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55화 (155/192)

#155 다가오는 미래(8)

실제로, 자카리는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바앙카의 고백 때문에 결정을 번복할까 하는 유혹에 빠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비앙카를 위해서라도 전쟁에 나서는 걸 무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녀에게 걸맞은 상대가 되기 위한 자존심 때문이라는 이유가 컸다면, 이제는 그녀와 자신이 그릴 미래를 위해 세브랑을 위협하는 아라곤을 완전히 배제해야만 했다.

그로서는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았다.

그럼에도 자카리가 주저하는 것은, 그가 또다시 고개를 내저음으로써 비앙카가 얼마나 실의에 빠질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의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비앙카는 그런 자카리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았다. 비앙카도 자카리가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고집도 어지간하다지만 포기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그녀가 포기하는 순간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선수 치듯 먼저 입을 뗐다.

“그러면 당신이 죽지 않는다는 확신을 나에게 줘요.”

“어떻게.”

“오늘, 피임하지 말아요….”

비앙카는 자카리의 단단한 가슴팍에 슬며시 손을 댔다. 수줍다기보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비앙카가 던질 수 있는, 최후의 배팅이었다. 자카리의 대답을 기다리는 그녀의 속마음이 초조함에 타들어 갔다.

“…….”

“나를 더 이상 불안하게 하지 말아줘요….”

비앙카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다. 그녀의 간절한 애원에 자카리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카리는 아까만큼 단호하게 뿌리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고집 세고 강철 같은 그도 사람인지라, 사랑하는 비앙카의 부탁을 두 번이나 연이어 거절을 하는 것이 마음 편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상황도 상황이었다. 옛날, 어떤 왕은 베갯머리송사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고사도 있었다. 만약 비앙카가 나라를 원한다 했더라면, 자카리는 당장에라도 즉답했을 터였다.

만약 몇 시간 전이었더라면, 이런 재고의 여지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카리는 그에게 속삭이는 비앙카의 고백을 들어버렸다…. 그것이 자카리의 갈등에 추를 얹어 주었다.

저울이 기울어졌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결심한 눈빛으로 비앙카를 응시했다.

“새벽까지는 길지.”

갑자기 비앙카의 허리가 쑥, 잡아 내려졌다. 비앙카가 당황하여 눈을 데록데록 굴렸다. 자카리의 의미심장한 말 속의 의미를 파악하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설마… 아니야. 괜히 기대하지 마…. 하지만….’

비앙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자카리는 거침없이 행동했다. 주저함을 떨쳐 낸 그는 비앙카를 향해 깊숙이 몸을 묻었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휘며 숨을 들이켰다.

“아…!”

“그대의 불안함을 전부 종식할 수는 없을 테지만, 그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오.”

자카리가 움직이자, 비앙카의 몸이 그 움직임에 맞춰 들썩거렸다. 자카리가 단단히 잡아 고정해주지 않았더라면 가녀린 비앙카의 몸은 이리저리 흔들렸을 것이다.

아래에서부터 쿵쿵 울리는 느낌. 아랫배서부터 치밀어 올라오는 쾌락에 비앙카는 한껏 턱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고동색 머리카락이 이불자락에 어지러이 흩어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새 그들의 피부에는 열락의 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자카리는 짧은 숨을 내뱉으며 비앙카에게 짓궂게 물었다.

“몇 번이나 안에 파정해 줘야 그대가 만족하겠소? 응, 비앙카. 세 번? 네 번? 그걸론 부족해?”

“응, 읏, 할 수 있는, 만큼, 하읏….!”

“그대는 욕심꾸러기로군.”

자카리의 입술이 빙긋이 호선을 그렸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엉덩이를 단단히 잡은 채 허리 짓 했다. 그의 것이 더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느낌에 비앙카는 절제 없이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어찌나 움직임이 날뛰는 말 같은지, 비앙카는 자카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의 다리가 자카리를 옭아매듯 허리에 감겼다.

필사적으로 달렸을 때의 느낌이 이러할까.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니, 차오른 건 신음일지도 모른다. 말로는 호기롭게 할 수 있는 만큼 해 달라 졸랐지만, 벌써부터 몸을 덜덜 떨게 만드는 절정의 징조에 비앙카는 긴장했다.

체력이 약한 그녀는 한두 번 하고 나면 녹초가 되어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럴 수 없다. 기필코 자카리가 그녀의 안에 파정하는 것을 확인하고야 말 것이다. 비앙카는 정신을 다잡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런 비앙카의 귀에, 자카리의 목소리가 먼 곳에서부터 들리듯 울렸다.

“내 지금껏, 그대를 위해선 언제든 그대를 놓아줄 방도를 찾고 있었지만. 이제는 나도 내 욕심을 차리겠소, 비앙카. 나는 그대를 돌려보내지 않을 거요.”

“하으, 응, 읏, 아….!”

“그대는, 영원히 아르노가 되는 거야…!”

