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다가오는 미래(9) / 베일에 싸인 성인의 정체(1)
이본느는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비앙카의 방에 들어섰다.
“목욕물을 준비하라 할까요?”
“그것보다 먼저 옷을.”
“예.”
이본느는 더 묻지 않은 채 옷가지를 들고 왔다. 이본느의 시중을 받아 옷을 걸친 비앙카가 연이어 명령했다.
“서신을 쓸 준비를, 그리고 전령을.”
“예.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새벽녘에 뜬금없는 명령이건만, 이본느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비앙카가 내린 명을 수행했다. 백작이 몰고 온 전쟁의 소식, 그리고 무겁게 내려앉은 비앙카의 분위기. 비앙카는 서두르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본느는 본능적으로, 반론을 하거나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는 걸 눈치챘다.
이본느는 재빨리 비앙카가 서신을 쓸 수 있게 준비를 마치고, 전령을 부르러 갔다. 이본느가 자리를 비운 사이, 비앙카는 새벽의 찬기에 딱딱하게 굳은 손을 억지로 움직여 펜을 잉크에 적셨다.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흐른 김이 시야를 가렸다. 하지만 비앙카의 눈동자는 양피지 위에 그녀가 쓰고 있는 문장에 고정된 채였다.
펜촉을 타고 잉크가 새어 나와 양피지에 스며들었다. 간결하면서도 고풍스러운 필체는 막힘없이 이어졌다.
양피지 끝에 서명까지 끝마친 비앙카가 서신을 밀봉하여 가문의 인장을 찍으려던 찰나, 이본느가 전령과 함께 나타났다. 새벽녘이었지만 자카리의 출전으로 인해 깨어 있었던 듯, 전령은 빠릿빠릿한 낯이었다.
“마님, 전령을 불러왔습니다.”
“이걸 라호즈의 대주교에게 건네렴.”
“라호즈의…. 대주교 말씀입니까?”
전령은 비앙카가 건네는 서신을 받아 들며 의아해했다. 수신자가 대주교라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기는 했지만, 그건 둘째 치고서라도 대주교에게 서신을 전할 수 있을지 자체부터가 의문이었다.
교단의 대주교는 사사로이 서신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상대가 아니었다. 비앙카가 아니라, 비앙카의 남편인 자카리나 아버지인 귀스타브여도 마찬가지였다.
전령이 알겠다 확답하지 못한 채 어물어물 말을 흐렸다. 하지만 비앙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책상 옆에 꺼내 둔 함을 가리켰다.
“그래. 라호즈의 대성당에 가서, 아르노 백작 부인이 보냈다 말하며 이것을 보여 주면 된다.”
비앙카가 건넨 함에는 니콜라의 초가 증표로 들어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프란시스가 알아서 비앙카에게서 온 연락을 직통으로 받을 테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아르노가의 인장과 니콜라의 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수도까지 며칠이나 걸리겠느냐?”
“답을 들어야 하는 일입니까?”
“일단 서신을 빨리 보내는 것이 중요하다.”
“보통 말을 타면 사흘이지만, 밤낮을 달려서라도 낼모레에는 세브랑에 도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리고 전령이 해야 하는 일은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고도 빨리 서신을 보내는 일이었다. 각오를 다진 전령은 비앙카에게 받아 든 초와 서신을 잘 갈무리하고 바로 그녀의 방을 뛰쳐나갔다.
그제야 비앙카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서신의 내용은 자카리가 출전하였으니, 성기사단 출정을 부탁한다는 요지였다. 자카리의 죽음을 기필코 막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구구절절 쓰여 있었다.
수도까지 빨라야 이틀이라고 하지만, 수도에서 교황청까지 연통을 넣는 데 걸리는 시간이 또 있다. 그래도 자카리가 오늘 새벽에 떠났으니, 그리 늦지는 않게 연락이 닿을 것이다.
비앙카는 크게 한숨을 쉬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자카리의 실력을, 그리고 살아 돌아온다는 그의 다짐을 믿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굳이 쓸 수 있는 패를 쓰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안전에 안전. 비앙카로서는 거듭 신중을 기하는 쪽이 좀 더 마음 편했다.
프란시스에게 서신을 보내고 난 뒤, 비앙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비앙카는 초조히 전령에게서 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닷새 뒤, 전령이 프란시스 대주교의 답을 받아 돌아왔다. 직접 프란시스에게 답을 받았다며 서신을 건네는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것 같았다. 평민인 그가 대주교를 직접 만나 뵌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던지라, 닷새 동안 제대로 눈을 붙이지 못했으면서도 얼굴엔 차오른 감격으로 그득했다.
비앙카는 대주교의 서신을 받기가 무섭게 황급히 열어 보았다. 커팅 나이프를 쥔 손이 덜덜 떨렸다.
비앙카의 손아귀에서 바스락거리며 양피지가 구겨졌다. 비앙카의 떨리는 동공이 서신의 내용을 재빠르게 훑었지만, 너무 긴장해서 문장이 머릿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았다.
