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53화 (153/192)

#153 다가오는 미래(6)

“당신은 전쟁에서 허무하게 암살당해요. 신이 저를 성인으로 선택하여 미래를 보여준 건, 당신의 죽음을 저지하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죽으면 안 돼요. 제가 부탁하면 성기사단도 기꺼이 나설 거예요. 그러니 제발….”

비앙카의 뺨은 눈물 자국으로 얼룩졌다. 근심 가득한 목소리에는 울음이 가득했고, 눈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만약 그녀가 침대에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당장 자카리의 앞에서 무릎이라도 꿇었을 정도로 필사적이었다.

자존심 높은 그녀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처절한 간청에, 자카리는 비앙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지금껏 수수께끼로 남아 있던 모든 것들의 정체가 밝혀졌다. 사라진 조각들이 맞아 들어가는 느낌. 갑자기 후계자 운운한 까닭이 무엇인지, 왜 대주교와 만났는지, 왜 그렇게 그의 출전을 꺼리는지….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답을 내주어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죽음을 저지하기 위한 그녀에게, 그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비앙카에게 미안하게도, 지금 이 상황, 자카리가 느끼는 것은 명백한 희열이었다. 자카리는 비앙카가 그의 죽음을 바라지 않기만 해도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한술 더 떠 비앙카가 이리도 필사적으로 그의 죽음을 막으려 하니, 마치 그녀에게 그라는 존재가 퍽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를 바라보는 비앙카는 무척이나 안쓰럽고도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바라는 바람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카리는 그녀에게 긍정적인 답을 내려줄 수가 없었다.

“그럴 순 없소, 비앙카.”

“왜요!”

자카리의 즉답에 비앙카는 믿을 수 없는 듯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그녀로서는 제시할 수 있는 모든 패를 앞에 펼쳐 둔 상황이었다. 자카리를 설득하기 위해 더 내놓을 수단이 없는 만큼, 그녀는 자카리의 거절에 초조해졌다.

“성기사단은 분명 훌륭한 기사단일 테지. 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아라곤을 막아내지 못해. 아라곤은 전쟁에 있어 무척 비열한 자들이요.”

자카리가 영웅이라 불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라곤이 그저 그런, 막아 내기 수월한 이들이었더라면 단지 그들을 막아 냈다는 이유만으로 자카리가 그리 칭송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성기사단의 실력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불안전한 요소는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 좋았다. 그것이 비앙카의 안전과 관련된 것이라면 더더욱. 확실치 않은 미래에 비앙카를 맡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자카리 자신의 영웅으로서의 상징적 의미도 있었다. 그가 있는 것만으로도 아라곤은 겁을 집어먹고 아군은 기세등등해지니, 사기적 측면에서도 참전하는 편이 유리했다.

“아라곤을 상대하기 위해선 그들을 잘 아는 이가 필요하고, 그것은 나요. 나밖에 없소. 알겠소?”

“몰라요. 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비앙카는 귀를 틀어막고 고개를 흔들었다. 자카리의 말은 더할 나위 없이 이성적이었다. 그래서 분했다. 자신의 주장이 어린아이가 떼쓰는 것만 같아서.

“나는 기사요, 비앙카. 이 검으로 이름을 알렸고, 검 덕분에 출세했으며, 그대와 결혼하게 되었지….”

자카리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자카리 드 아르노에게서 전쟁과 죽음을 빼면 무엇이 남겠는가? 검은 자카리의 마지막 자존심이자, 그가 비앙카에게 조금이나마 어울리는 상대가 되기 위한 유일한 것이었다. 그는 전쟁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있었다.

그가 전쟁 영웅이 아니었더라면, 과연 비앙카의 결혼 상대로서 언급이나 될 만한 상대였을까?

솔직히 그의 속내 한구석에서는, 성기사단의 등장이 그리 달갑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성기사단이 대단한 이들이라는 건 알았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그들에게 전쟁을 맡겨 두면, 자신의 존재 가치는 잃게 되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비앙카가 성인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히려 그렇게나 고귀하고, 선택받은 그녀에게 부합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부채감이 더욱 커져만 갔다.

그녀는 자카리의 죽음을 예언했지만, 전장에는 항상 죽음이 도사리는 법이었다. 비앙카의 앞에서는 항상 자신은 전쟁 따위로 죽지 않는다 큰소리를 쳤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살아 돌아올 것을 확신하며 전장에 나선 적이 없었다.

그러니, 그가 죽음을 앞두고 그녀의 뒤에 숨어버리는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의 간청이 당장이라도 들어주고 싶을 정도로, 너무나 안쓰럽더라도.

