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비밀의 성인(2)
“소문은 언제쯤 퍼질까요?”
“제가 교황청에 다녀온 이후일 것입니다. 맹세컨대, 제 입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때쯤은 괜찮을 것 같네요.”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프란시스가 교황청에 갔다 돌아올 때쯤이라면, 비앙카와 자카리도 아르노 영지에 도착했을 것이다.
자카리는 전쟁에 관한 낌새를 제외하고는 소문에 다소 둔한 사내였다. 수도에서 성인이 나타났니 뭐하니 하는 소문이 돌더라도 크게 비중을 두지 않을 테고, 오늘 비앙카가 프란시스를 독대한 일에 대해 가스파르에게 보고받는다 하더라도 그때쯤이면 성인 책봉과 연결 짓지도 못할 터였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거로 알고 있을게요. 다시 한 번 부탁드리지만, 꼭 비밀로 해주세요. 제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귀족인지 양치기인지, 노인인지 어린아이인지…. 아시겠지요?”
단단히 당부하는 말에 프란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비앙카가 왜 그렇게까지 성인임을 숨기려 하는지 궁금했다. 비앙카가 신분을 숨기는 것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았다는 말로 넘기기엔 지나치게 결벽적이었다. 프란시스는 공손히 답하며, 넌지시 물었다.
“성인께서 바라시는 대로 하겠습니다. 다만 성인이시여, 당신께서 성인임을 밝히시면 주변 모든 이들이 입이 닳도록 당신을 칭송하고 숭배할 것입니다. 예지의 주역인 아르노 백작 또한 당신의 말에 좀 더 귀를 기울일 텐데, 어째서 숨기시려는 겁니까?”
프란시스의 말에 비앙카의 어깨가 크게 움찔했다. 비앙카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프란시스가 지적한 것은 비앙카 또한 생각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다만 생각과 동시에 머리에서 지워 냈을 뿐. 비앙카는 느릿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제가 성인이라 하더라도, 달라진 것은 없잖아요. 저는 여전히 저일 뿐이니까….”
한풀 꺾인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깊은 피로가 느껴졌다. 그녀가 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살갑게 굴 사람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이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비앙카 그녀가 아르노 백작 부인이자 블랑쉐포르가의 딸이라 하여 일방적으로 치켜세우거나 멀리했던 이들….
하지만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뒤돌아서서 그녀의 못된 성격을 욕하고, 그녀가 가문에서 쫓겨나기가 무섭게 그럴 줄 알았다며 코웃음 쳤다. 성인이 된다 하여 다를 것이 없다는 걸 비앙카는 잘 알았다.
게다가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자카리의 태도가 변하기라도 한다면….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그녀 쪽일 것이다. 비앙카는 항상 그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다.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인지, 그녀가 성인이기 때문은 아닌지.
생각만 해도 지치는 일이었다. 비앙카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덧붙였다.
“그리고 만약 제가 성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남편이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건 좀 씁쓸할 것 같네요.”
* * *
축성식을 끝낸 비앙카가 대주교실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이본느와 가스파르가 득달같이 달려와 그녀를 맞이했다. 이본느의 시선이 창백한 비앙카의 낯을 꼼꼼히 살폈다.
“마님, 괜찮으세요?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별일 아니야. 간만에 너무 오래 서 있어서 그런가 봐.”
비앙카는 아무렇게나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지만, 이본느가 듣기엔 그럴싸하게 들렸다.
“하긴, 오늘 교회까지 걸어오신 것만 하셔도 힘드셨을 텐데…. 돌아가는 길엔 마차를 부를까요?”
“왕녀님도 계시는데 무슨 마차. 괜찮아.”
비앙카는 손을 내저었다. 그런 비앙카와 이본느의 대화를 듣고 있던 가스파르의 시선이 비앙카의 눈동자 깊은 곳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던 그녀였다. 그런 비앙카가 대주교와 독대할 정도의 일이라…. 분명 대주교실에서 무슨 일이 있긴 있었을 텐데, 그것이 무엇인지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다. 비앙카의 얼굴을 아무리 꼼꼼히 뜯어본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가스파르가 살피는 와중에도 비앙카의 낯빛은 시시각각 어두워졌다.
“하지만 지치기는 지치는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어. 왕녀님께 인사를 드리고 돌아가야겠다.”
비앙카는 비틀비틀 걸어갔다. 휘청이는 그녀의 등이 위태로웠지만, 비앙카는 부축하려는 이본느의 손길도 마다하고 홀로 꿋꿋이 걸어 나갔다. 고집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은 태도였다.
비앙카가 예배당으로 돌아가자, 비앙카를 마주한 오델리와 카트린은 깜짝 놀라 했다. 그녀들이 보기에도 비앙카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어색하게 웃으며 이만 들어가 봐야겠다 말하기도 전에, 오델리와 카트린이 비앙카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가서 쉬세요. 이대로는 픽 쓰러지실 것만 같네요.”
