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자카리의 유언장(6)
“그대에게 나는, 그리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내요?”
자카리도 미칠 것 같았다. 비앙카가 그에게 숨기는 비밀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진심을 믿어주지 않는 것은 생각보다 더 자카리를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나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내가 그녀를 버릴 거라고 생각한 걸까…. 내가 그녀를 돌려보낼 거라고…. 그리 생각하니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자카리의 입술 끝이 자조적으로 비틀렸다. 비앙카와 처음 만났을 때, 자카리는 이미 성인이었고 비앙카는 열 살 난 어린아이였다. 자카리는 자신이 보호자요, 어른인 만큼, 항상 비앙카를 위해 이성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것이 어른인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지금껏 애써 꾹꾹 참아 눌렀다. 비앙카와 마주하여 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화를 내지도 않으며, 과하게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어른의 여유와 든든함만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껏 쌓아 왔던 노력이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치민 울화는 파도처럼 그를 잠식했다. 내 인생에 있어서 이렇게까지 격정적이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를 믿어주지 않는 비앙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단언컨대, 십여 년의 결혼 생활 동안 비앙카에게 원망이 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이번 비앙카의 발언은 자카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역린을 건드렸다.
“내가 그리도 의지가 안 되어 이러는 것이오?”
“당신이야말로….”
비앙카가 힘겹게 운을 뗐다. 자카리의 격정적인 호소는 여심을 뒤흔들 만큼 절절했지만, 비앙카의 낯은 여전히 딱딱했다. 자카리만 억울한 것이 아니다. 할 말이 많았던 그녀의 입술에 자조의 기색이 떠올랐다.
“저에게 아이를 주지 않는 건, 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이겠지요.”
“그게 아니오! 나는 어디까지나 그대를 걱정하여…!”
“저도 똑같아요!”
비앙카가 바락 소리를 질렀다. 새된 비명이 방의 돌벽에 부딪혀 메아리쳤다.
그래. 자카리가 왜 피임하는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였다 해서 마음으로 곧장 받아들이기는 힘든 법이다. 특히나 비앙카는 어떻게 해서라도 아이를 임신해야 하는 만큼이나 더.
비앙카는 숨을 고른 뒤,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한테 확신을 줘요.”
“무슨 확신? 아이가 없어도, 나에게 있어 그대는 유일한 아내요. 너무 불안해하지 마시오.”
“그걸로는 안 돼요.”
비앙카는 입술을 악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자카리를 설득해, 보다 일찍 아이를 가져야만 하는데, 자카리의 방어는 철옹성처럼 견고했다.
비앙카가 유일한 아내라는 자카리의 확답에도 안도하지 못한 채, 그토록 아이를 갖고자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라 하여 자카리의 배려를 무참히 무시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미래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가 꾼 미래대로라면, 자카리는 앞으로 6년 뒤, 비앙카가 스물세 살일 때 전사하게 된다. 자카리는 서른여섯, 무장으로서 한창인 나이다.
자카리의 죽음은 그보다 더 이를 수도, 더 늦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이 비앙카를 선택해서 미래를 보여줄 정도이니, 결국은 찾아올 미래나 다름없었다.
비앙카에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자신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그럼으로써 자카리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그녀가 지금껏 소소히 바꿔 온 일들은 확신을 갖기엔 부족했다. 레이스, 수도행, 성인책봉…. 그 모든 것이 비앙카의 인생에 있어서 자카리의 죽음만큼이나 큰 전환점이냐 묻는다면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리라.
비앙카가 생각한 미래를 바꾸기 위한, 확실한 한 걸음은 바로 자카리와의 아이를 갖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없었던 것. 꿈에서 깨어난 그녀가 가장 절실히 바란 것.
비앙카가 회귀했다 믿었을 당시만 하더라도, 그녀는 무력하게 쫓겨나지 않기 위해 자카리와의 아이를 가질 거라 다짐했다.
그토록 강한 다짐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리가 없다. 신이 거기까지 안배했다면, 비앙카가 아이를 가지려 했던 것이 자카리의 죽음을 저지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지 않을까?
예전엔 자기가 살기 위해 애를 바랐다면, 지금은 자카리를 살리기 위해 아이를 바라게 된 차이가 있지만…. 단지 아이를 수단으로 바라는 것만은 아니었다. 자카리를 사랑하게 된 만큼, 비앙카는 자카리와의 아이를 진심으로 바라기도 했다.
