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42화 (142/192)

#142 자카리의 유언장(3)

그렇게 영지에 사람이 몰려들면서, 알게 모르게 들려오는 풍문이 있었다. 아라곤 측에서 휴전 협상에 관한 이야기가 오간다는 것이었다. 이번에 교황청에서 성인을 책봉했다는 소문과 관련된 일로 추정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비앙카는 반색했다. 혹시라도 이대로 전쟁이 종전된다면…? 그녀의 마음에 기대의 싹이 터 올랐다.

하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이다. 비앙카는 조금의 틈이 생기기가 무섭게 마음을 내려놓으려 하는 자신의 뺨을 찰싹 쳤다. 혹시라든가, 만약 같은 불확실한 상황에 안도할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레이스 사업을 유지하는 한편, 전쟁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전혀 모르는 채 손을 놓고 있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짐작하고 있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비앙카를 위한 만성절 준비가 한창이지만, 비앙카의 정신은 다른 데 나가 있었다. 심지어 만성절에 입을 드레스를 새로 맞출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본디라면 만성절과 같이 영지민에게 베푸는 축제에서는 옷차림을 검소하게 하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아무도 비앙카가 만성절 드레스를 새로 맞추는 것에 대해 옳지 않다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비앙카가 드레스를 등한시하는 모습에 주변인들 모두가 전전긍긍할 정도였다.

보다 못한 뱅상이 넌지시 물었다.

“마님, 이번 만성절 때 드레스는 어찌하시렵니까?”

“드레스? 아아.”

비앙카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흐렸다. 새 드레스에 전혀 관심 없어 보이는 반응에 뱅상의 심장이 철렁였다. 아름다운 걸 쓴다는 게 기분을 좋게 만드는 거라며, 빛을 밝히고 녹아 사라질 초조차도 니콜라스에 의해 조각된 초를 쓰는 비앙카가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새 드레스에 관심이 없다는 건, 눈앞을 굴러다니는 실뭉치에 관심 없는 고양이와도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은 계속되었다. 비앙카는 심드렁히 손을 내저었다.

“내 최근 들어 드레스나 옷차림에 신경 쓸 여유가 생기지 않으니, 뱅상 그대가 적당히 맞추도록 하게.”

“제, 제가 말입니까.”

뱅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비앙카는 원체 취향이 까다롭고 옷을 보는 안목이 높았다. 조금이라도 촌스럽거나 싸구려인 것처럼 보이면 가차 없이 내동댕이친다.

그에 비해 뱅상은 옷 센스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같은 사내인 자카리의 옷을 고르는 데도 항상 비슷비슷하고 투박한 옷만 골라 왔겠는가?

그랬던 그가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의 옷을 타인에게 맡겨 본 적이 없던 그녀의 옷을 골라야 한다니? 뱅상은 갑자기 내려진 청천벽력 같은 임무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만성절을 수도에서 열리는 수확제만큼의 크기로 키우는 것보다도, 비앙카의 옷을 고르는 것이 더 고난도의 문제였다.

뱅상은 비앙카가 명령을 물러 주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나마 비앙카의 취향을 꿰뚫고 있는 이본느의 도움을 받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뱅상은 간절한 눈으로 비앙카의 시중을 들고 있던 이본느를 바라보았다. 이본느는 어색하게 웃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는 관심 없는 표정으로 테이블에 놓인 누가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누가가 쓰러지며 견과류와 건과일로 화려하게 장식된 면이 위로 드러났다.

누가는 꿀과 달걀, 견과류 등 비싼 재료를 아낌없이 사용한, 비앙카와 자카리만이 먹을 수 있는 귀한 간식이었다. 하지만 그리 귀한 간식이면 무얼 하나. 누가는 비앙카의 입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방치될 뿐이었다. 누가를 한 조각도 먹지 않은 비앙카는 뱅상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만성절은 유난히 크게 준비하는군.”

“예예. 백작님께서 크게 개최하시길 바라셨습니다.”

“백작님이…?”

“예. 최근 아라곤이 얌전하지 않습니까. 종전 이야기도 오가고 있고요. 이럴 때 영지민들의 사기도 키울 겸, 마님께 볼거리도 만들어 드릴 겸 하여 크게 열어 보라 명하셨습니다.”

뱅상은 가슴을 활짝 펴고 뿌듯함을 가득 담아 답했다. 백작님이 마님을 이렇게 아끼시니, 마님도 좋아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비앙카의 얼굴에는 오히려 그늘이 드리웠다.

“하지만 확실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만약 만성절을 치르고 있는 와중에 아라곤이 국경을 넘기라도 하면….”

“그러면 백작님은 바로 출전하셔야겠지만, 걱정 마십시오. 언제나처럼 아르노 성까지 침범하지 적은 없을 거고, 백작님은 승전 소식과 함께 돌아오실 테니까요.”

뱅상은 비앙카의 우려가 기우라는 듯, 밝게 답했다. 되레 비앙카가 영지의 사정에 이렇게까지나 신경을 쓴다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러고 보니 우리 영지의 방어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가?”

