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59화 (159/192)

#159 베일에 싸인 성인의 정체(4)

성기사단을 이끌고 온 것은 성기사단장, 앙리 경이었다. 그는 신실한 신의 신도였고, 신을 위해서라면 그 한 몸 바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성인의 등장으로 인해 몹시 고무되어 있던 그는, 자신이 이번 성전에 참여하게 된 것에 대해 영광의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라곤군의 토벌은 완벽했다. 저항 세력이 없음을 확인한 앙리는 자카리에게로 말을 몰았다. 앙리가 자카리와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지만, 교단에까지 소문이 자자한 그의 외모를 못 알아볼 수가 없었다.

칼을 벼려 만든 듯한 은빛 머리카락과 서늘한 얼굴의 미남. 사람을 지휘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사내가 다가오는 앙리를 반겼다. 앙리는 백마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성기사단장 앙리입니다.”

“아르노 백작이네. 참전에 감사하군.”

자카리는 담담하게 그를 맞았다. 오히려 흥분에 가득 차 있던 것은 바로 앙리였다. 자카리를 바라보는 앙리의 눈에는 감격이 그득했다.

성인인 비앙카가 바로 자카리의 아내라는 것도 그러했지만, 그녀가 무엇보다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자카리의 생존이 아니던가. 성인의 바람은 신의 바람. 그 이야기인즉슨, 신께서 자카리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과 같으니, 자카리를 구하기 위한 영광스러운 임무에 자신이 동원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광영이었다.

신의 뜻을 따르는 자로서 더할 나위 없는 영예에 감격한 앙리의 목소리가 호의로 누그러졌다.

“무얼요. 성인께서 요청하신 것은 즉 신의 뜻이나 다름없는 바. 저희는 신의 뜻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 것일 뿐입니다. 오히려 참전이 다소 늦게 되어…. 죄송합니다, 백작님. 성인의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군을 추려 출전을 서둘렀습니다만, 인원이 인원인지라 길이 지체되었습니다.”

“이해하는 바요. 오히려 짐작했던 것보다 빨리 와 주어 고맙군. 덕분에 살았소.”

면구스러운 듯 고개를 조아리는 앙리의 사죄 앞에서, 자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실제로 교황청의 위치와 현재 전쟁이 발발한 곳의 위치를 비교해 보면, 성기사단은 결코 늦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기대하지도 않은 지원군의 도움을 받게 되어 고마울 뿐이었다.

그렇게 자카리와 앙리는 서로 체면치레 반, 진심 반이 뒤섞인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의 태도가 퍽 친근해 보여, 사정을 모르는 주변인들은 얼떨떨해하며 서로 시선을 나눌 뿐이었다.

‘백작님은 성기사단이 우리를 도울 줄 알고 계셨나?’

‘성인의 명이라는 건 또 뭐야?’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더니…. 소문이 참말이었나 보네.’

‘근데 어떻게 딱 우리 쪽을 알고 지원 왔을까. 우연인가….’

병사들과 기사단들이 수군수군하는 사이, 앙리가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꺼냈다.

“백작님께서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인 비앙카께서 저희에게 요청하신 것은 아르노 백작의 생환. 저희가 전심전력으로 지키겠습니다.”

앙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의 입이 헤 벌어진 채, 자신이 들은 충격적인 것을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곱씹었다.

잠시 뒤, 앙리가 말한 것을 그제야 이해한 사람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웅성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소란의 중심지는 바로 아르노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성인…? 비앙카? 그 비앙카? 그들이 알고 있는 그? 베일에 싸인 성인의 정체가, 바로 그들의 마님인 비앙카라고?

사람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로를 보았다. 몇 번을 곱씹어도, 비앙카와 성인에 대해 쉽게 일치시킬 수가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비앙카에 관한 것을 줄지어 늘어놓는다면, 거만한 성품, 까탈스러운 성격, 사치에 도가 튼 여자, 인생이 지루한 여자…. 전부 긍정적이지 못한, 성인과는 완전 정반대의 요소였다.

만약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소리를 성기사단에게서 듣지 않았더라면, 그런 농담을 하면 신벌이 내릴 거라 낄낄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을 지원 온 것은 성기사단이었다.

신의 말은 의심해도, 신을 믿는 성기사단을 의심하지는 말라는 말이 있다. 신의 말이야 들은 사람들의 해석에 따른 일이니 무턱대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지만, 성기사단의 광기는 굳이 확인하려 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들은 성인에 관하여 거짓을 말하느니 인두로 혀를 지질 작자들이었다.

그러니 아르노군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참…. 마님하고 성인이라니. 그 성인이 정말로 ‘그’ 성인이란 말이야?”

소뵈르가 혀를 내둘렀다. 믿어야 했지만, 마냥 덮어 놓고 믿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가 지금껏 알고 있었던 현실과 사실 사이의 차이가 노골적으로 커다란 만큼 더욱더.

