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자카리의 유언장(9) / 다가오는 미래(1)
뱅상의 눈이 주변의 가신들을 향해 번뜩였다. 적당히 분위기 맞추라는 뜻이 강렬히 전해졌다. 비앙카와 자카리의 근처에 있던 가신들은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비앙카의 한마디는 뱅상의 예측과 희망을 무참히 무너트렸다.
“그래. 니콜라는 누구와는 달리 용기 있는 아이일 테니까.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임에도 거리낌 없이 도전할 거라 믿네.”
비앙카는 악담이라는 이름의 현을 놓았다. 날아간 화살이 누구를 지목하는지는 뻔했다. 누구보다도 고지식하고, 현상 유지를 하기 위해 기를 쓰고, 애쓰는 사내. 모든 이들이 비앙카의 바로 오른쪽에 앉아 있는 자카리를 바라보았다.
그리 말하는 비앙카의 고개는 정면을 바라볼 뿐, 자카리 쪽을 단 한 번도 보지 않았다. 비앙카의 태도가 어찌나 고고하고도 태연자약한지, 그녀가 말하는 대상이 자카리가 아닌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라도 비앙카의 심기를 거스를까 조심조심 마음 졸이며 대화 주제를 잡았는데, 비앙카의 말 한마디로 그 모든 의도가 부질없이 박살 났다. 눈앞이 깜깜해진 뱅상은 참담함에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비앙카가 자존심이 강한 만큼이나 남들 눈치를 안 본다는 사실을 잠시 깜빡했다. 아마 니콜라가 아니라 다른 주제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하더라도 결국 마찬가지가 되었을 것이다.
비앙카의 가시 돋친 말 때문에 혹시 자카리가 불쾌할까 걱정되었던 뱅상은 불안스레 자카리를 흘끔였다. 어찌 보면 영지민들이 있는 자리에서 사내로서의 미덕을 무시당한 꼴이나 다름없었으니, 아무리 비앙카에 한해 무골호인인 자카리라 하여도 버럭 화를 낼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사자인 자카리의 낯은 평온했다. 눈썹 하나 까닥이지 않는 얼굴이 어찌나 멀끔한지, 마치 비앙카의 공격적인 태도가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만 같았다. 둘이 싸웠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갔다.
그 와중 불편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마치 도둑 놀이처럼, 누구의 뒤에 수건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견디다 못한 것은 소뵈르였다. 눈치를 보던 소뵈르는 끙, 혀를 차곤 어색한 웃음과 함께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며 대차게 나섰다.
“하하. 아르노 영지에서 용기 없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세브랑에서 가장 용기 있는 사내들이 모인 곳인데요.”
“다른 건 몰라도 자네가 만용을 부리고 있다는 건 잘 알겠군.”
하지만 이어지는 비앙카의 면박에 소뵈르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백작님을 옹호하는 것은 안 좋은 선택이었을지도 몰라…. 기가 죽은 소뵈르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앞선 이들이 연달아 침몰하니, 이어서 나설 용기가 사그라졌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선 로베르는 만성절 축제가 한참인 곳으로 슬그머니 발을 돌렸다. 어찌나 빠르게 스며들었는지, 어느샌가 다른 이들과 어울려 춤을 추고 있었다.
이본느 또한 비앙카가 좋아하는 음식을 가져오겠다며 호들갑을 떨며 총총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가스파르는 안 그래도 무거운 입을 더더욱 꽉 다물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그의 입 가장자리에 주름이 졌다.
로베르는 축제와 같이 소란스러운 것은 딱 질색이라 하였던 적이 있었고, 비앙카가 좋아하는 음식이 거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의 변명이 얼마나 면구스러운지를 알 수 있었다.
뱅상과 소뵈르는 자카리가 어떻게든 해주기를 바라는 시선을 던졌다. 물론 그들도 자카리가 잘못해서 이 사달이 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 사달이 난 원인이 자카리가 분명하고, 그들이 지금껏 보아 온 고집의 정도를 생각하면 자카리보다 비앙카가 한 수 위였다. 결국 굽히고 들어가 해결해야 하는 쪽은 자카리가 될 게 분명한데, 무엇하러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바싹바싹 말려 가며 투쟁을 계속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들의 바람은 헛발질이었다. 이번 일만큼은 자카리도 비앙카에게 지고 들어갈 수 없는 이유가 분명한 만큼, 그는 뚱한 표정으로 열렬한 가신들의 눈동자를 외면했다.
아르노 영지의 모두가 만성절을 즐기며 소리 높여 웃고 있는 와중, 백작과 그 주변만큼은 한파가 몰아닥친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직 영지에 겨울이 오기 전, 한 발짝 일찍 찾아온 겨울바람과도 같은 분위기는 축제가 끝나고 겨울까지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 * *
살얼음이 낀 분위기는 만성절이 지나고 아르노에 첫눈이 내릴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안 그래도 날씨도 추운데 성의 분위기마저 섬뜩하니, 아르노 성에서 일하는 이들은 평소보다도 더 몸을 웅크린 채 영주 부부의 눈치를 보았다.
