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52화 (152/192)

#152 다가오는 미래(5)

자카리에게 있어 성인이라는 위치보다도 비앙카의 존재 자체가 더 중했다. 애초에 그는 그다지 종교에 신실한 사내도 아니었다. 무척이나 세속적이고, 세상을 품을 대의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소의에 집착하는 그릇이 작은 사내이기도 했다.

“나는 항상 그대에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진심을 다하오. 그렇지만…. 그래도….”

자카리의 입이 달싹였다. 비앙카가 자신에게 성인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도 있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자카리는 그다지 종교에 대한 지식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는 성인이 신에게 선택받은, 신의 의지를 대변하는 자라는 것밖에 몰랐다. 비앙카가 도대체 어떤 연유로 신에게 선택받은 것인지, 도대체 그녀가 무슨 계시를 받았는지, 그녀가 상담해 왔다 하더라도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자신의 무지 때문에 더더욱 비앙카가 자신이 성인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종교에 대해 별로 흥미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신실치 못한 남편. 그런 그를 바라보며 성인으로 선택받은 비앙카는 과연 무슨 심정이 들었을까?

더군다나 일 년 전의 그들은, 지금과 달리 거리가 있는 편이었다. 솔직히 비밀을 털어놓기엔, 그다지 친밀하지 못한 관계라는 것에 그 또한 동의했다.

자카리는 비앙카의 모든 상황과 심정에 대해 이해했다. 자카리가 일찍이 비앙카가 성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더라도 달라질 게 없다는 사실도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배신감이 치밀었다. 그녀에 관한 것에 대해 타인보다 늦게 알게 되었다는 속 좁은 질투. 상대가 대주교라 할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비밀을 밝힐 이유가 없다 해도, 그때의 우리 사이에 거리가 있었다 해도. 그래도 우리는 부부였으니까….

자카리는 자신이 터무니없는 욕심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좀처럼 감정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이런 자신을 보고 있으니 속이 메스껍기까지 했다. 자카리가 이리저리 들끓는 감정을 꾹꾹 누르려 노력하는 와중, 비앙카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전 미래를 보고 왔어요, 자카리. 당신은 절 열일곱이라 말하지만…. 전 꿈에서 서른여덟까지 살았죠. 당신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뒤로 세브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다 지켜보았어요.”

비앙카는 쓴웃음을 지었다. 긴 세월의 흔적이 그녀의 얼굴을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경악할 거로 생각했다. 충격적인 이야기니까. 만약 비앙카가 그런 소리를 들었다면 나를 속이려는 거냐며, 우습게 보는 것도 정도가 있다 대거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카리는 비앙카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크게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라면, 그는 정말 대단한 포커페이스가 분명했다.

실제 자카리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비앙카가 꿈속에서 그리 오래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지금껏 어딘지 모르게 이상했던 그녀의 태도와 행동이 이해되기도 했다. 확실히, 그녀는 열일곱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른스러웠다….

다만 그렇다 해서 자카리가 비앙카의 꿈속 미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신경 쓰여 미칠 것만 같았다.

그 미래에서 과연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녀에게 나는 어떤 남편이었을까. 그녀에게 상처 준 것은 아닐까.

자신이 하지 않은 일이지만, 자신이 했을지도 모르는 짓이다. 그리 생각하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은 궁금하지 않아요? 당신은 어떻게 죽었는지? 제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우리는 어떤 부부였는지?”

때마침 날아온 비앙카의 질문은 자카리의 마음을 빤히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악마의 유혹처럼, 자카리의 취약한 부분에 슬금슬금 기어들어 왔다.

궁금하지 않다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지금이라 냉큼 말했어야 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자카리의 입술을 내리눌렀다.

비앙카가 보고 온 미래가 궁금한 것은 그저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가 자신에게 비밀로 했던 일에 대한, 지금껏 몰랐던 진실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였다. 비앙카의 비밀을 공유하고 싶은, 그런 치졸한 욕심.

결국 자카리는 궁금하다 말하지 못한 채, 무언의 긍정을 했다. 비앙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환하게 웃었다.

“저는 정말 정떨어지고 끔찍한 아내였어요. 주변 모두가 손가락질했죠. 제가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모든 이들이 당신을 불쌍해할 정도였어요.”

하지만 미소 뒤에 어린 것은 모든 것을 놓아버린 좌절과 절망이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자카리는 황급히 비앙카를 만류했다.