물론 아이와 자카리의 죽음 사이의 관계는 비앙카의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으니, 이런 것이라도 필사적으로 붙들게 되었다.
자카리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빌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때 자카리와의 사이에서도 자존심을 세우고 줄다리기를 하던 비앙카답지 않은 생각이었다. 그만큼 간절했던 비앙카는 자카리에게 간청했다.
“당신 말대로 이제 고작 두 달 남았어요. 두 달…. 그 정도는 상관없잖아요. 난 당신이랑 이렇게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요, 비앙카.”
자카리는 그리 말하며 쓰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 서린 누그러진 온화함에, 비앙카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숨을 죽인 채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자카리는 여전했다.
“그러나 나의 신념에 고작이란 없소. 나는 그대가 열여덟이 되기 전에 품음으로써 이미 한 번 맹세를 깼소. 두 달은 금방 지날 것이오. 조금만 기다리면 돼.”
자카리는 비앙카를 어르는 듯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일말의 여지조차 없다는 자신의 뜻을 강력하게 내비쳤다. 상냥한 말투가 더욱 잔인했다.
어떻게든 설득하려 해도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쏘아 올린 화살이 그대로 자신을 향해 돌아오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어처구니가 없어진 비앙카는 소리 높여 자카리를 비난했다.
“고집불통! 독불장군! 당신은 독선가예요!”
“그대가 무슨 욕을 입에 담아도 내 마음은 변함이 없소.”
고작 두 달. 자카리의 두 달과 비앙카의 두 달은 정반대의 의미로 쓰였다. 상충되는 주장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팽팽했다. 그리고 둘 다 고집을 조금도 꺾을 생각이 없었다.
분했던 비앙카는 눈물이 차올라 벌게진 눈으로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자카리는 그런 비앙카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차마 비앙카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았다. 결국 그의 손은 어색하게 추슬러졌다.
비앙카는 차오르는 눈물을 주룩주룩 흘렸다. 그녀의 흰 뺨이 얼룩지고, 코끝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서러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비앙카는 울음기에 먹먹히 잠식된 목소리를 애써 추스르며 말했다.
“들어줄 수, 있잖아요. 흣. 어차피 당장 피임을 그만둔다 해서 임신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지금 임신해도 애를 낳는 건 내년이니까, 괜찮잖아요….”
자카리는 서럽게 우는 비앙카를 곤혹스레 바라보았다. 비앙카를 달래주고 싶지만, 그렇다 하여 비앙카의 요청을 들어줄 수는 없다는 사실이 그를 난처하게 했다.
자카리는 무참히 일그러진 얼굴로 비앙카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바닥으로 떨궈진 그녀의 고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쉬지 않고 들썩이는 어깨가, 그녀가 얼마나 서글피 우는지를 알려주었다.
자카리, 그가 그녀를 이렇게 슬프게 만들었다. 항상 웃게 하지는 못할망정, 뚱한 표정도 모자라 눈물을 쏟아 내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죄책감으로 견딜 수가 없었던 자카리는 이도 저도 못하며 이만 악물었다. 그녀는 지금 그를 꼴도 보기 싫어할 것이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지 알지 못했다. 한번 터진 눈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남들 앞에서 이렇게까지 격렬히 감정을 드러내 본 적 없던 비앙카는 당황하여 그냥 한참 동안 눈물만 쏟아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우리 마음이 조금쯤은 통했다고 믿었는데….’
작년 이맘때, 막 아르노 영지에 귀환한 자카리에게 대뜸 찾아가 후계자를 갖자 말했을 때 자카리에게서 느껴졌던 거부감이 다시금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꿈에서 깬 지 거의 일 년째가 되었지만, 실상 변한 게 그다지 없다는 걸 깨닫게 된 비앙카는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온몸의 물이 전부 빠져나간 것처럼 몸이 어지러웠다. 울다 지친 비앙카가 눈물을 훌쩍이며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비앙카의 앞에 있었던 자카리는 어느샌가 사라진 뒤였다.
비앙카는 망연히 자카리가 우뚝 서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지치고 끔찍하고 추레하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할 정도로 이 모든 상황이 엉망이었다.
비앙카는 허탈이 웃었다. 바람이 빠질 대로 빠진 공허한 웃음만이 간헐적으로 그녀의 방을 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