속도가 빨라졌다. 비앙카의 발끝이 굽으며 이불보를 이리저리 헤집었다. 자카리의 두껍고 단단한 팔뚝에, 비앙카의 곱게 정돈된 아몬드형 손톱이 파고들었다.

자카리의 것이 머리만 걸릴 정도로 쑥 빠져나갔다가, 단숨에 뿌리 끝까지 들어왔다. 번개가 정수리에 내리꽂히는 것 같은 느낌. 몇 번을 겪었어도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비앙카가 절정의 여운에 몸을 퍼드득거리며 떨었지만, 자카리의 커다란 손이 비앙카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꼼짝도 못 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녀의 안쪽에 꿀럭이며 들어오는 이질적인 느낌. 그녀가 그리도 바라던 파정이었다.

마치 마개로 틀어막듯, 그는 그 상태에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비앙카는 허덕이며 숨을 골랐다. 아직도 믿어지지 않았던 그녀의 눈에 눈물마저 핑 돌았다. 한 번의 파정으로 임신할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그녀가 이 한 번을 얼마나 갈구했던가?

덩치가 커다란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눈을 맞추기 위해선 있는 힘껏 몸을 둥글게 말아야 했다. 비앙카의 몸을 전부 다 뒤집어 숨길 듯이. 자카리는 비앙카의 이마에 제 이마를 비비더니, 그녀의 귀에 약간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대는 이제 내가 죽어도 블랑쉐포르가로 돌아가지 못해.”

자카리의 후회 어린 목소리 아래에는, 어딘지 모르게 만족감마저 도사려 있었다. 그리도 걱정했는데, 막상 저질러버리니 이렇게도 흡족했다.

“죽는다는 소리는 제발 하지 말라니까요. 고집은 세 가지고….”

“그대만 할까.”

투덜거리는 비앙카의 볼멘소리에 자카리는 픽 웃었다. 땀에 젖은 은빛 머리카락이 내려와 그의 이마에 들러붙었다. 자카리는 밤하늘이 풀잎에 내려앉듯 보드라운 시선으로 비앙카를 바라보았다.

언제 훨훨 날아갈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확고부동한 그의 아내. 그의 사랑.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뻐 날뛰듯 그의 욕망을 토해냈는데, 그의 하반신은 정도를 모르고 다시 몸을 세웠다.

자카리가 비앙카의 뺨에 다정히 입술을 내리누르며 속삭였다.

“그대의 욕심에 어울리려면 새벽은 짧군….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어.”

“당신, 전쟁 나가는 길에 말에서 고꾸라지는 거 아니에요?”

“날 뭐로 보고. 전쟁 경력 15년이면 말 위에서도 잘 수 있다오.”

자카리의 농에 비앙카가 나직이 웃었다. 비앙카는 침대 위에 흐드러진 다리를 들어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해도 괜찮다는, 무언의 긍정 표시였다.

두 번째 정사는 좀 더 여유롭게 시작되었지만, 결국 끝이 조급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부부는 침대 위에서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몇 번이고 얽히고설켰다.

새벽닭이 울 때, 한 사람은 계속 침대에 남았고, 다른 한 사람은 옷을 추스르고 다급히 전장으로 가는 말 위에 몸을 날렸다. 부부는 헤어졌지만, 다른 생각으로 오해하는 일은 없었다.

동상이몽의 끝이었다.

* * *

깜빡, 깜빡. 비앙카는 무거운 속눈썹을 비비며 잠에서 깼다. 물에 젖은 솜이라도 얹어 둔 듯 몸이 묵직했다. 비앙카는 드러난 어깨 위로 스치는 찬바람에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렸다.

그녀의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비앙카는 침대에 누운 채, 그 빈자리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녀를 강하게 안아 오던 자카리의 온기가 거짓말처럼, 겨울바람에 휩쓸려 사라지고 있었다.

비앙카는 자카리의 손길을, 그의 열기를 조금이라도 덧그리려는 듯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으슬으슬 떨려 오는 것은 몸이건만, 마음마저 훵 한 기분이었다.

비앙카는 어제 자카리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처음에는 오해를 푸느라 급했고, 그다음에는 임신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정신없이 그와 몸을 섞느라 바빴다. 새벽 내 그와 정사에 몰두한 결과, 비앙카는 자카리에게 그녀가 보고 온 미래에 대해 미처 밝혀주지 못했다.

그나마 가까스로 자코브가 이 모든 일의 원흉이니 조심, 또 조심하라 당부한 것이 다행일까. 생각해 보면 이미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기에, 시시콜콜한 것들까지 말하지 않는 쪽이 머리를 덜 어지럽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자코브, 그리고 전쟁 중의 암살 위협. 그 두 가지 만큼은 단단히 주지시켜 두었으니 핵심만큼은 전달한 것이리라. 나머지는 자카리를 믿을 뿐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무력함은 몇 번을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비앙카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흰 몸을 타고 이불이 흘러내렸다. 비앙카는 손을 뻗어 침대맡에 있는 모피를 끌어당겨 몸에 걸치고는 다급히 이본느에게로 연결된 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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