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비앙카의 의무(1)
대주교에게서 확답을 받고 나서도 비앙카는 초조함에 방을 서성였다. 교단 측에서 성기사단을 보내주었다고는 하지만 그녀가 확실히 확인한 것이 없으니, 온갖 불안한 생각이 머리를 뒤덮었다.
하루하루 피가 말라 갔다. 비앙카는 항상 밖의 상황에 귀를 기울이고, 무슨 소식 없냐며 뱅상과 이본느를 닦달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내 연전연승하며 승승장구하는 자카리의 소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게다가 성기사단의 지원 또한 크나큰 화두였다.
성기사단이 손과 발처럼 자카리를 보필하고 있으며, 신의 가호 아래 자카리는 마치 날개 달린 말과도 같이 종횡무진으로 전장을 누빈다는 요지의 이야기가 영웅담처럼 들려왔다.
오래지 않아 아라곤을 세브랑 땅에서 완전히 몰아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찬 관측까지. 그제야 비앙카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녀의 일상이 소란스러워질 또 다른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성기사단이 자카리를 지원하게 된 이유가 바로 성인의 부탁 때문이며, 그 성인이 바로 자카리의 아내인 비앙카라는 소문이 그 소란의 원인이었다.
이 얼마나 로맨틱하고도 성스러운 영웅담인가! 소문이 더 빨리 퍼지지 않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아르노 백작 부부에 관한 이야기가 쉴 새 없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소문은 당연지사 아르노 영지에까지 닿았다. 유난히 그녀를 흘끔거리는 시선. 그녀에게 다가와 말 한 마디라도 붙여 보려고 하는 영지민들. 아직 소문을 듣지 못한 비앙카가 영문 모를 상황에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뱅상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마, 마, 마님! 마님!”
“웬일로 이리 호들갑스러운가, 뱅상? 항시 진중한 그대답지 않은 태도로군.”
“다, 다름이 아니라. 여쭤볼게, 있어서….”
얼마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뱅상의 목소리가 숨이 넘어갈 듯 꼴깍였다. 뱅상의 나이가 나이인지라, 그대로 죽을 것 같았던 비앙카가 그를 만류했다.
“숨 좀 돌리고 말해 보게. 나 어디 도망 안 가네.”
뱅상은 그제야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옆에 있던 이본느가 눈치 빠르게 뱅상에게 물을 가져다줬다. 물을 벌컥벌컥 마신 뱅상은 차분하게 운을 뗐다.
“그, 마님께서 교단과 연결이…. 아니…. 신성한…. 그…. 성인….”
차분한 말은 오래가지 못하고 단어의 나열이 되어버렸다. 떠듬떠듬 나오는 단어들의 조합으로, 비앙카는 뱅상이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비밀에 대한 금언령을 풀게 되면서 이렇게 될 줄은 알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다면 빠르고, 느리다면 느리게 돌았다.
“아아, 어쩐지. 시선이 그 때문이었군.”
“시선이 그 때문이었다, 하고 가볍게 넘기실 일이 아닙니다, 마님!”
비앙카의 긍정에 뱅상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을 딱 벌렸다. 들어도 들어도 믿기지 않는지, 그는 몇 번이고 물었다.
“저, 정말로 마님이…?”
“성인이 나임을 묻는 것이라면, 맞네.”
“정말 그, 성인, 성인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니까.”
옆에서 듣고 있던 이본느가 물병을 떨구었다. 청동으로 된 물병은 깡, 소리를 내며 바닥에 데구루루 굴렀다. 바닥에 깔린 카펫이 물로 어둡게 젖어 들어갔다.
이본느는 망연한 표정으로 비앙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를 깨닫고 화닥닥 놀랐다.
“죄송, 죄송합니다, 마님. 제가 이런 실수를.”
“괜찮아. 어차피 카펫은 바꿀 생각이었으니까. 지난겨울에 썼던 감색 카펫이 좋겠구나.”
별거 아니라는 듯 이본느의 실수를 눈감아주는 비앙카의 태도에 이본느의 불안은 다소 잠잠해졌다. 이본느는 슬며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입을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는 비앙카의 옆 선은 그린 듯이 고왔다. 태어난 이래로 단 한 번도 햇볕에 그을린 적 없는 것 같은 새하얀 피부는 성스러워 보였고, 평소 고집스러워 보였던 딱 다물린 입술은 이제 와 보니 무척이나 신실해 보였다.
그녀가 모시던 마님이 성인이라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생각지도 못한 일에 놀란 기색을 좀처럼 지울 수가 없었던 이본느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수도에서 대주교님을 만난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그래. 너랑 가스파르 경이 나가지 않겠다 하여 얼마나 당황했는지 아느냐?”
