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61화 (161/192)

#161 비앙카의 의무(2)

소식을 들은 자코브는 너무 기가 차, 숨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동시다발적인 아라곤의 총습격, 깜깜무소식인 지원…. 그렇게도 자카리의 발목을 잡으려 이중 삼중으로 방해물을 쳐 놓았는데, 성기사단의 개입이라니!

하지만 그에게 날아온 소식이 성기사단의 참전과 연이은 자카리의 승전뿐이었다면, 그저 징그러울 정도로 끔찍한 놈이라 이를 갈았을 뿐, 이렇게까지 뒤통수를 망치로 내려친 듯한 배신감에 몸을 떨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기사단의 개입을 막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누군지 찾아내려 노력했던 성인이 바로 비앙카였다니. 허탈함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자코브는 눈을 감고 비앙카의 모습을 떠올렸다. 이목구비가 오밀조밀 들어찬 흰 얼굴은 그를 볼 때만큼은 놀랍도록 딱딱했고, 얼핏 적대감마저 서려 있었다.

비앙카는 세브랑의 전형적인 미인과는 사뭇 다른, 새끼 고양이 같은 매력이 있었다. 자코브는 그녀에게 첫눈에 홀렸다.

하지만 이따금 문득,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되돌아보게 될 때가 있었다. 그녀의 그 어디가 그리도 특별하여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단지 외모가 취향이라? 그 때문에 이렇게나 그녀를 갖고자 하는 욕망에 휘몰아친다고?

자코브는 자신이 그리 호락호락하고 나태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가 자각하지 못한,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어쩐지 그 여자가 그리도 탐이 나더라니. 그의 본능이, 그녀의 특별함을 일찍이 눈치챈 것이었다.

역시. 그는 왕이 되도록 신에게 선택받은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토록 그녀에게 끌렸던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자카리가 더욱 거슬렸다.

‘그자만 없었더라면…! 그자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야. 아마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걸 알고, 그녀에게 성기사단을 보내 달라 강요했겠지. 아내의 힘을 빌리는 영웅이라니, 자존심도 없나 보지?’

하지만 자코브에겐 자카리를 탓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거듭되는 패배. 거기다 성기사단까지 끼어드니, 고티에의 죽음으로써 간신히 독려한 아라곤이 다시 슬금슬금 발을 빼려고 했다.

그들은 역시 교단에 반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며 후회의 기색을 내비쳤다. 아라곤 또한 종교를 믿는 국가였다. 그들은 성인이 보호하는 아르노 백작과 성기사단에 대적하는 것에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아무리 세브랑이 욕심난다고는 하나 신에 반발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하여간 우유부단한 놈들…!’

아라곤이 이대로 말 머리를 돌리면 이도 저도 되지 않는다. 자코브라 하여 왕위를 어린 알베르에게 넘겨주려 하는 그의 아버지의 속내를 어찌 모르겠는가? 알베르의 섭정이 되기라도 하면 그나마 다행이지, 만약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앉게 되면….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아마 왕은 교회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라도 자카리를 알베르의 섭정으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두 눈 뜨고 볼 수 없다. 자코브는 어떻게든 아라곤이 공격을 계속하도록 설득해야 했다.

그리고 아라곤을 설득하는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지만, 그 방법은 자코브의 마음에 쏙 들었다.

자코브는 그길로 바로 자신을 따르는 귀족들을 비밀리에 소집했다. 다들 예민하게 밖으로 귀를 내밀고 있었던 만큼, 자코브의 소집에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자코브는 충격적인 제안을 했다.

“아르노 백작의 영지…. 말입니까? 그곳을 치자고요?”

“아르노 백작이 없는, 그의 영지지.”

화들짝 놀라 되묻는 귀족에게 자코브는 명료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대꾸했다. 그의 천연덕스러운 낯에,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서로를 살폈다.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소문은 그들도 들었다. 그런 성인이 있는 곳을 치다니, 성인에게 반할 생각인가? 더군다나 아르노 영지…. 자카리는 현재 영지에 없지만, 그의 존재감과 위명만큼은 영지에 드리워 있었다.

“어차피 아르노 영지에는 군사가 별로 없소. 있는 군사는 모두 아르노 백작이 긁어모아 데려갔으니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요.”

그들의 마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는 자코브가 살살 꼬드기는 목소리로 그들을 달랬다. 자카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나서야 한시름 덜어낸 이들 중 하나가 자코브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 아르노 영지를 치려는 까닭이 무엇입니까, 저하?”

“그의 아내가 성인으로 알려졌다는 것은 모두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오.”

다들 불안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노 백작 부인이 성인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르노 영지를 친다…. 설마 그녀에게 해코지하실 생각은 아니겠지. 그랬다가는 정말로 교단과 전면전이다. 자코브는 왕위를 얻기 전에 교단에 의해 토벌될 게 분명했다.

