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비밀의 성인(7) / 자카리의 유언장(1)
자카리와 비앙카가 수도를 떠난 지 열흘쯤 뒤. 그사이 수도 라호즈에는 신묘한 소문이 돌았다. 바로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성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평소라면 성인의 등장을 널리 알렸을 교단에서도 성인의 정체를 꼭꼭 숨겼다. 성별도, 신분도, 나이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은 성인이 세브랑 출신이며, 성인이 원하면 교단에서는 성인의 의지에 따라 행동할 거라는 것 정도였다.
몇백 년 만에 나타난 성인의 존재. 아무리 꼭꼭 숨겨졌다고는 하나 성인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리가 없다. 사람들은 이것저것 추측해대기 시작했다.
영지도 없는 몰락한 남작가의 한량은 아닐까. 부유한 상인의 자식일지도 몰라. 성인이라 하여 귀족이라는 법은 없지. 양치기일 수도 있는 일이야.
사람들의 추측은 끝도 한도 없었다. 하지만 수도 없이 나열된 것 중, 비앙카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게 사치를 일삼는 귀족 부인은 성인과 가장 거리가 먼 존재였다.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가장 크게 반응한 것은 바로 아라곤이었다.
지금껏 교단에서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세브랑 출신인 성인이 나타났으니…. 교단에서는 성인의 뜻을 따르니, 자칫하다가는 아라곤이 교단의 성기사단까지 상대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릴 수 있었다. 아라곤 내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이번에 세브랑과 결혼으로써 동맹을 맺은 카스티야는 아라곤과 정반대에 있는 나라라서 그다지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교단은 달랐다.
성기사단이 강한 군대기 때문은 아니었다. 다만 교단을 믿는 신도들이 많았고, 그들은 성기사단에게 칼을 들이밀기를 주저했다. 아라곤 또한 교단을 믿는 이들이 많았다.
아라곤은 세브랑을 침략하던 횟수를 점차 줄였다. 자코브를 왕위에 올리고 세력을 키울 생각이 만만이었다 하나 지금은 시기가 좋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미치고 팔짝 뛰겠는 것은 다름 아닌 자코브였다. 자코브는 비밀리에 성인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애썼다. 사람을 풀고 교단을 만나 보고 별짓을 다했지만, 그는 성인의 발끝도 찾을 수가 없었다.
비앙카가 용기를 내, 내디딘 한 발짝으로 세계의 흐름이 변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세계가 비밀스러운 성인의 존재로 시끄러운 것과 달리, 영지로 돌아가는 아르노가의 사람들은 수도에 들끓은 소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영지가 저 멀리, 눈앞에 펼쳐졌다. 푸르렀던 들판은 누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떠났던 봄이 지나고 여름도 지나,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오는 어느 날이었다
* * *
비앙카와 자카리가 영지에 도착한 것은 9월 수확제의 며칠 뒤, 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그들이 진정한 부부가 되었다는 소문이 그새 퍼졌는지, 영지민 모두가 방긋 웃은 채 백작 부부 내외를 반겼다.
말에서 훌쩍 내린 자카리는 마차에 있는 비앙카를 에스코트하기 위해 다가갔다. 비앙카가 자카리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마차에서 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뱅상이 그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긴 여행 고생하셨습니다, 백작님. 마님.”
“영지를 지키느라 수고했네, 뱅상.”
“응당 해야 하는 일인 걸요.”
“영지에 별다른 일은 없었지?”
“네.”
뱅상과 가볍게 영지 사정에 관해 묻던 자카리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비앙카의 팔뚝을 친밀하게 잡으며 걱정스레 덧붙였다.
“힘들 텐데, 들어가 쉬시오.”
비앙카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내 마차에 있었던 걸요. 별로 힘들지 않아요. 짐 정리하는 것만 지시할게요.”
“이본느가 알아서 할 것이오.”
“맞아요, 마님. 그러다가 쓰러지기라도 하면 큰일 나요.”
이본느가 넉살 좋게 끼어들었다. 예전의 이본느였다면 입을 꾹 다문 채 주인 부부의 눈치를 보았을 테지만, 수도에서 많은 일이 있었던 이후 어느 정도 발언을 해도 되는 위치에까지 올라섰다.
그런 이본느와 백작 부부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뱅상은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눈썹이 있는 힘껏 치켜 올라가자, 안 그래도 주름진 이마에 주름이 더 늘었다.
합방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았는데, 두 눈으로 본다 하여 냉큼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정말, ‘그럴듯한’ 부부처럼 보였다.
심지어 비앙카와 사이가 좋지 않은 로베르조차도 이번 여행이 그리 나쁘진 않았는지 표정이 밝았다.
뱅상은 허, 참거리며 헛기침을 연발했다. 이번 수도행이 아르노 영지에 있어 큰 변화를 불러일으킨 게 분명하다. 뱅상은 수도에서 무슨 일이, 어떻게 있게 된 것인지 세세하고도 자세히 물어봐야겠다 다짐했다. 그리고 그런 일에는 소뵈르가 딱이었다.
