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비밀의 성인(3)
“비앙카.”
“오셨어요?”
“으음.”
비앙카가 돌아보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입이 다시 다물렸다. 용기를 내어 운을 뗀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마치 꿀을 바르기라도 한 듯, 입술이 서로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자카리는 괜히 애꿎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창 근처에서 자카리를 돌아본 비앙카는 자카리가 말이 없자 금세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한 공간에 있지만,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릴 것 같은 느낌…. 자카리가 바라보고 있는 비앙카는 본인이 아니라 그림 속 인물 같았다.
그런 비앙카의 태도에 안달이 난 자카리는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날씨가 부쩍 추워. 창가에 있지 말고 이리 오시오.”
“아직은 괜찮아요.”
비앙카가 여상스레 답했다. 아직 여름이 지나지 않았으니, 밤이라 해도 그리 춥지는 않았다. 그런 반응을 바란 것이 아니었던 자카리의 입술이 꽉 다물렸다. 전쟁에서 군이 수세에 몰려도 이렇게 초조해지지는 않았으리라. 자카리의 까만 눈동자가 조급함에 흔들렸다.
자카리는 웃으며 비앙카를 향해 다가갔다. 하지만 초조한 마음 때문일까. 그의 얼굴은 무뚝뚝할 뿐이었다. 다정하게 들리기 위하여 꾸민 목소리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창밖에 무어 재미난 거라도 있소?”
“그건 아니지만…. 죄송해요. 제가 요즘 자주 멍해지네요. 향수병인가 봐요. 얼른 아르노 영지로 돌아가고 싶어요.”
비앙카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담담했다. 흠잡을 곳 없이 태연한 말투였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원하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타는 듯한 목에 침을 꿀꺽 삼킨 자카리는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말을 걸었다.
“요즘 그대 생각이 많아 보여.”
“제가요?”
“으음.”
비앙카가 천연덕스레 되묻자, 자카리는 다시 신음을 흘렸다. 일 보 전진, 이 보 후퇴. 전선에서도 이런 속도로 나아갔다가는 보급품이 동나는 것이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차라리 보급품이 떨어지는 쪽이 낫지, 지금 이 순간 떨어져 나가는 것은 자카리의 정신력이었다.
그런 자카리의 속내를 모르는 비앙카는 살짝 웃었다.
“별거 아니에요. 그냥….”
자카리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괜히 초 쳤다가 비앙카의 말 한마디가 그의 목소리에 먹히기라도 하면, 그렇게 비앙카가 다시 입을 다물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자카리가 조용히 비앙카의 말 한마디를 기다리는 사이, 비앙카의 입술이 한참 만에 느릿하게 떨어졌다.
“아라곤과의 전쟁이 걱정되어서요. 당신은 또 출전하겠죠?”
“…그렇소.”
“그렇죠…. 당신이 출전하지 않으면 세브랑이 위태로우니까요.”
비앙카의 연록빛 눈동자가 아련아련했다. 애초에 기대조차 안 했다는 듯 홀로 대답하는 그녀에게선 거리가 느껴졌다.
답을 들었건만, 오히려 자카리는 더욱 영문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아라곤과의 전쟁? 출전? 비앙카의 질문은 급작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자카리와 전쟁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이었다. 비앙카와 결혼하기 전에도, 그리고 결혼하고 나서도….
그런데 갑자기 왜?
도대체 대주교와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냐는 말이 자카리의 목 끝까지 치밀었다. 하지만 끝내 뱉어내지는 못했다. 그녀와 대주교의 대화가 궁금한 이상으로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대주교를 만나 기적의 사례에 관해 물었다는 말에, 자카리는 비앙카가 기적을 바랄 정도로 절실한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빈곤한 상상력이었지만, 논리적으로는 그럴듯했다.
다만 얼마나 힘든 소원이기에 기적에까지 기대려 할까. 비앙카는 바라는 것을 요청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편이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항상 직설적으로 말했다.
그런 그녀가 자카리에게 요청하지 않은 것. 신에게 바라는 기적…. 그것인즉슨 바로 자카리가 들어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었고, 자카리가 두려운 것 또한 바로 그것이었다.
자카리는 지금껏 비앙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들어주려 노력했다. 결혼 초기, 남작이었던 시절 비앙카가 갖고 싶다 한 물건들을 제대로 구해주지 못한 것을 아직 신경 쓰고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백작 위에 오른 뒤로는 비앙카의 요구를 대체로 다 들어줄 수 있게 되었다. 그녀가 갖고 싶어 하는 보석함, 향신료, 옷감, 모피….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어도, 속으로는 얼마나 뿌듯했던가!
그랬던 만큼, 새삼스레 자신이 비앙카를 위해 해 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고 속상한 일이었다.
비앙카가 대주교를 만난 일이, 혹시 자신의 출전과 관계 있는 것은 아닐까?
비앙카가 넌지시 건넨 말에서 풍기는 느낌이 그러했다. 자카리의 추론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감이었다. 하지만 실제와 그리 다르지는 않았다.