“맞아요. 오늘 너무 무리하신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저희도 이만 돌아갈 예정이니, 백작 부인도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마차. 마차를 불러야겠어요.”
비앙카가 괜찮다 하려 했지만, 오델리 왕녀가 한발 더 빨랐다. 그녀가 앞서 나서서 마차를 부르니, 안 그래도 지친 비앙카의 기력으로는 그녀를 막아낼 수 없었다. 오델리의 강압적인 결정에, 비앙카의 뒤에 있던 이본느는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온 비앙카는 온종일 멍했다. 그다음 날도 숙소에 콕 틀어박혀 꿈쩍도 안 했다. 비앙카는 하루 종일 창밖만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곱씹고 또 곱씹었다. 이본느가 말을 걸어도 심드렁하게 대답하거나 무시하기가 일쑤였다. 멍하니 넋을 빼놓은 그녀의 시선이 먼 곳을 응시했다. 그녀가 무엇에 그리도 홀려 있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자카리 또한 금방 비앙카의 이상함을 눈치챘다. 분명 교회에 가는 길을 배웅할 때만 해도 평소와 똑같았는데, 다녀온 그녀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혹시나 싶었던 자카리는 호위로 붙여 두었던 가스파르나 로베르에게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물었다. 오델리 왕녀와 단둘이 가는 줄 알았는데 다보빌 백작 부인이 동행한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지만 별다른 건 아니었다. 오히려 로베르의 눈에는 분위기가 좋은 것이 퍽 친해 보였다 할 정도니, 비앙카의 기분을 최우선적으로 여기는 자카리의 입장에선 기꺼운 일이었다.
다만 가스파르의 말 중 신경 쓰이는 것이 있긴 했다. 바로 비앙카가 대주교와 면담을 했다는 것이었다.
“비앙카가…. 대주교를 만났다고?”
“예. 선물도 준비해 가셨습니다. 처음엔 오델리 왕녀에게 건네는 선물인 줄 알았는데….”
미리 선물까지 준비했다? 우연히 이루어진 만남은 아니라는 말이었다. 평소 신앙심과는 거리가 멀다는 가스파르의 주장에 자카리 또한 동감하는 바였다. 그런 그녀가 무슨 일로 대주교를 만난단 말인가? 자카리의 의문에 답하듯, 가스파르가 말을 이었다.
“대주교에게 기적의 사례에 대해서 물어볼 것이 있다 하셨는데,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는 모릅니다. 마님께서 독대를 주장하신지라….”
“독대?”
가스파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카리의 얼굴이 돌조각처럼 굳었다. 가스파르가 자카리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님께서 강경하셨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는 모르고 말이지.”
“예. 안에서 대화 소리가 들리기는 했습니다만, 알아들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큰 소리가 오가지는 않았고?”
“예. 다만 대주교실에서 나오신 마님의 안색이 피로했습니다. 단순히 외출을 오래 하신 후유증인지, 아니면 대화 내용 때문인지는 저도 잘….”
들으면 들을수록 더더욱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기적의 사례? 왜 그런 것을 물었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그것이 그렇게 비앙카를 뒤흔들 일인가?
혹시나 다른 일이 또 있지 않은지 잘 생각해 보라며 닦달해도, 가스파르는 면구스러워하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결국 자카리는 비앙카에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들 부부가 몸을 맞추며 이전보다 사이가 좋아지기는 했지만, 대화가 드문 것은 여전하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말 한 마디 거는 것에 이전만큼 조마조마하지는 않았다. 침대에서, 혹은 식탁에서 나누는 소소한 대화들. 어디를 가는지, 무슨 옷을 입을 건지, 식사는 입에 맞았는지…. 그런 것들을 통해 지금껏 보고받아 온 비앙카의 취향과 실제 비앙카의 취향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도 했다.
다만 각 잡고 이야기를 건네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어떻게 운을 떼야 하지. 자카리는 끙, 골머리를 앓았다.
그렇다 하여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도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자카리는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친 뒤 비앙카의 방에 슬며시 발걸음 했다.
한 번 고기를 먹어 본 놈은 고기 맛을 못 잊는다는 말처럼, 한두 번 비앙카와 함께 침대에 머리를 뉘이고 난 뒤 자카리는 마치 제 방처럼 비앙카의 방에 드나들었다. 예전에 비앙카가 자고 가라 할 때는 부득불 뒤돌아서서 나왔던 것이 우스울 정도였다.
그만큼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잠이 드는 기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황홀한 것이었다. 가끔 비앙카가 그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채 잠이 들면, 자카리는 그녀의 팔뚝을 끌어안은 채 한참 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그렇게 잦은 방문 때문인지, 자카리가 방에 불쑥 들어섬에도 비앙카는 그러려니 하며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덕분에 말을 거는 건 자카리의 몫이었다. 창밖을 보며 골몰히 생각에 잠긴 비앙카의 뒷모습에 자카리는 헛기침을 하며 넌지시 운을 떼었다.
“비앙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