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자카리의 유언장(5)
유언장의 내용은 일방적으로 비앙카에게 유리했다. 너무 유리했기에 되레 의심이 계속해서 솟아올랐다.
‘과연 그것이 죽음에만 국한된 생각일까? 어쩌면, 그는 지금껏 나와 이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던 건 아닐까?’
그리 생각한 순간 비앙카의 뱃속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것이 비약이라는 건 비앙카도 알았다. 하지만 자카리를 믿은 만큼, 더 큰 배신감이 그녀를 휘감았다.
‘아냐. 그러진 않을 거야…. 하지만 남편의 죽음 뒤에 다시 처녀로 돌아가는 부인이라니. 그게 무슨 부부야? 결국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아내로 생각한 적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잖아. 항상 죽음을 경계하면서, 동시에 나와의 이별을 떠올렸다는 거야…?’
목이 멘 비앙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치밀어 오르는 숨을 몇 번이나 삼켜 넘기는 비앙카의 눈가가 벌겠다.
그렇게 비앙카가 유언장의 진의에 대해 곱씹고 있는 찰나, 자카리가 찾아왔다. 비앙카는 혼란스런 감정을 꾸역꾸역 숨긴 채, 의연하고 꼿꼿한 태도로 그를 맞이했다. 그녀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꾹 다문 입술이 그녀의 단호한 각오를 보여줬다.
“…비앙카.”
자카리의 부름에도 비앙카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은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의연한 척하려 해도 숨기지 못한 혼란과 배신감이 비앙카의 녹색 눈동자에 일렁였다.
“이래서, 이래서 피임한 거였어요?”
떨리는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충격받지 않은 척하려고 했는데, 입을 엶과 동시에 터져 나오는 서러움을 도저히 참아낼 수가 없었다.
감정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 그래 봐야 자카리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없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유언장 내용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져야 했다.
그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 머리끝까지 열이 오르니 비앙카는 스스로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새하얗게 빈 머릿속. 비앙카의 입술이 무언가를 뱉어낼 듯 움찔거렸다가도, 그 모든 걸 입안에 꼭꼭 숨겨 놓듯이 딱 다물렸다.
비앙카는 조가비처럼 딱 다물린 입을 힘겹게 열어, 더듬더듬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으려 했다.
“난…. 당신이 절 인정했다고 생각했어요. 당신의 곁에 설 자격이 있는, 당신의 아내로…. 그래서….”
“당신은 인정받을 필요 없어.”
자카리는 딱 잘라 말했다. 비앙카가 망연자실,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림자 너머 그의 얼굴은, 마치 새벽에 마주친 유령처럼 생경했다. 바늘을 찔러도 들어가지 않을 것처럼 냉정한 표정.
낯선 그의 얼굴을 마주한 비앙카의 몸에 순간 소름이 오싹 돋았다. 지금까지 그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그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는 속삭임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자카리는 전쟁을 선고하듯 딱딱하게 덧붙였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당신이 내 아내인 건 변함없으니까.”
비앙카가 예상했던 끔찍하고도 잔인한 대답들에 비한다면, 자카리의 말은 생각했던 것만큼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비앙카 앞에 쌓아 올려진 그의 강건한 벽을 느낄 수 있었다. 비앙카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아무리 말해도, 그의 앞에선 항상 제자리일 뿐이었다.
결국 참아 누르던 둑이 무너졌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비앙카는 소리 높여 처절히 외쳤다.
“당신이 죽으면! 블랑쉐포르가로 돌아갈, 그럴 아내요? 당신과 결혼했던 적도 없었던 것처럼! 그게 무슨 소용이죠? 어차피 세브랑의 모두가, 제가 당신의 아내인 걸 알고 있는데!”
“다른 이들이 아는 것과 법적 분쟁에서 자유로운 것과는 차이가 있소.”
비앙카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며 울부짖는 앞에서도 자카리는 조용히 이성을 유지했다. 자카리는 착잡한 얼굴로 물끄러미 비앙카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
절대 흔들리지 않는 자카리의 대답에 비앙카의 심장이 턱 하고 막혔다. 그에게 내 목소리가 닿기는 할까? 막막한 상황에 어떻게라도 미래를 바꿔 보겠노라 다짐한 용기가 무참히 사그라졌다.
궁지에 몰린 비앙카는 자카리를 향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자카리의 옷이 와락 주름졌다. 비앙카는 필사적으로 자카리에게 매달렸다.
“그래서…. 저를 돌려보낼 거예요? 돌려보내고 싶어요? 당신 아내라면서요…. 그런데 저에게서 영영 후계자를 보지 않을 셈이에요? 네?”