“일단 축성 당시 백작님이 신경을 많이 쓰셔서 지었기 때문에, 난공불락까지는 아니어도 제법 튼튼합니다. 영지는 항상 풍요로우니 식량 비축도 충분하고요. 백작님이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실 때까지는 버틸 수 있습니다. 돌아오신 영주님이 적을 물리쳐주실 것이고요. 너무 걱정 마십시오.”

“…….”

마냥 자카리를 기다리라고? 그가 돌아오기까지? 그가 죽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뱅상을 비롯한 그 누구도 자카리가 전쟁에서 죽으리란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자카리 본인조차. 그러니 비앙카가 전쟁에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처구니없다 느끼는 것이겠지.

비앙카는 침묵했다. 비앙카는 뱅상처럼 막연히 잘될 거라는, 긍정적인 미래를 꿈꿀 수가 없었다. 불행하고도 끔찍한 미래를 보고 온 산증인이 아니던가. 뱅상이 마음을 놓는 전제 조건인 ‘자카리의 귀환’부터 확실시할 수 없는, 최악의 미래를 보고 온 선택받은 자.

본디 영주 부인의 역할은 영지민을 보살피고 길쌈을 관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남편이 부재할 때 영주인 남편의 역할도 대신해야만 했다. 하지만 과거의 비앙카는 그런 일에 소홀했고, 영지의 방어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이나 다름없었다.

오죽했으면 자카리가 죽고 나서, 아르노 영지를 빼앗으러 온 위그 자작에게 그대로 영지를 내어 주었겠는가. 페르낭에 대한 부정이 촉매제가 되었다고는 하나, 만약 비앙카가 영지를 방어할 생각이 있었더라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앙카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이라 하여 과거와 크게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비앙카는 제 일을 뱅상에게 미루고 있었다….

만약…. 아주 만약을 생각하면…. 비앙카는 지금처럼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자카리의 대역만큼은 뱅상에게 맡길 수 없으니까.

영주가 포로로 붙잡힌다면, 석방금 마련과 교단으로부터 면죄부를 발급받는 일 모두 부인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나마도 자카리가 살아 있다는 전제하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비앙카는 숨을 들이켰다. 전쟁 시 부인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영주가 살해되었을 때 유언을 집행하고, 아이들을 후계자로 키우는 일이었다.

과거의 비앙카는 유언 집행이 어떤 건지, 자카리의 유언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유언을 모르니 그의 유언을 집행해야 한다는 명분도 힘을 잃었고, 아이가 없으니 후계자를 내세울 수도 없었다. 그렇게 비앙카는 무력하게, 그리고 치욕적으로 아르노 영지에서 내쫓겼다.

이번에도 그럴 수 없다. 자카리를 죽게 할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 하여 다른 것을 대비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비앙카는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녀만이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프란시스의 말이, 그녀를 속박하듯 옭아매었다.

무거운 입을 힘겹게 뗀 비앙카는 침중하게 물었다.

“뱅상. 지금 백작님의 유언장을 확인할 수 있겠는가?”

“…가능은 하십니다만…. 굳이 지금 확인하셔야 할까요?”

뱅상이 주저했다. 되묻는 그의 목소리 끝에 서린 불안감. 명백히 유언장을 보여주길 꺼리는 모습이었다. 마치 비앙카가 그걸 확인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듯이.

도대체 왜? 비앙카는 자카리의 아내였고, 그의 유언장을 확인할 의무와 권리가 있었다. 비록 지금껏 버려 두었던 의무지만. 좌우지간 자카리와 뱅상 또한 그 사실을 아는 만큼, 비앙카가 볼 것을 염두에 두어 유언장을 작성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유언장을 숨긴다? 그렇다면 유언장에 무언가가 있다. 비앙카가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부득불 집어넣었으되, 비앙카가 봐서는 안 되는 무언가가….

비앙카의 마음속에 의심의 목소리가 울렸다. 만약 그렇다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뱅상이 자카리에게 오늘의 일에 대해 말하고 유언장의 내용을 바꿀 수도 있다. 비앙카는 뱅상을 다그쳤다.

“굳이 지금이어야 하네. 당장 가져오게. 백작님에게 달려가 내가 유언장을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보다도 먼저. 알겠나?”

“하지만 마님….”

“가스파르!”

비앙카가 소리를 높였다. 비앙카가 부르기가 무섭게 호위로 한 발짝 빠져 있던 가스파르가 비앙카의 앞에 부복했다. 비앙카는 가스파르를 서릿발과도 같은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갑작스레 돌변한 방 안의 분위기에 주변 모두가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지금껏 비앙카가 고용인에게 이렇게까지 화를 낸 적은 없었다. 그녀는 예민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었지만, 기본적으로 감정의 기복이 큰 편은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목소리를 높이기보다 빈정거리는 성격이었던 만큼, 그들은 이 일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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