“됐소, 비앙카. 그런 꿈은 중요하지 않아. 당신은 그런 존재가 아니오.”

그가 듣고 싶은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그가 그녀에게 괜찮은 남편이었는지, 여전히 다시 그의 아내로 살아가는 것에 후회하지는 않는지…. 그런 것 정도일 뿐이었다.

이런 자기 비하적인 이야기를 그녀 본인의 입으로 고백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를 할퀴는 비앙카의 말을 멈추게 하고 싶었지만 자카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비앙카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겨 힘껏 바르작거리는 가는 몸이 너무나 애처롭고 안쓰러웠다.

하지만 이미 쏘아진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평정을 잃은 비앙카는 자카리의 가슴팍을 손으로 떠밀며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비앙카는 소리 높여 외쳤다.

“중요해요! 신께서는 미래가 최악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저에게 꿈을 보여준 거니까!”

비앙카는 무언가에게 쫓기는 것 같았다. 불안한 시선이 이리저리 오갔다. 터진 둑처럼 말을 줄줄 토해내는 그녀에게선 처절한 광기마저 느껴졌다.

“그만큼 끔찍한 미래였어요, 자카리. 최악이었어요…. 당신이 궁금하면 말해줄게요. 내가 얼마나 역겨운 여자였는지. 그걸로 당신이 저한테 질린다면 이혼도 해줄게요. 그러니까, 그 대신 전쟁에 나가지 말아요. 네?”

다른 무엇보다도 이혼이라는 단어 하나가 자카리를 꿰뚫었다. 이혼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발끈한 자카리가 비앙카를 가슴팍에서 떨어트리며 시선을 맞추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노기가 서려 있었다.

“이혼에 대해 쉽게 입에 담지 마시오, 비앙카!”

“당신이 먼저 유언장에 썼잖아요!”

비앙카도 맞받아쳤다. 지금껏 진중하게 무게 잡았던 것이 거짓말처럼 파르륵 예민하게 구는 걸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이혼이라는 단어 선정이 마음에 안 들었나 보다. 유언장에는 그런 내용을 썼던 사람이!

고티에의 죽음으로 엉겁결에 덮어 둔, 미처 청산되지 못한 문제가 튀어나온 못처럼 불거졌다.

비앙카를 끌어안은 자카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듯한 필사적임. 얼마나 흥분했는지, 그의 굵고 긴 목에 선 핏대가 두드러졌다. 그의 눈빛은 집착으로 뒤덮인 지 오래였다.

“당신이 나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건, 내가 죽어서 뿐이오!”

“당신이야말로 죽는다는 말은 하지 마요!”

둘 다 목소리가 높아졌다. 비앙카도 밀리지 않았다. 자카리에게 맞대응하는 그녀의 기세도 성난 불처럼 타올랐다.

서로 기세 좋게 외친 뒤, 침묵이 찾아왔다. 자카리와 비앙카 둘 다 한참을 씨근덕거리며 숨을 고르고, 생각을 골랐다. 이대로는 서로 목청껏 자기주장만 하다 끝날 것 같았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먼저 운을 뗀 것은 비앙카였다. 그녀는 안타까이 자조했다.

“나는 당신에게, 그런 미래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리고 싶지 않았어요. 당신은 분명, 그 미래를 알게 되면 절 경멸할 테니까. 그래서 당신에게 숨긴 거예요. 숨길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도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지 않아요….”

자카리 또한 자신이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는 걸 인정했다. 한풀 꺾인 그는 다정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비앙카를 위로했다.

“…내가 당신을 경멸할 리 없잖소. 숨긴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이해하고 있소. 그대가 꾼 꿈은 그저 꿈일 뿐이오. 단지 신이 보여준 꿈일 뿐. 그 어떤 남편도 꿈속의 일로 아내를 경멸하지는 않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너무 극단적으로 생각하지 마시오, 비앙카.”

자카리가 보기에도, 비앙카는 정신적으로 한계까지 몰려 있었다. 기절한 것도 아마 그 때문이리라. 이 주제에 관해 더 이야기해서 좋을 게 없다 판단한 자카리는 비앙카를 달래려 노력했지만, 비앙카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은 전쟁에서 허무하게 암살당해요. 신이 저를 성인으로 선택하여 미래를 보여준 건, 당신의 죽음을 저지하기 위해서예요. 당신이 죽으면 안 돼요. 성기사단도 기꺼이 나설 거예요. 그러니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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