뱅상은 소뵈르를 흘끔였다. 소뵈르는 앞으로 삼 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뱅상에게 수도에서 반년 남짓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해야 하는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영지로 돌아온 기쁨에 시시덕거릴 뿐이었다.
그때 쭈뼛대며 비앙카에게로 다가온 이들이 있었다. 영지의 아이들이었다. 비앙카가 레이스를 알려준 여인들의 자식들인 듯, 한 발짝 너머에 그녀들이 활짝 웃고 있었다.
“마, 마님. 어, 어서 오세요.”
그들의 제일 앞에 있던 것은 바로 니콜라였다. 그 나이 때는 하루하루가 다르다더니, 비앙카가 마주한 니콜라는 키가 반 뼘은 더 큰 것 같았다. 먹은 게 전부 키로만 간 모양인지 삐쩍 마른 건 여전했다. 사슴이 껑충이듯, 다가오는 소년의 만면엔 미소가 가득했다.
니콜라는 대표로 꽃다발을 비앙카에게 건넸다.
“아이들하고 숲에서 제, 제일 예쁜 꽃만 모았어요.”
혹시나 비앙카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나 눈치 보는 눈동자를 데록데록 굴렀다. 그들의 우려와 달리, 비앙카는 흔쾌히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고맙구나.”
비앙카의 웃음에, 뻣뻣하게 굳은 채 눈치 보던 아이들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돌았다. 배시시 웃는 아이들이 퍽 귀여웠던 비앙카는 그들의 머리를 차례로 가볍게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와중 니콜라의 차례가 되었다. 니콜라의 키가 너무 껑충 컸던지라, 비앙카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대신 어깨를 토닥였다. 이번 수도에서 대주교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니콜라의 초 덕분이었던 만큼, 그에 대해 치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수도에서 네 초가 큰 역할을 했단다.”
“정말요, 마님? 영광이에요!”
니콜라는 반색을 했다. 주근깨 진 뺨이 광대와 함께 히죽이 올라갔다. 니콜라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얼굴이 시뻘게져서 말을 쏟아냈다.
“저, 저 안 그래도 마님께 헌정하기 위해 조각 열심히 했어요. 양초 말고 다른 것도 해 보는 게 어떻냐는 집사님의 말씀에 나무도 조각해 봤고요….”
원래의 니콜라였다면 계기가 계기인 만큼 양초만 고집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나만 하다가 비앙카가 질릴지도 모른다는 뱅상의 말에 화들짝 놀라 다른 조각에도 손을 뻗게 되었다.
듣고 있던 뱅상이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아마 올 겨우 내내 마님이 쓰실 양초는 니콜라의 조각 양초로 충분할 겁니다.”
비앙카의 명령 때문에 니콜라가 양초를 원하면 얼마든지 제공해야 했던 만큼, 한때 있었던 양초가 전부 동나 버린 적이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든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어떻게? 비앙카가 명령을 내렸으니 뱅상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비앙카가 질릴지도 모른다는 건 니콜라가 알아서 다른 재료로 눈을 돌려주길 바라며 던진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는데, 생각 외로 효과가 좋아서 깜짝 놀랐다.
물론 뱅상이라 하여 거짓말을 한 건 아니었다. 그만큼, 지금껏 그가 지켜봐 온 비앙카는 소비에 한해선 무척이나 까다롭고 변덕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비앙카는 나뭇조각에 관해 관심을 보였다. 아무래도 초에 조각하는 것은 섬세해질 수는 있지만, 커다란 규모의 웅장함을 드러내기는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다른 조각 한 것도 궁금하구나. 언제 보여줄 수 있겠니?”
“물론이지요!”
니콜라는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조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와중, 한편에 비스듬히 서 있던 자카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툭, 말을 건넸다.
“비앙카.”
“네?”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어떻소. 내가 걱정돼서 그러오.”
자카리는 자신이 말해놓고도 면구스러운 변명이라 생각했다. 마치 비앙카의 관심을 저에게 돌리려는 것 같은…. 질투를 애써 숨긴, 그런 변명.
자카리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상대는 고작 열 살 난 어린애일 뿐인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질투를 한단 말인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자카리와 비앙카의 나이 차이가 열셋이었다. 그에 비하면 일곱 살의 나이 차이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숫자로 늘어놓아 보니 더욱 나이 차가 생생해졌다. 자카리의 입이 꾹 다물렸다.
하여튼 다소 민망스러운 변명을 해서라도 비앙카의 관심을 자신에게 돌릴 수 있다면, 몇 번이고 민망스러운 짓을 할 용의가 있었다. 자카리는 재차 비앙카에게 말을 걸었다.
“여독이 남아 있으니, 오늘은 일찍 쉬고…. 영지를 살피는 건 내일 해도 충분하오. 뱅상이 어련히 알아서 해놓았을까. 지금껏 몇 달간 자리를 비워도 괜찮았으니, 하루 정도는 더 쉬어도 괜찮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