비앙카는 서신의 내용을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읊었다. 몇 문단이나 되는 성인에 대한 찬양이 지나가고, 비앙카는 자신이 바라던 문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희 교단은 정진 정명으로 성인의 명을 따를 것입니다.
아!
비앙카는 그제야 나직한 탄식과 함께 두 손을 꼭 쥐고 눈을 감았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될 거로 생각했으면서도 내심, 혹시나 하는 생각에 초조했던 찰나였다. 프란시스의 확답을 받고 나서야 안도할 수 있었던 비앙카의 입술에 미약한 미소가 떠올랐다.
완벽하게 마음을 놓기엔 여전히 불안함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가 봐 온 미래와 다른 점이 하나하나 생길 때마다 비앙카는 해냈다는 성취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앞으로, 이대로만 쭉….’
쏘아 올린 화살은 태양을 꿰뚫기라도 할 듯 하늘을 향해 높이높이 치솟는다. 하지만 언젠가는 고꾸라져 떨어지기 마련이다. 돌아온 화살이 무엇을 꿰뚫을지는 신만이 아는 법이다. 비앙카는 화살이 그녀의 목이나 자카리의 생명이 아닌, 자코브의 목을 꿰뚫기를 바랐다.
화살은 이미 현을 떠났고, 미래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바꿔야 하는, 미래가.
* * *
자카리가 전쟁에 나선 지도 벌써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아르노 영지를 떠나며 비앙카에게 그리도 호언장담했건만, 막상 전장의 형세는 그리 좋지 않았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기가 바닥을 치니 이길 전쟁도 쉽게 풀려 가지 않았다.
백전 무패의 명장인 자카리의 밑에서 수없이 많은 전장을 전전해 온 아르노 군이었지만, 그들 모두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다름이 아니라 고티에 왕자의 죽음 때문이었다.
고티에 왕자가 주는 상징적 의미도 의미였다지만, 그의 죽음으로 인해 여차할 때 그들을 구해줄 지원군이 없다는 것에 대한 충격이 컸다.
1왕자 파의 귀족들은 고티에 왕자의 죽음과 함께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2왕자 쪽을 간 보듯 서성거리는 이들이 많았다.
정세에 대해 잘 모르는 비앙카가 날카롭게 왕위의 서열을 파악한 것과 달리, 다른 이들은 그래도 왕이, 왕세손인 알베르보다 2왕자인 자코브의 편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알베르가 너무 어렸고, 반면 자코브는 한창의 나이였다.
문제라면 자코브의 출신이 꺼림칙한 것 정도일까. 사생아를 극도로 혐오하는 세브랑에 있어서 자코브의 모친이 그를 가진 시기와 계기는 구설에 오를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자코브의 모친은 세브랑의 정통한 왕비가 되었다. 1왕자인 고티에가 있었을 때야 적법한 적장자인 고티에라는 선택의 여지가 있었으니 자코브의 흠이 커 보였다지만, 지금은 고티에가 죽어 없지 않은가. 인제 와서 그의 출신을 트집 잡아 왕이 되지 못한다 말하기엔 명분이 부족했다.
다들 눈 가리고 아웅 하며 자코브에게 비비느라 바빴다. 알베르를 지지해줘야 하는 귀족들이 이탈하니, 세브랑의 정세가 혼란스러운 것도 당연했다.
그런 상황에서 변경의 전쟁에까지 신경 써 줄 일은 요원했다. 더군다나 출전해 있는 상대가 자코브와 사이가 좋지 않은 자카리, 그라면 더더욱.
실제로 현재, 자카리가 지원군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자카리는 좀처럼 오지 않는 지원군에 이를 악물었다.
이번 전쟁은 어떻게든 돌파할 수 있다지만, 아라곤과의 전쟁은 이번이 끝이 아니다. 과연 그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인가? 한 번, 두 번?
지금까지는 그래도 아르노 기사단이 해 온 가닥이 있어 굳건히 버티고 있다지만, 이런 전황이 지지부진하게 길어지면 무너지는 것도 속수무책일 터였다.
게다가 지원도 제대로 안 해 주는 이들이 보급이라고 신경 써 주겠는가?
여차하면 블랑쉐포르가에 지원을 요청하면 되겠지만, 그쪽도 지금은 여의치 않을 터였다. 자카리가 왕세손 알베르의 호위를 맡긴 것이 바로 블랑쉐포르가이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넌지시 일러준 대로 고티에의 암살 의혹과 함께 알베르의 암살 가능성에 대해 전한 만큼, 블랑쉐포르가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게 눈에 훤했다.
게다가 비앙카에게 조아생을 전쟁에 참여시키지 않겠다 호언장담한 것이 있는 만큼, 그쪽에 지원군을 요청할 수도 없었다. 그건 어찌 보면 다소 미련한, 사내로서의 자존심이었다.
비앙카가 보내준다는 성기사단에까지 생각이 닿기는 했다. 하지만 자카리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가 성인이라는 비앙카의 말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성인 여부와 교단에서 성기사단을 보내주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