“난 그대를 돌려보낼 생각이 없소, 비앙카!”
평정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자카리 또한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진심을 왜곡해서 받아들이는 비앙카가 답답했던 그는, 기어코 저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자카리의 외침에 비앙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자카리가 비앙카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처음이었다. 소리를 질러 가며 말을 하느니 입을 다무는 그였다. 비앙카는 정말로 자카리가 소리를 지른 것이 맞는지, 얼떨떨하여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자카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까만 눈동자에 치민 불안과 초조가 더 이상 억제되지 못한 채 날뛰었다.
“유언장은 어디까지나 만약을 가정한 것이오. 나라 하여 그대를 아르노란 이름에 묶어 두고 싶지 않겠소? 하지만 나는 항상 전쟁 옆에서 살아야 하는 몸이잖소. 그런 내가 당신을 두고 세상을 뜨기라도 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자카리의 얼굴이 참담히 일그러졌다. 숨을 고른 자카리는 다시 목소리를 낮춰, 비앙카를 조곤조곤 타이르려 했다.
“난 당신이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소. 내가 없는 곳에서, 아르노 백작 부인이라는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란 말이오!”
하지만 말을 하다 북받친 분노에 저절로 목소리 끝이 올라갔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자카리의 꽉 쥐어진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손등에 투둑투둑 튀어 오르는 힘줄. 그의 팔뚝까지 힘이 단단하게 들어간 것이 비앙카의 손끝에 느껴졌다.
노호를 내지르는 자카리의 기세에 비앙카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녀의 고운 이마에 단정하게 놓여 있던 앞머리가 이리저리 흐트러져서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비앙카는 물기 그득한 연녹빛 눈동자로 자카리를 노려보았다. 자카리의 본심이 정말로 비앙카를 위해서라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남아 있었다. 비앙카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반박했다.
“다,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굳이 피임할 필요는 없잖아요. 날 돌려보낼 생각 없다면서요. 그럼 결국 당신은 후계자가 필요하잖아요….”
“당신은 어려!”
자카리는 비앙카의 말에 어처구니없다는 듯 소리를 높였다. 그는 고려할 여지조차 없다는 듯 단호했다.
“내가 욕심을 참지 못하고, 아직 어린 그대와 잠자리를 나누고 말았지만…. 그대를 벌써부터 임신시킬 순 없소. 아이를 가짐으로써 목숨을 잃는 여성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고 있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열변을 토해내는 자카리를 바라보는 비앙카는 얼떨떨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런 이유 때문에? 내가 아이를 낳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이유이기에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자카리의 팔을 꽉 붙들고 있던 비앙카의 손에 스스륵 힘이 풀렸다. 비앙카는 휘청이는 몸으로 뒷걸음질 쳤다. 금방이라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처럼 위태로운 몸짓에 자카리가 황급히 비앙카의 팔을 잡았다.
한껏 날이 섰던 분위기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섰다. 자카리는 다시 한 번 비앙카를 설득하기 위해, 부드러운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일찍 아이를 가질 이유가 없지 않소. 애초에 예정했던 대로 그대가 열여덟이 되고 나서 준비해도 충분하오. 두 달. 고작 두 달만 기다리면 되오. 무엇이 그리도 초조하시오?”
“…….”
“이번에도 말해주지 않을 셈이요?”
자카리는 쓰게 웃었다. 비앙카는 자카리가 말하는 ‘이번에도’라는 것이 지난번 수도에서 대주교와의 대화에 대해, 비앙카가 의도적으로 숨겼던 일을 신경 쓰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다.
비앙카는 침묵했다.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머리는 어지럽다 못해 깨질 듯이 아팠고, 눈은 빠질 것만 같았다. 마치 엉엉 울어서 지칠 만큼 지친 것처럼….
혹시나 자카리가 그녀를 아내로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은, 부질없는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카리는 정말로 비앙카를 걱정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미래를 생각하면 더욱 막막할 뿐이었다.
‘그가 죽어 얻게 될 자유는 의미가 없어….’
비앙카는 당장에라도 자카리의 유언장을 취소시키고, 임신의 위험성이건 뭐건 당장 피임을 거두라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건한 입장이라면, 자카리는 쉽사리 비앙카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어떻게 그를 설득하지?’
비앙카가 입을 꾹 다물고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끌러내는 것처럼, 생각은 좀처럼 가닥이 잡히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자카리의 기세가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렇겠지.”
부드럽게 비앙카를 설득시키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문자답하는 그의 목소리는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깜짝 놀란 비앙카가 고개를 치켜들며 자카리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검은 눈동자는 불이 붙은 숯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대에게 나는, 그리도 믿음직스럽지 못한 사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