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자카리의 유언장(7)
그 뒤로 비앙카와 자카리 사이는 노골적으로 냉랭해졌다. 종종 함께하던 저녁 식사를 따로 하는 것은 예사요, 서로의 방에 발걸음 하는 것도 딱 끊겼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치더라도 서로 무시하기가 일수였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시야에 닿기가 무섭게 휙 몸을 돌려 자리를 떴고, 자카리도 그런 비앙카를 가만히 두었다.
언뜻 보기엔 비앙카가 화를 내고, 자카리는 그런 그녀의 화가 풀리기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아르노 백작 부부를 잘 아는 이들은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솔직히 비앙카가 성을 내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았다. 근 일 년간 비앙카가 제법 어른스레 굴었다고는 하지만, 불과 일 년 전만 해도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있으면 쉽게 화를 내곤 했으니까.
문제는 자카리였다. 평소의 그는 비앙카의 화를 풀기 위해 전심전력으로 노력했다. 천성적으로 무뚝뚝한 사내이니만큼 달콤한 말로 위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그는 비앙카가 원하는 것을 구해 오는 것으로 묵묵히 위로를 대신하곤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러나 지금의 자카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앙카가 바라는 것을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도, 자카리도 주장을 꺾지 않았다. 결국 이 사태는 두 사람의 고집 싸움이나 다름없이 흘러가게 되었다.
그 때문에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밑의 가신들밖에 없었다. 만성절 준비를 하기 위해 백작 부부 양쪽의 의견을 물어야 하는 뱅상은 아주 죽을 맛이었다.
‘아이고. 그놈의 유언장이 결국 사달을 냈구나…!’
뱅상의 주름진 미간 사이에 주름이 하나 더 얹어졌다. 해명을 하라고 자카리의 등을 떠밀어 보냈는데, 지금 꼴을 보아하니 오해를 그득그득 쌓아 주고 온 모양새였다.
‘그래. 애초에 내가 백작님께 해명하라 말씀드린 게 잘못이었지. 그리 말주변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게다가 자기변명이라니. 백작님은 침묵하면 침묵했지 변명할 분이 아니시지. 그걸 깜빡했구먼.’
뱅상은 후회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비앙카의 일에 한해서 자카리는 놀랍도록 답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기에 혹시나 하고 기대했는데,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다. 사실 뱅상이 사이에서 조율만 잘했더라도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는 않지 않았을까. 뱅상은 자책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뱅상은 자카리의 유언장에 쓰인 내용을 떠올렸다.
「비앙카가 아이가 없는 상태에서 자카리가 죽는다면, 둘의 결혼을 무효로 하고 블랑쉐포르가로 돌려보내며, 아르노가의 영지와 재물은 전부 블랑쉐포르가에 귀속되는 것.」
유언장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비앙카에게 유리하게 작성되었다. 자카리가 유언장을 작성하던 당시, 옆에서 참관하던 뱅상은 이게 말이 되냐며 끊임없이 투덜거렸다. 마님이 이 유언장을 알게 되면 자카리를 암살하려 기를 쓰고 노력할 거라고 잔뜩 비아냥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자카리는 그런 뱅상의 우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때만 해도 뱅상은 비앙카가 그 유언장의 내용을 기꺼이 반기리라 의심치 않았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남편이 전쟁터에서 죽은 뒤 금은보화와 함께 자신을 처녀의 신분으로 친정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데, 싫어하는 쪽이 이상하리라.
하지만 문제는, 요 일 년 사이에 상황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갑자기 돌변한 비앙카. 지금껏 사치와 빈둥거리는 것으로 허송세월하던 그녀가 갑자기 영지 일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더니, 후계자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그뿐이랴. 주변에서 그토록 합방하시라 입을 모아도, 비앙카가 열여덟은 되어야 잠자리를 가질 것이라 단호하게 주장하던 자카리를 기어코 쓰러트리기도 했다.
자카리는 한번 마음을 정하면 절대 바꾸지 않는 고집스러운 사내였다. 그런 자카리의 결심을 꺾다니, 어떤 방법을 썼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하여튼, 최근의 비앙카와 자카리의 사이는 좋았다. 궁중 연애처럼 깊은 사랑과 열정으로 가득한 사이는 아닐지라도, 평범하게 정략 결혼한 부부 사이 정도는 되어 보였다. 어쩌면, 그것보다는 조금 더 좋은 사이 정도.
그게 문제였다. 남녀 문제는 미묘한 것이라, 사이가 좋아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에게 유리했던 조건들이 무척 불쾌한 것이 되곤 했다. 비단 깊은 사랑에 빠진 사이가 아닐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이성적으로는 자카리가 내세운 유언장이 자신에게 유리하다는 걸 알아도, 그 유언장을 통해 아르노가에서 배제되는 기분과 함께 배신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한 배를 타지 않은 사이. 언제든지 위험해지면 내릴 수 있는 사이….
뱅상 또한 비앙카가 화를 내는 심정을 이해했다. 자카리가 뱅상에게 ‘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잊고, 복수도 하지 말며, 아르노가와 상관없는 이가 되어 다른 주인을 모시라’ 말한다면 뱅상 그 또한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을 텐데, 아내인 그녀의 입장은 어떻겠는가?