비앙카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본느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머리가 인지하는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이본느와 뱅상의 경악은 시발점일 뿐이었다. 비앙카의 인정을 필두로, 그녀가 성인이라는 사실이 아르노 영지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마님이라면 성인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지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신이 내려 주신 천사 같았다고요.”
니콜라가 줄줄 늘어놓는 비앙카에 대한 찬사를 듣고 있던 다른 하인들은 어색하게 웃었다. 얼마나 으스대는지 배알이 꼴렸지만, 니콜라가 지금껏 얼마나 마님, 마님 입에 달고 사는지 아는 만큼 다들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 또한 성인이라는 말에 그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니콜라의 말이 그렇게 틀리지도 않고…. 니콜라가 조각한 초가 교단에 선물로 전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초장이 소년이었던 니콜라의 작품이 그렇게 인정받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레이스까지….
비앙카의 밑에서 레이스 짜는 법을 배우던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수다를 떨었다.
“어머, 어머. 그럼 정말 우리 마님이 성인이신 거예요?”
“성기사단이 백작님을 도왔다면서요? 그러면 마님 덕에 백작님이 살아나신 거나 다름없네요?”
성인이 뭐라고. 이런 일로 거들먹거려 봤자 괜히 체면만 깎아 먹을 일이니,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여상스레 굴려 노력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비앙카를 바로 앞에 앉혀 두고 저희끼리 수군거리는 것까지 참아내지는 못했다. 얼굴이 홧홧해서 더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비앙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앗, 마님. 가지 마시고 이야기 좀 해주세요.”
“되었다. 뭔 이야기를 해. 레이스에나 집중하도록 해라.”
하녀는 비앙카가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차 청했다.
“한마디만요, 네? 마님과 대화를 나누면 성스러움이 전해진다는 이야기가 자자해요.”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하녀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비앙카가 미간을 찡그렸다. 성스러움이라니…. 그녀를 무슨 살아 있는 성물 취급하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녀가 이것저것 일을 벌이며 영지 일에 개입하는 사이, 영지민들의 시선이 제법 호의적으로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며 다가오는 건 또 처음이었다.
조금 부끄럽기는 했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비앙카는 최대한 태연하게 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둥그스름한 귀 끝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마냥 평화로운 하루만 계속되는 것은 아니었다. 기이한 전운이 아르노 영지를 향해 드리우고 있었다.
전조는 돌연 수도에서 자취를 감춘 2왕자에 관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다들 자코브의 행방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다. 1왕자가 죽고 그도 기분이 썩 좋지 않을 테니, 어디 사냥이라도 하러 나간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대세였다. 만약 비앙카가 2왕자에 대해 따로 소식을 모아 오라 명하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하고 넘어갔을 수도 있었으리라.
비앙카는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자코브는 누구보다도 왕위를 얻기 위해 필사적일 터였다. 수도에 찰싹 눌어붙어, 왕의 목숨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어도 모자란 상황에 자리를 비우다니?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혹시 자카리를 암살할 생각으로 아르노군에 잠입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도 생각이 있으면, 성기사단이 있는 곳에 넉살 좋게 들어설 수 있을 리가 없어. 그게 아니라면….’
해답은 나오지 않은 채, 비앙카의 머리만 어지러워졌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 하나가 다급하게 비앙카의 방에 찾아와 목청을 높였다.
“마님! 마님!”
“웬 소란이냐?”
“영지에…!”
비앙카의 방에는 주로 하녀들만이 오갔고, 찾아오는 남자라고 해 봐야 가스파르 아니면 뱅상 뿐이었다. 드문 하인의 방문, 더군다나 하인이 목소리를 높이기까지 하는 것은 더더욱 이상한 일이었다.
하인은 헐떡이며 숨을 꼴깍꼴깍 넘겼다. 괜한 소란에 비앙카가 얼굴을 찡그리고 하인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난번 뱅상의 방문이 괜스레 겹쳐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 전해 온 소식은 그때와 달리,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영지에 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보고를 받게 된 비앙카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본느 또한 망연한 낯으로 하인을 바라보았다.
‘군? 군이 쳐들어왔다니? 이곳, 아르노 영지에? 누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었다. 밀려오는 혼란에 비앙카의 몸이 비틀거렸다.
비앙카는 곧, 그녀의 영지에 쳐들어온 이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코브! 어째서 수도를 비웠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예전의 비앙카였더라면, 자코브가 수도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기가 무섭게 이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녀의 생존을 위해. 그녀의 미래를 위해.
그제야 비앙카는, 그녀가 자카리의 안위만을 생각하느라 그녀, 본인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수단을 떠올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 늦은 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