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41화 (141/192)

#141 자카리의 유언장(2)

“여독이 남아 있으니, 오늘은 일찍 쉬고…. 영지를 살피는 건 내일 해도 충분하오. 뱅상이 어련히 알아서 해놓았을까. 지금껏 몇 달간 자리를 비워도 괜찮았으니, 하루 정도는 더 쉬어도 괜찮소.”

“쉬십시오, 마님. 제가 내일 보시기 좋게 정리해두겠습니다.”

자카리의 입안의 혀처럼 구는 뱅상이 재빠르게 나섰다. 자카리의 속내를 전부 짐작하진 못해도,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만큼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그러면 그럴까요.”

비앙카는 그런 속내를 짐작 못한 듯, 자카리의 제안에 천연덕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자카리로선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비앙카는 아르노 성의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무려 반년만의 귀환이었다.

* * *

성에 돌아오고 오래지 않아 그들은 일상에 녹아들었다.

자카리는 자리를 비운 동안 영지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보고받았다. 올해 포도 농사가 풍년이라 내년 와인이 풍족할 것이라는 사소한 것부터 국경의 아라곤의 정세, 그리고 그들이 수도를 떠나고 나서 무슨 소문이 돌고 있는지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고…?”

한 발짝 늦게 성인에 관한 소문을 듣게 된 자카리는 의아함에 미간을 찌푸렸다. 갑작스레 성인이라니…? 백여 년도 전에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듣긴 들었다만…. 자카리는 성인에 관한 소문을 들고 온 로베르에게 자세한 내용을 캐물었다.

“확실한 이야기인가? 성인은 누구라던가?”

“성인이 누구인지는 교단에서 함구령을 내려 알 수 없었습니다만…. 교황청에서 직접 통보한 사실입니다.”

“성인의 존재를 아는 것이 교단뿐이라…? 혹시 세브랑에 영향을 끼치려는 교황청의 속셈은 아닌가?”

“그건 아닌 듯합니다. 성인의 존재만 공표한 뒤 조용하니까요. 영향을 끼치려는 움직임은 없습니다.”

갑작스러운 성인의 등장과 교황청의 개입이 과연 세브랑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자카리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세상 사람들이 그러하듯, 자카리와 로베르, 소뵈르 또한 비앙카와 성인을 연결 짓지 못했다. 비앙카가 교회에서 대주교를 만났던 일만 가지고는 그녀를 성인과 연결 짓기엔, 그들이 알고 있는 비앙카는 성인과는 제일 거리가 먼 이였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를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그녀를 알고 있는 모두가 검소, 혹은 자애로운 성격과 거리가 멀다는 것에 동의했다. 비앙카, 본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 누가 그녀에게 성인이라는 이미지를 겹쳐 보겠는가?

성인이 자신의 아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자카리는 곰곰이 국가 정세에 대해 생각하며 창밖을 보았다. 비앙카가 산책 중이었는지 이본느, 가스파르와 함께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멀리나마 비앙카를 발견한 자카리의 입꼬리 끝이 살짝 올라갔다.

로베르는 계속해서 보고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아라곤에서 잠시 주춤하더라고요. 아라곤의 전선이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아이고, 다행이네요. 십 년 만에 만끽하게 되신 신혼인데…. 바로 전쟁으로 출전하기라도 했다가는 마님이 속상해하지 않겠습니까.”

소뵈르가 근질거리는 입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그런 종류의 농담과는 거리가 멀었던 로뵈르의 얼굴이 와락 찡그려지며, 소뵈르에게 핀잔을 주었다.

“경박하다, 소뵈르.”

“사실이잖아.”

소뵈르와 로베르는 투닥이며 자잘한 말다툼을 했다. 둘이 그러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던 만큼, 자카리는 그런 그들의 말싸움을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자카리의 시선이 창밖의 비앙카를 향해 따라붙었다.

그사이에 벌써 산책을 그만둔 모양인지, 비앙카는 총총 성안으로 들어섰다. 비앙카의 모습이 시야에서 점점 사라졌다. 그것이 괜스레 아쉬웠던 자카리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아직도 투닥이는 두 사람을 향해 냉정히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아라곤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말아라.”

“네!”

투닥이던 것이 거짓말처럼, 두 사람은 입을 모아 외쳤다. 자카리는 내정을 맡은 뱅상에게 질문의 화살을 돌렸다.

“뱅상. 그러고 보니 만성절 준비는 잘 되고 있는가?”

“물론입니다.”

11월 1일 만성절은 모든 성인을 축하하는 날로, 영주가 영지민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날이었다. 그날 얼마나 베푸는지에 따라 영주의 너그러움을 알 수 있는, 영지에 있어서는 중요한 날이었다.

철두철미한 일 처리를 자랑하는 뱅상이 확신에 넘쳐 대답하는 걸 보아하니, 만성절 준비가 완벽한 모양이었다. 자카리는 잠시 생각하듯 책상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더니, 슬며시 운을 떼었다.