“날씨도 추운데, 두 분이서 꼭 붙어서 다정하게 굴면 좀 좋아. 가진 자들이 더하다더니…. 안 그래도 미혼은 옆구리가 시린데.”
소뵈르는 투덜거리며 팔짱을 끼고 호들갑을 떨었다. 로베르는 그런 소뵈르를 흘겨보았지만, 딱히 소뵈르의 주장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내심 소뵈르의 생각에 동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카리의 뒤를 따라 전쟁터를 전전한 지 십여 년째. 오래 만나는 애인이 있는 쪽이 이상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셋이서 어깨동무하고 의지하며 잘 지내 왔다. 이런 자유로운 인생도 나쁘지 않다며, 백작님처럼 꽉 매여 사는 것보다 낫다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미묘한 균형도 이제 끝이었다. 가스파르와 이본느의 결혼이 잡혔기 때문이었다. 수도의 토너먼트에서 고백한 이후 슬쩍슬쩍 쉬는 틈을 타 연애를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은 내년 봄, 민들레가 피기 시작할 때쯤 결혼을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주었다.
“솔직히 내가 제일 먼저 결혼하게 될 줄 알았는데.”
“돈 좀 모았다 하면 탕진하는 네가?”
“하여튼 가스파르보다는 빨리 결혼할 줄 알았어.”
“그건 나도 동감이다.”
목석같은 가스파르에게 뒤처졌다 생각하니 왠지 자신감이 뚝뚝 떨어지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가스파르의 결혼 생활이 행복하기를 비는 마음에는 거짓 한 점 없었지만, 내심 가슴 한구석이 시린 것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로베르와 소뵈르는 서로 마주 보며 쭈그려 앉은 채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명예로운 아르노가의 기사라 하기엔 궁상맞기 그지없는 몰골이었다.
그때, 저 멀찍이 외성 입구서부터 말 한 마리가 다급하게 달려왔다. 라호즈에서부터 온 전령이었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랐는지 얼굴이 토마토처럼 얼굴이 붉었다.
“급보, 급보입니다!!”
전령의 외침에 로베르와 소뵈르가 얼굴을 굳히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을 발견한 전령은 헐떡이는 와중에도 간신히 숨을 끌어 올려 말을 이었다.
“고티에 왕자님이 낙마로 돌아가셨습니다!!”
* * *
수도에서 날아온 비보에 아르노 영지가 술렁였다. 1왕자의 죽음! 고티에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였다. 2왕자파가 있다고는 하나, 세브랑의 거의 모든 이들이 고티에를 차기 왕으로 생각했었다. 그랬던 만큼 전령이 전해 준 소식은 왕의 서거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비앙카는 혼란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고티에 왕자가 죽을 거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예상했던 바지만, 그건 앞으로 2년 뒤의 일이었다. 그리고 사인도 달랐다. 그녀가 알고 있는 사인은 전사戰死였다.
비앙카는 항시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을 원했지만,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비앙카의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원래라면 고티에가 죽는 전쟁에서 조아생도 죽고, 아버지도 죽게 되니 어떻게 보면 가족의 죽음을 피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인생이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비앙카는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간신히 조아생을 전쟁에 나가지 말라 설득하여 그의 죽음을 피하게 되었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된다면 조아생의 죽음 또한 언제 어디서, 어떻게 등장할지 모르는 일 아닌가. 물론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자카리의 죽음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게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않아 발발하는 일이다. 바로 자코브. 그의 존재….
지금까지는 그와 고티에의 관계가 고착화되었기에 오히려 이쪽에서 섣불리 나서기 어려웠다. 바꿔 생각하면, 고티에의 죽음이 시발점이 되어 자코브를 몰락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쪽에서 고티에의 암살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면….
비앙카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지만, 타고난 천성인 불안증을 억누를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목이 졸리는 기분을 느끼며 초조하게 방을 오갔다. 항상 주변인들의 죽음만 걱정하며 하루하루를 지새우는 일상이, 안 그래도 예민한 그녀를 더더욱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그렇게 비앙카의 머리가 불안과 초조함으로 뒤덮인 와중, 자카리가 비앙카를 찾아왔다. 왕자의 장례식에 가기 전에, 비앙카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방에 들어서며 그는 슬쩍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생각을 꺾을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 하여 비앙카와 사이가 틀어진 채 영지를 떠나자니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자카리는 서먹한 태도로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다녀오겠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한 달 안에는 돌아오리라.”
자카리가 먼저 말을 건 것은 그 나름의 사과의 행동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비앙카도 알았다.
자카리와 싸운 상태로 있는 것이 불안한 것은 비앙카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냥 고집을 피우고 있기엔, 세상 모든 것이 어지러이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신이 좀 더 유하게 그를 구슬리는 쪽이 나았을 것 같았다. 괜히 가시에 찔린 망아지처럼 파르르 굴었다 후회하기도 했다.
물론 지금처럼 극단적으로 상황이 변하지 않았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이요, 있을 리 없는 일이었으니, 부질없는 후회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