비앙카가 원하는 것이 자카리의 출전을 막는 것이라면, 자카리로서는 절대 들어줄 수 없었다.
세브랑을 위한 충심 때문은 아니었다. 그건 그다지 중요치 않았다. 그가 전쟁에서 승리와 함께 들고 오는 보상이 사라짐으로써, 비앙카가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는 사실이 더 중했다. 기사답지 않은 생각이라 해도 좋았다.
비앙카의 희고 가는 손가락은 쉽게 얼어 겨울에는 항시 손난로를 쥐고 있어야 했고, 그녀의 어깨를 감쌀 모피는 그녀의 부드러운 피부에 걸맞은 고급품이어야 했다. 그녀가 겨울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동상이라도 걸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자카리는 골백번도 더 전장에 나서리라.
그렇기에 자카리는 더욱 깊게 캐어묻지 못했다. 자신이 절대 들어줄 수 없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전쟁에 나가지 말아달라 한다 하더라도, 전쟁에 나가지 않겠다 말할 수 없는 제 처지가 한심했다.
그럼에도 우스운 것은, 숨겨진 진실과 직면하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비앙카가 무언가 비밀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강한 피로를 느낀다는 것이었다. 확답받을 수도, 그렇다 덮고 넘어갈 수도 없었던 자카리로서는 넌지시 돌려 묻는 것이 한계였다.
“무엇이 그리도 심란하시오? 만약 그대의 마음이 편해질 수만 있다면 내 할 수 있는 일은 뭐든 하리다.”
세브랑의 영웅, 철혈의 기사, 전장의 검은 늑대라는 칭호가 우스울 정도로 용기 없고 무력하다 못해 한심하기까지 한 몰골이었다. 자카리는 억지로 입술 끝을 잡아 올려 웃으면서 여유를 가장했다.
비앙카라 하여 자카리가 넌지시 묻는 것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모를 리 없었다. 누가 봐도 교회에 다녀온 그녀는 평소와 달리 이상했을 테니까.
하지만 자카리에게 상황을 밝힐 수 없었다. 자신이 없고 면목이 없었다. 과거가 아닌 꿈이라고는 하나, 비앙카가 어떤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카리를 배신했고 외면했는지는 아직도 생생했다. 그랬던 그녀가 인제 와서는 성인이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자카리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 그 정도로 염치없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얼른 아르노로 돌아가요.”
비앙카는 어색하게 웃으며 자카리의 질문을 무마했다. 하루라도 빨리 아르노로 돌아가야, 자카리가 성인 책봉에 관한 소식을 듣게 되면 어쩌나 불안해하며 초조해하는 마음도 좀 가실 테고, 심란한 마음도 가라앉을 것이다.
그리 말을 돌린 비앙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에 서린 진실성은 한 줌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앙카도 알고 자카리도 알았다.
* * *
같이 교회에 다녀온 뒤로도 카트린은 종종 비앙카를 찾아왔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바닥에 바닥으로 침잠하는지라, 비앙카는 카트린의 방문이 반가웠다.
서로 나누는 이야기는 시답잖은 것들이었다. 대화 화제에 자주 오르는 것은 주로 비앙카의 건강에 관한 일이었다. 카트린은 오델리 왕녀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다며, 다만 왕녀인 만큼 거동이 자유롭지 않아 자주 찾아올 수 없다는 말을 전했다.
카트린은 말주변이 좋다거나 재밌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조용했고 기분 나쁠 일이 없었다.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흘러가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영지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다. 비앙카가 자카리에게 빨리 돌아가고 싶다 한 덕분인지, 예상보다 준비가 끝난 시간이 빨랐다.
이별은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렇다 하여 덜 슬픈 것은 아니었다. 블랑쉐포르가의 식구들은 일부러 배웅하러 나오지 않겠다 했다. 오랜만에 만난 자식과 헤어지며 속상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를 배웅하러 온 것은 카트린뿐이었다. 카트린은 양손으로 비앙카의 손을 꼭 잡으며 안타까워했다.
“비앙카, 영지로 돌아가면 종종 연락해요.”
“카트린이야말로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둘은 그사이 이름을 부르는 사이로 발전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또래 친구라는 것만으로도 둘 사이는 부쩍 가까워졌다.
“비앙카.”
저 멀리서 말에 탄 자카리가 비앙카를 불렀다. 그새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정말 가 봐야겠어요. 그럼 카트린, 건강해요.”
“비앙카도 항상 건강해요. 무리하지 말고요.”
카트린의 눈빛에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그동안 골골대는 모습만 보여준 것 같아 민망했던 비앙카는 살짝 웃고는 이본느의 손에 기대어 마차에 올랐다.
비앙카가 완전히 마차에 타는 걸 확인한 자카리가 손을 들어 지시를 내렸다. 자카리의 손짓에 아르노가의 식솔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차가 움직이는 동안에도 카트린은 비앙카를 배웅하듯 손을 흔들었다. 비앙카 또한 마차의 창문으로 카트린에게 손 인사를 건넸다. 마차가 크게 한 바퀴 돌아 성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