“만성절의 규모를 좀 키우는 건 어떠한가?”

“작년에 빚어 둔 포도주도 넉넉하고, 올해 밀 농사도 풍년이었다 보니 가능은 합니다만….”

뱅상은 굳이 그럴 이유가 있느냐 묻는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재정을 크게 축내는 행사다 보니, 영지의 재정을 관리하는 뱅상이 그리 묻는 것도 당연했다.

자카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여상하게 답했다.

“요즘 비앙카가 기운이 없어 보이더군. 주변에 흥미도 없고 말이야…. 그런 식으로라도 기분 전환이 되면 좋을 텐데.”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 명을 내리시지 않은 지 꽤 되었지요….”

뱅상이 턱을 매만지며 진중하게 중얼거렸다. 고뇌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진지하기 그지없었다. 자카리는 침중한 목소리로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수도에서 떠나기 전에는 사흘 전에 입었던 옷을 입고 나타나기도 했네.”

“네? 마님이요? 사흘 전에 입었던 옷을요?”

자카리의 말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기겁했다. 그들은 자카리가 비앙카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꿰고 있는 것보다, 비앙카가 같은 옷을 근시일 내에 또 걸쳤다는 사실에 더 깜짝 놀랐다.

“마님께서…. 수도에서 무슨…. 일이라도….”

뱅상은 떠듬떠듬, 간신히 물음을 뱉어냈다. 주름진 낯이 희게 질렸다. 비앙카가 영지를 둘러보겠다 말했을 때보다도 더 경악에 질린 얼굴이었다.

자카리가 고개를 숙여 책상을 노려보니,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깊은 눈매 위에 진 음영은 심각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유를 알고 싶은 건 자카리 쪽이었다. 그녀에게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어떻게 해서라도 답을 들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주나 지나버렸으니 인제 와서 물어보기도 그랬다. 오히려 자카리의 지적에 더 꼭꼭 숨기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자카리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없었던 건 아니다만…. 하여간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마음이 심란한 듯하니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게 하게.”

“예, 알겠습니다.”

뱅상은 결연히 답했다. 그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마님의 우울한 징조가 시작된 것은 수도를 떠나기 직전이었던 듯한데…. 혹시 수도의 화려한 생활이 마음에 들어, 영지로 돌아오는 게 못마땅하셨던 건 아닐까? 게다가 수도에서 수확제를 보지 못하고 내려오게 되었으니, 불만이 있으신 것도 당연하지….’

애초에 수도를 일찍 떠나게 된 계기가 비앙카의 주장 때문이었고, 비앙카는 딱히 수도 생활에 관심이 없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뱅상에게는 무척이나 그럴듯한 추론처럼 느껴졌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이 딱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수도의 수확제에 버금가도록, 만성절을 유례없이 크게 키우자. 그러면 마님께서도 영지 생활에 금방 적응하실 수 있겠지.’

비앙카를 완연히 아르노 영지의 백작 부인으로 받아들인 뱅상은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만성절을 키우려 하니 갑자기 일이 늘어났지만, 그가 누구던가. 일당백의 집사. 이 정도쯤은 거뜬했다.

물론 본디 만성절을 총괄하는 것은 영지의 마님인 비앙카의 몫이었지만, 그곳에 있는 그 누구도 그런 것에 대해서는 입 하나 벙긋하지 않았다. 당연히 뱅상이 해야 하는 일인 것처럼. 심지어 뱅상, 본인조차도.

* * *

만성절 준비가 한창인 와중, 아르노 영지에는 손님이 줄을 이었다. 다름 아닌 레이스를 찾는 귀족의 심부름꾼들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접촉이었지만,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었다. 비앙카는 선점 효과에 따른 가치를 참고하여 적당한 시세에 레이스를 팔았다.

비앙카는 쩨쩨함과는 거리가 먼 주인이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돈을 쓰는 데 아낌없었던 것처럼, 레이스가 팔리는 만큼 레이스를 짜는 하녀들에게도 넉넉히 베풀었다.

풍족한 보상과 더불어 자신들이 만든 레이스가 칭찬받는 소리를 들으니, 직공들은 더욱 열의에 차서 레이스를 뜨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비앙카는 하녀들을 진두지휘하여 레이스 산업에 박차를 가했다.

영지로 물밀듯 들어오는 재화에 뱅상의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레이스 사업을 기획한 비앙카보다도 더 이번 사업 성공을 기뻐하는 이가 있다면, 뱅상, 바로 그이리라.

이런 식으로 영지를 찾는 사람이 점차 불어나면, 아르노 영지는 상업 도시의 기능도 갖출 수 있으리라. 물론 레이스만 갖고 그렇게 되는 것은 무리일 테지만, 꿈을 꾸는 건 자유 아닌가. 꿈에 부푼 뱅상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얼마나 히죽히죽 웃고 다녔는지, 복도에서 그와 마주친 하인들이 흠칫흠칫 놀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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