“그러니, 나는 검을 버릴 수 없소. 나를 필요로 하는 전쟁이 있다면, 응당 나가는 것이 내 의무요.”

결연한 자카리의 얼굴에 비앙카는 허탈한 심정이 되었다.

성인인 나를 다르게 대할 생각이냐 묻기는 했지만, 그녀가 성인이고 말고가 자카리,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자카리는 상대의 신분에 따라 행동을 달리하는 사내가 아니었으니까.

그의 굳건한 거절은 비앙카의 숨을 탁 틀어막히게 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안도하게 해주었다. 아이러니함에 비앙카는 자조했다.

그녀도 자카리를 전쟁에서 끌어내는 게 불가능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죽음만으로는 자카리를 막을 명분이 되지 못한다. 그랬기에 그리도 전쟁 외의 변수를 제거하려고 아등바등했다.

전쟁은 항상 죽음과 동반하는 법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죽음을 돈으로 바꿔 오는 사내였다. 그랬던 사내에게 이제 와 죽음을 두려워하라 말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외침이겠는가?

하지만 알고 있다 하여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그렇게도 그의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다.

내심 믿는 구석도 있었다. 자신이 자카리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에 선택되었다는 프란시스의 말이 있지 않았던가. 그래서, 자카리가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역시였다.

‘내가 신에게 선택받은 게 맞기는 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프란시스 대주교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왜…. 내가 바라는 미래대로 좀처럼 흘러가지 않는 거야? 도대체 왜?’

모든 시도가 무력하게 흩어지자, 무기력함이 그녀를 잠식했다. 비앙카는 여기서 놓아버리면 안 된다며 자신을 격려했지만, 그 사이를 비집고 의문이 치솟았다.

‘여기서 놓지 않고 계속 붙들고 있다 해서, 무슨 의미가 있어? 그와 나는 여전히 같은 주제를 놓고 빙빙 돌고 있을 텐데.’

비앙카가 잔뜩 심란해하는 와중, 자카리가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대의 조언을 깊숙이 새겨들으리라. 암살에 대해 철저히 방비하고, 평소보다도 더 주위를 살피지. 그러니 너무 걱정 마시오. 솔직히 그대가 나를 그토록 생각해주는 것만으로도 기뻐,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을 것 같소”

자신이 끝내 고집을 꺾지 않은 것에 대한 미안함 때문인지, 그의 목소리는 퍽 다정스러웠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변했다. 마치 말을 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 듯이….

그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쉽사리 꺼내기 힘든 말인 듯, 골몰하는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 부끄럽고도 오만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만, 혹시….”

자카리는 더듬더듬 운을 뗐다. 자카리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짐작도 못 한 비앙카는 혼란스러운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그의 입술에 집중했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자카리의 눈동자가 결심한 듯 빛났다. 숨을 크게 들이쉰 그가, 비앙카를 똑바로 응시하며 물었다.

“비앙카, 나를 사랑하오? 조금은 사랑하고 있소?”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질문은 비앙카의 한 곳을 훅 찔러 들었다.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이번에 틀어막힌 것은, 비앙카의 입이었다.

“많이는 아니더라도…. 조금은. 그래서 그리도 내가 죽는 것을 막고자 하는 것이오? 그대는 내가 남겨 둘 유산도 필요 없다, 처녀로 돌아가는 것도 싫다 했지. 그대가 성인이라 내 죽음을 막으려 하는 것은 알지만, 단지 그뿐이라기엔 그대의 반응이 과해. 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밖에 답이 떠오르지 않아. 내가 헛된 착각을 하고 있다면 알려 주시오. 주제넘게 굴지 않을 테니. 응?”

자카리는 얼굴이 시뻘게진 채, 비앙카에게 애원하듯 물었다. 그리 말하면서도, 그가 비앙카에게 그리 많은 사랑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그녀가 남편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카리 그 자체를 좋아해 주는 것이었으면….

“난….”

비앙카의 긴 속눈썹이 크게 나풀거리며 위아래로 흔들렸다. 부드러운 입술이 작게 떨렸다.

내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차피 당신은 날 버리고 떠날 거면서. 내 말은 안 들어줄 거면서…. 방금만 해도 단호하게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던 자카리에 대한 원망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사랑에 굳이 조금을 붙이는 그의 심정이 어떨지를 짐작하니 심장 한구석이 아렸다. 주제넘지 굴지 않는다며, 오만한 착각일 수도 있다며, 그는 그녀의 사랑에 관해 물으면서도 몇 개나 되는 부정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비앙카는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전쟁의 햇살에 그을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모습. 그가 이리도 얼굴을 붉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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