아무리 자코브의 성정이 다소 자유분방하다 해도 그렇지, 그런 막무가내의 결정을 내리지는 않을 거라 그들은 실낱같은 희망을 걸었다. 영지를 친다는 말에 다른, 비유적인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자코브가 이어 내뱉은 말은 점입가경이었다.

“우리는 그녀를 탈환하려 하오.”

귀족들은 너무 깜짝 놀라면 말이 안 나온다는 것을 그때 경험했다. 밀회장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자코브의 말을 깨달은 귀족들은 기겁하여 너 나 할 것 없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그는 성인에, 신에 반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께서 노하시기라도 하면….”

“성인을 겁박하는 것은 좀….”

“누가 그녀를 험하게 다룬다 하였소? 우리는 그녀를 얌전히 데려올 뿐이오. 그 정도는 신께서도 이해해 주지 않겠소? 그분은 그저, 아르노 백작이 우리에게 칼날을 향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일 뿐이오.”

자코브는 주저주저하며 한 발짝 뒤로 빠지는 귀족들에게 짐짓 엄하게 말했다. 물론 비앙카를 험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그의 말을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자코브의 속셈은 바로 비앙카를 그의 여자로 만드는 것이었으니까.

처음에는 강렬하게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성기사단도 성인을 모욕했다며 들고일어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만약, 비앙카 그녀가 자코브를 옹호하게 된다면?

천만다행으로, 비앙카와 자카리 사이에 후계자는 없다. 그렇다면 자코브가 비앙카를 납치해서 그의 자식을 임신하게 시키면, 자카리가 아니라 자코브의 편을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앙카가 자코브를 싫어하게 될지라도, 그의 아이까지 미워하지는 못할 테니까….

게다가 자카리 또한 다른 사내의 아이를 품은 비앙카를 박대할 게 분명하니, 비앙카가 선택할 수 있는 곳은 자코브의 품속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 뒤, 자카리만 확실히 없앤다면 그녀는 자신의 아내가 될 수도 있다…. 비앙카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고작 백작 부인보다, 왕비가 더 좋은 자리임은 명백하지 않은가?

그렇게 비앙카를 손에 넣게 되면, 성인의 가호를 받는 것은 자카리가 아니라 자코브가 될 것이다. 성기사단도 그의 편을 들어주겠지….

단지 비앙카를 아내로 맞이하게 되면, 아라곤과 했던 약조를 어기게 된다. 처음에는 비앙카를 그저 정부로 삼을 생각이었지만…. 성인인 그녀와 아라곤의 공주. 저울에 재 볼 필요도 없이, 비앙카를 아내로 삼는 쪽이 훨씬 좋다.

상대가 성인이라면, 아라곤 쪽에서도 계약을 어기는 것에 대해 이해해 줄 것이다. 여차하면 다음 대로 결혼을 미루어도 되고.

정 이해해 주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다. 성기사단만 뒷배가 되어준다면야 굳이 아라곤과의 동맹을 지속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아라곤은, 당장 비앙카의 마음을 돌릴 때까지만 동맹을 유지하면 된다. 자코브는 음흉한 속내를 감추고, 짐짓 단호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아르노 백작이 돌아오면, 전쟁을 지원해주지 않은 그대들과 나에게 보복할 것이오. 그는 분명히 우리에게 앙심을 품고 있을게요.”

자코브가 좀 더 강한 어조로 을렀다. 자카리의 보복을 떠올린 가신들이 갈등하기 시작하자, 자코브는 그에 쐐기를 박았다.

“어쩌면 아르노 백작 그자가, 라호즈의 핏줄을 몰아내고 아르노 왕가를 세우려고 작당을 꾀할 수도 있는 노릇 아니겠소? 그렇다면 우리는 끝이요.”

“아르노 왕가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성인의 가문인 블랑쉐포르가야 명문이라 하지만, 끽해야 아르노 백작은 자작가의 둘째. 그마저도 이렇다 할 이름 없는 가문 출신 아닙니까?”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가문이 모욕당하자, 구석에 있던 위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들 중 아무도, 자카리의 배다른 형이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오로지 자코브만을 제외하고.

자코브는 꿍꿍이가 가득한 눈으로 위그 자작을 바라보았다.

장내가 이리저리 소란스러워지자, 자코브가 슬며시 손을 올렸다. 그러자 삽시간에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귀족들의 주의를 끈 자코브는 엄숙히 말했다.

“아르노 백작, 그자는 성인이 아니지. 성인은 그자의 아내일 뿐. 그에게는 어떠한 명분도 없소. 생각해 보면, 성인인 그녀가 남편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는 법 아니오? 그녀가 성인이라지만 아직 어린 아녀자. 남편이 우격다짐으로 하라 하면 그대로 따르는 수밖에 없었겠지. 우리는 그녀가 좀 더 자유롭게 택할 기회를 주는 것이니, 신을 기만하는 것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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