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57화 (157/192)

#157 베일에 싸인 성인의 정체(2)

자카리는 성인에 대해 잘 몰랐다. 세브랑에 성인의 등장한 것으로 인해 아라곤이 주춤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에 대해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은 성인이 그렇게까지나 교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게 미심쩍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성인인 당사자, 비앙카의 호위라면 모를까 남편인 자카리의 전쟁을 대신하게 한다니…. 어찌 보면 성기사단을 유용하는 것이 아닌가.

아르노 영지에 돌아오자마자, 그날 새벽 출전하게 되느라 비앙카와 이야기할 시간이 짧았고, 남은 시간조차 부부 관계를 하느라 다 보내버렸다. 그래서 자카리는 성인의 존재 의의와 교단이 성인을 어째서 전심전력으로 지원하는지, 긴밀한 내막까지는 알지 못했다.

성인에 대한 교단 내의 의견이 어찌 될지 모르는 만큼, 자카리는 섣불리 판단하거나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전쟁은 안 그래도 불확실한 요소들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런 만큼 그가 전쟁에서 고려할 것들은 전부 확실한 것들뿐이어야 했다.

막사 안에서 생각에 골몰하던 자카리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주변 상황이 복잡해도 그가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었다.

이겨서, 승리와 함께 영지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비앙카를 끌어안고 그녀의 몸 구석구석 쉴 새 없이 입 맞추는 것….

자카리는 그날만을 기리며 자신을 엄격히 채찍질했다. 천신만고 끝에 마음을 고백했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전장으로 떠밀려 온 지금 상황이 천하의 자카리라 하여도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막사 안을 비추던 촛불이 일렁이며, 그의 그림자를 천막에 드리웠다. 그와 함께 그의 얼굴에도 음영이 내려앉았다.

그때 막사의 입구를 가려 둔 천이 펄럭 열렸다. 자카리에게 허락을 구하지도 않고 무례하게 성큼 들어오는 상대가 누군가하고 봤더니 로베르였다. 소뵈르라면 모를까, 평소 예의 차리던 로베르답지 않은 태도였다.

막사에 들이닥친 로베르는 당황이 역력한 기색으로 외쳤다.

“백작님. 세브랑에서 지원군이 왔습니다!”

“지원군이…?”

지원군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자카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누가…? 차라리 자코브 쪽에서 그들에게 밀정을 심기 위한 간자라는 것이 더 타당성 있었다. 중요한 순간에 자카리의 등에 비수를 꽂도록 사주한….

자카리는 당황하여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는 로베르를 채근했다.

“도대체 누구인가?”

“그게….”

“지원군을 찾으신다 해서 왔습니다.”

로베르가 답하기 전, 천막의 문이 또다시 열렸다. 자카리는 낯설지만, 익히 알고 있는 목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그곳에 있는 것은 자카리 그가 단 한 번도 염두에 둬 본 적 없는, 예상치 못한 상대였다. 상대는 언제나처럼 빙긋,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호랑이라 해도 궁지에 몰리면 토끼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법이지요. 혹시나 도움이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 영웅의 위명에 도움이 될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다보빌 백작.”

곰살맞게 휘어진 눈동자는 다분히 정치적이었다. 자카리를 치켜세우는 말 한 마디, 한 마디 허투루 내뱉는 것이 없었다.

사실, 자카리와 다보빌은 그리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1왕자 파로서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기는 했으나, 단지 그뿐이었다.

솔직히 자카리가 알고 있는 다보빌 백작은 의리보다는 이득에 의해 움직이는 사내였다. 1왕자가 그리 죽은 이상, 바로 2왕자 파에 넘어가지는 않을지라도 필사적으로 중립을 유지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자카리를 지원 오다니. 이는 그가 절대적으로 2왕자 파의 편을 들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물론 다보빌 백작이 자코브의 사주를 받고 왔을 수도 있는 법이나,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다보빌 백작은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고 까다로운 상대였으나, 상대의 뒤통수를 치는 저열한 수작질에 손수 직접 나올 정도로 가벼운 성품은 아니었다. 그는 다보빌 백작가에 데릴사위로 들어온 이기는 했으나, 알 수 없는 품위와 명예가 있는 자였다.

아마 알베르 왕세손에게서 무언가 가능성을 본 것이겠지. 그리 생각하는 쪽이 앞뒤가 맞았다.

자카리는 복잡한 속내는 잠시 접어두고, 그를 위해 먼 곳까지 찾아온 다보빌 백작을 환대했다.

“그대가 와 줘서 무척 기쁘군.”

“영웅의 환대를 받으니 저도 영광입니다.”

다보빌 백작, 마르소도 미소 지었다. 주변에서 뱀과 같다 수군덕거리는 매끈한 미소는 천연덕스러웠다.

자카리의 짐작대로, 마르소가 고작 자코브의 간자 노릇이나 하자고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카리나 죽은 고티에 왕자에 대한 의리 때문도 아니었다.

마르소가 자카리를 지원 온 것은 얽히고 섞인 많은 이득 관계 때문이었다. 그중에 비앙카가 그의 사랑스러운 아내, 카트린의 유일한 친구인 것도 썩 영향이 없지는 않았다.

물론 단지 그뿐이었다면 직접 군을 몰고 출전하는 대신 적당한 지원군을 보내는 것으로 의리와 명분을 다했을 것이다.