소뵈르가 그러한데 로베르라고 해서 다를 바는 없었다. 비앙카가 라호즈 대성당에 갔을 때, 신실하지 못한 그녀가 무슨 가식이냐며 구시렁댔던 일을 떠올린 로베르의 얼굴이 홧홧 타올랐다.

더군다나 비앙카가 자카리를 위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며 투덜거리기도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런 못마땅함은 수도에 오고 나서 상당히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로베르의 머릿속에 과거에 비앙카에 대해 품었던 불평불만이 쏟아져 나왔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의 편견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었다.

물론, 비앙카 본인이 로베르의 머릿속 생각을 읽었더라면, 아주 일리 없는 편견은 아니었다며 고개를 주억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로베르는 그 사실을 눈치채는 것보다 부끄러움이 먼저였다.

귀까지 빨개진 로베르가 부끄러움에 시선을 흘렸다. 다들 쉽사리 운을 떼지 못한 채 자카리를 보았다. 자카리는 과연, 비앙카가 성인인 것을 알고 있었을까?

답은 자카리의 담담한 얼굴이 대신해주었다. 자카리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흔들림 없는 차분한 낯으로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성기사단의 말에 동조했다.

“든든하구려. 나도 아내에게 살아 돌아가겠다 다짐한 만큼, 그대들의 도움이 절실하오.”

자카리의 확언에 모두 입이 떡 벌어졌다. 성기사단이 성인의 이름을 걸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이들이라면, 자카리는 제 아내의 이름을 걸고 거짓말하지 않는 사내였다.

그렇게 본인의 수긍이 없었음에도,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사실이 확실히 밝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비앙카가 바란 대로였다.

비앙카가 지금껏 자신의 정체에 대해 비밀로 해 달라 교황청에 신신당부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카리에게 그녀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자카리에게 성인임을 밝혔으니, 이제 굳이 그녀의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성인인 것이 밝혀지는 쪽이 자카리의 위명에 도움이 될 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비앙카의 판단은 정확했다.

성기사단의 지원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은 세브랑 방방곡곡에 닿았다. 그뿐이랴? 베일에 싸인 성인의 정체가 아르노 백작 부인이라는 소문까지 도니, 2왕자의 눈치를 보며 이 핑계 저 핑계 전부 끌어모아 지원군을 차일피일 미루던 이들이 갑자기 우르르 지원을 보냈다.

이제는 2왕자가 아닌 교단의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원래 나라의 정치에는 중립을 유지하는 교황청이었지만, 종교적 문제가 얽힌 일에는 달랐다.

성인이 자카리의 아내인 이상, 교단 측에서는 전심전력으로 아르노 백작가를 밀어줄 테고, 그것은 자카리가 모시고 있는 알베르 왕세손의 세력에 힘이 되어준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왕자가 나이가 찼다 해도, 교황청에게 밉보이면서 왕위에 오르기는 힘들지…. 게다가 출신도 좀 찜찜하고.’

‘왕세손이 어리긴 하지만, 성인의 가호를 받는 아르노 백작이 섭정이 되어 지탱해주면 딱히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모두는 자신의 이득을 탐하며 머릿속의 주판을 튕겼다.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도 쉽게 그들은 태도를 달리했다. 그런 간사한 이들의 도움이 진정으로 도움이 될 리는 없지만, 전쟁이고 정쟁이고 수 싸움이다. 박쥐와 같은 이들을 끌어들이는 쪽이 이기는 싸움.

자카리는 이 현상을 반겼고, 반면 자코브는 그에 이를 갈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지금 당장 발발하고 있는 자카리와 아라곤 사이 전쟁터로 향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이 성인인 비앙카에게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알베르 왕세손의 약혼을 축하하며 열렸던 연회에서 비앙카를 만났던 일을 입에 담으며, 마치 그녀와 친밀한 사이라도 되는 듯 으스댔다. 특히 비앙카에게 장미를 건넨 이들은 그것이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떠벌렸다.

‘내가 말이야, 그분에게 장미를 건넸다고! 그리고 그분은 나에게 신의 가호를 내려주셨지.’

‘저 자식, 또 허풍은.’

‘그러고 보니 그분께서 새로 짠 직물이 그렇게 아름답다면서요.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레….’

‘레이스 말이지요!’

‘맞아요! 레이스! 호수에 내린 성에처럼 화려하고 투명한 무늬가 그렇게 아름답다고 했어요.’

그녀가 직접 짰다는 레이스에 대한 열망도 더더욱 깊어져만 갔다. 신이 내려주신 솜씨가 분명하다며, 레이스를 상서로운 성물 취급하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다.

성인에 관한 소문은 비단 세브랑에만 도는 것이 아니었다. 성기사단이 등장한 이후, 아라곤의 군대 사이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돌았다. 신의 가호를 받는 자카리와 싸워 봤자 패배할 뿐이라는, 그런 소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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