비앙카와 이본느 앞에서 피가 흐르지 않아 다행이다. 이본느에게 걱정거리를 하나 더 얹어주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마님이 치료를 해야 한다며 더욱 고집을 부렸을 테니까. 가스파르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그가 해낸 것을 생각하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의 손으로 구해냈다.
비앙카와 이본느 단둘이 있을 때, 자코브가 이본느를 때리는 바람에 그녀가 한참 앓은 일이 있었다.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뱃속에서 불이 끓었다.
그가 두 눈 뜨고 있는 한, 두 번 다시 이본느가 다치는 일은 없게 할 거라 다짐했던 만큼, 지금 그의 마음은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과 성취감으로 그득했다. 가스파르는 손등으로 이마의 피를 훔쳐내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시체를 섞어 던지는 걸 보아하니 저들이 던질 수 있는 돌이 다 떨어지는 모양이다! 조금만 더 분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