마르소가 굳이 수고스럽게, 손수 행차하여 자카리의 지원군에 합류한 이유. 그것은 그가 최근 수도에 자자한 베일에 싸인 성인의 정체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성인의 정체가 비앙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비앙카라는 여자에 대한 사감은 젖혀두고서라도, 그녀와 성인을 연결 짓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 마르소조차도 그러했으니, 지금껏 그 누구도 비앙카가 성인일 거로 생각지 못한 것도 당연했다.

왕조차 모르는 성인의 존재.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걸 마르소가 알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렇다 하여 성인의 뒷조사를 한 것은 아니었고, 비앙카의 뒷조사를 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마르소에게는 조금의 인맥이 있었을 뿐이었다. 교단 쪽에. 제법 높은 자리에.

마르소는 추기경의 사생아였다. 사생아라는 것은 흰 눈 뜨고 보기 딱 좋은 출생이었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추기경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주변에서는 그의 출생에 대해 쉬쉬했고, 마르소 또한 달갑지 않은 터라 입에 올리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추기경의 뒷배는 꽤 풍족했다. 마르소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추기경은 마르소에게 어지간한 귀족적 소양을 다 배우게 시켰다. 기품 있는 태도, 부족함 없는 교양, 좋은 옷감…. 어린 시절의 마르소는 귀족 자제라 해도 다름없을 정도였다.

솔직히, 마르소가 똑똑하고 영민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지원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실제로 마르소 말고 다른 자식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그들도 마르소와 같은 지원을 받았는지는 의문이었다.

그는 그런 추기경을 경멸했지만, 추기경의 지원을 받아야 하는 상황인 만큼 얼굴을 가식으로 꽁꽁 싸맸다. 끽해야 사생아인 그에게 있어서 추기경이 깔아 놓은 길을 가는 게 최선이라는 걸 영민한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비판적이고 염세적인 태도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닌지라, 그는 어린 시절부터 속을 알 수 없다든가 독사 같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렇게 수도사가 되는 교육을 받고 있던 어느 날, 그는 교회에 미사 하러 온 다보빌 백작 영애, 카트린을 만났다.

카트린과 마주한 그는 마치 태양이 번쩍번쩍하며 그의 인생의 앞날을 밝혀주는 듯한 계시를 받았다. 그가 태어나서, 수도사로서 교육받은 모든 것들이 그녀를 만나기 위한 초석 같았다. 이것이 바로 신의 안배인 걸까. 마르소는 그날 처음으로 신실함이 가슴 한껏 차오르는 걸 느꼈다.

하지만 카트린은 백작 영애였고, 마르소는 추기경의 자식이라 하나 사생아였다. 원래대로라면 댈 것도 없는 상대였다. 만약, 카트린이 데릴사위를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천만다행으로, 다보빌 백작가에서는 똑똑하면서도 어느 정도 형편 좋은 신분의 혈통 있는 자제를 데릴사위로 들일 생각이 있었지만, 사윗감을 찾는 데 난항을 겪고 있던 와중이었다. 마르소는 사생아였지만, 그의 아버지의 신분이 그의 혈통을 대신해주었다.

그렇다 하여도 다보빌 백작가의 금지옥엽의 눈에 차는 혼사는 아니었다. 카트린이 마르소가 좋다며, 얼굴을 잔뜩 붉히고 수줍게 다보빌 백작에게 고백하지 않았더라면 이 달콤한 결혼도 불가능했으리라.

추기경 쪽에서는 자신을 후계자로 내세워 교단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려고 했던지라, 그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다보빌 백작가는 세브랑에서도 꽤 명망 있는 가문이었고, 그런 가문의 데릴사위라면 추기경으로서도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 덕을 지금, 이렇게 보고 있다.

최근 프란시스 대주교의 기세가 장난이 아니었다.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것을 밝히고, 그 성인의 축성까지 하였으니 그가 추기경이 되는 것은 시간문제요, 어찌 보면 교황까지 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던 찰나였다.

추기경이 그 꼴을 그냥 지켜볼 리가 없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성인에 대해 주도권을 잡기 원했고, 그러기 위해 바로 자기 아들인 마르소에게 연통을 넣었다. 성인의 정체가 비앙카라며, 그녀에게 도움이 될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여 눈도장을 찍으라는 요지의 내용이었다.

마르소가 비앙카에게 빚을 지워 두거나 그녀의 남편과 친해지면, 프란시스가 추기경이 된다 해도 교황으로 가는 것을 견제할 수 있다.

추기경은 마르소를 믿고 맡긴 일이었지만, 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마르소의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올 뿐이었다.

하지만 성인과 선을 대어 두는 것은 중요했다. 추기경의 사생아로서가 아니라, 다보빌가의 데릴사위 백작으로서.

다보빌 백작가에는 빚이 많았다. 그가 추기경의 밑에서 빠져나올 계기가 되었고,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그녀의, 아내의 가문이 아니던가. 마르소는 다보빌 백작가를 부강하게 만들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그것이 굳이, 마르소가 자카리를 도와주러 참전한 이유였다.

자카리와 마르소는 서로의 손을 꽉 부여잡았다. 아내의 일이라면 목을 매는, 두 남자의 동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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