‘오히려 마님이 화를 내지 않고 유언장을 멀뚱히 받아들였다면 더 화가 났겠지…. 백작님을 남편이 아닌 그저 돈을 벌어 오는 종마 취급했다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마님을 변했다 생각한 내가 멍청이였다며, 내 머리를 쥐어뜯었을 거야.’
물론 그렇다 해서 지금 이 상황이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만약 뱅상이 피임에 대한 일을 알았더라면 이렇게 복잡하게 머리 굴릴 것 없이 당장 자카리를 찾아가 그런 헛짓거리는 그만두시라 열변을 토했을 테지만, 뱅상은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어떤 설전이 오고 갔는지 전혀 몰랐다. 그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서 화해를 도와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한참을 끙끙댔다.
‘이럴 땐…. 그래,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 봐야겠구먼. 머리도 여럿이 모이면 좀 낫겠지…!’
다짐하는 뱅상의 주름진 눈매 아래 눈이 반짝였다. 뱅상은 그 길로 바로 이본느와 다른 이들에게 달려갔다.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건 그뿐만이 아닐 테니까.
뱅상의 예상대로 다른 이들 또한 두 사람을 화해시켜야겠다는 뱅상의 뜻에 강하게 동의했다. 이본느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어떻게 화해시켜 드리죠? 원인이 백작님의 유언장과 관련된 거라면서요. 유언장 내용을 고치거나….”
“그러긴 쉽지 않을 텐데…. 게다가 백작님의 유언장은 어디까지나 마님을 신경 쓴 것이니만큼, 섣불리 고쳤다가 만약 큰일이라도 생기면 백작님을 볼 낯이 없을 것이네. 그리고 백작님이 고쳐 주시지도 않을 테고.”
뱅상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숨이 한 겹 더 쌓였다. 소뵈르가 난처한 듯 뒷목을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두 분 다 고집도 센 데다가 남의 말도 안 들으시니 이거 참….”
“백작님을 설득하느니 마님 쪽이 훨씬 낫지요. 전 백작님 설득할 자신 없습니다.”
로베르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자카리의 고집은, 혼란한 전쟁터에서는 무척 의지가 되었지만 이럴 때는 정말 난처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이본느가 불퉁히 물었다.
“마님을 설득할 자신은 있으시고요?”
“…….”
이본느의 날카로운 질문에 로베르는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가 모시는 주인이 쉬운 상대가 아니라는 건 서로가 잘 알고 있었다.
분위기가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마땅한 방도가 보이지 않으니 눈앞이 깜깜했다. 그때, 소뵈르가 손뼉을 크게 치며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만성절을 무사히 개최하는 데 주력합시다. 주변의 분위기가 밝아지고 화기애애해지면, 두 분도 화가 많이 누그러지지 않겠습니까? 뭐, 다른 방도가 없기도 하구요.”
“그랬으면 좋겠군….”
뱅상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사람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데도 딱히 유의미한 해결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뵈르 말대로, 그 수밖에 도리가 없기는 했다. 안 그래도 자카리의 명으로 수도의 수확제에 버금가는 커다란 만성절을 준비하고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기존에 준비하던 것 정도로는 부족할 것 같았다.
“저희도 전심전력으로 돕겠습니다.”
“저도 계속 마님의 기분을 살필게요.”
이본느와 세 부장이 입을 모았다. 아르노 백작 부부의 다툼은 부부 싸움을 넘어 영지 문제가 되어버렸다. 한발 빼고 있을 때가 아닌 만큼, 다들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런 일은 백작님이 알아서 하실 거라며 거리를 두는 로베르와, 비앙카와 관련된 일에는 묘하게 벽을 치는 이본느, 그리고 항상 아무것도 모르는 척 줄행랑치던 소뵈르까지 함께 눈을 빛내니 뱅상의 주름진 눈가에 슬며시 눈물이 비쳤다.
명쾌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서 끙끙거릴 때보다 다들 함께 협력하니 의욕이 났다. 좋아. 기합을 넣자. 단단히 각오한 뱅상의 눈이 번뜩였다.
* * *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갔고, 그렇게 만성절 날이 되었다. 이번 만성절은 준비하는 걸 보기만 해도 화려함이 짐작될 정도라, 영지민 모두 기대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만성절의 전야에는 불을 크게 피워 사자의 넋을 기리고 악마를 쫓는 의식을 치렀다. 성대한 화제(火祭)로 인해 늦게 잠이 들었음에도, 만성절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영지민들은 만성절 아침 일찍 영주 성으로 몰려들었다.
유례없이 커다랗게 키운 만성절은 화려함이 전무후무할 정도였다. 아르노 가문의 문양이 장식된 깃발이 이곳저곳에 나부꼈고, 한구석에는 광대들이 오늘 연회에서 부릴 재주를 점검하고 있었다. 광장에 늘어선 식탁이 얼마나 긴지, 영지민 모두가 달라붙어도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