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진실의 파편(10) / 비밀의 성인(1)
그걸 제일 먼저 발견한 것은 비앙카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이 빠질 정도로 살펴보고 있던 프란시스였다.
“이, 이것은….”
비앙카의 앞머리 사이로 떠오른 황금빛 광채에 프란시스는 눈을 부릅떴다. 신성함이 느껴지는 빛에 프란시스는 당장 비앙카의 앞머리를 넘겨 성흔을 확인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
하지만 상대는 백작 부인. 차마 직접 그녀의 앞머리에 손을 뻗을 수 없었던 프란시스의 애먼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그는 말을 더듬으며 조심스레 부탁했다.
“신도님, 잠시 머리카락을….”
“예, 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비앙카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이마 위에 가지런히 덮인 앞머리를 슬쩍 들어 올렸다. 잘 다듬어진 비앙카의 고운 손톱 위로 고동색 앞머리가 갈라지며, 가려져 있을 때보다 선명한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마 한가운데 금가루를 곱게 뿌려 문양을 만든 것처럼 빛나는 흔적은 바로 비둘기 문양이었다. ‘신의 전령’, 즉 ‘신의 뜻을 전하는 자’라는 의미의 성흔이었다. 프란시스가 알고 있는 사료 속 내용 그대로였다.
“오오… 역시…!”
확신을 갖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실제로 신의 기적을 두 눈으로 보게 되니 그 영광스러움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프란시스의 주름진 뺨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감격에 차 말문이 막힌 그는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더니, 기어코 비앙카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프란시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비앙카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앙카는 자신의 이마를 매만졌다. 손끝에 만져지는 것은 이마를 뒤덮은 매끄러운 피부뿐이었다. 비앙카 그녀가 느끼기엔 별다른 것이 없다 보니 프란시스의 반응에 공감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그래도 프란시스의 반응을 보아하건대, 성흔이 드러나긴 드러난 모양이었다. 내심 자신이 망상이나 다름없는 개꿈을 회귀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것은 아닌가 불안했던 찰나였다. 비앙카는 그제야 뒤늦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모든 걱정거리가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성인이라는 것을 마냥 믿기엔, 성인의 의미가 크나컸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내가? 신실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능력도 없는 내가 정말로 성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거대해지는 상황에 비앙카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비앙카가 당황하는 사이, 감정을 추스른 프란시스가 느릿하게 몸을 곧추세웠다. 그의 청회색 눈빛에 공손함과 경외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프란시스는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껏 누구에게 밝힌 적 있습니까? 혹시 아르노 백작에게 라든가….”
“아니요, 없어요. 아무에게도….”
“당신이 본 미래는 무엇입니까?”
“…….”
비앙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슬쩍 내리깔린 속눈썹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프란시스는 모든 걸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래 예지를 하는 자가 보는 미래는 신에게 있어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미래임과 동시에 본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미래였다. 다시 말하면 성인의 약점, 그 자체였다. 프란시스는 말을 바꿔 다시 질문했다.
“그럼 신도님, 아니, 선택받은 성인이시여. 당신이 바라는 미래는 무엇입니까?”
지금껏 줄곧 존대를 해 오기는 했지만, 비앙카가 성인이라는 걸 인지한 후의 그의 태도는 더욱 공손해져 있었다. 그녀를 성인이라 칭하는 프란시스의 호칭에, 그제야 밀려온 현실감이 비앙카를 덮쳤다. 성인이라는 사실에 얼떨떨하여 멍청하게 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비앙카는 프란시스의 질문을 곱씹으며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내가 바라는 미래. 그건 바로….
“…남편이.”
비앙카가 힘겹게 입을 열어 운을 떼기가 무섭게 숨이 콱 막혔다. 공기가 사라진 건지, 목구멍에 뱀이 똬리를 튼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갑작스레 숨이 막힌다 생각하기가 무섭게 그녀의 눈가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녀의 숨을 틀어막은 것은 차오르는 울음이었다.
투둑, 투둑. 그녀의 옷자락에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소나기는 그대로 폭우가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순간, 쏟아져 내리는 오열에 비앙카는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고 그대로 휩쓸렸다. 꺽꺽거리는 울음소리에 발음이 모조리 뭉개졌다.
하지만 비앙카의 눈동자 속의 의지만큼은 또렷했다. 이슬을 머금은 풀잎처럼 물기로 흐려진 연녹빛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프란시스를 바라보았다. 비앙카는 한 마디, 한 마디 간신히 말을 뱉어냈다.
“남편이 죽지 않는 미래요.”
자카리의 죽음을 입에 담기가 무섭게 선연한 공포가 차올랐다. 그의 죽음이 현실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으슬으슬한 소름을 견딜 수가 없었던 비앙카는 크게 몸서리쳤다.
‘너무 불안해하지 말자. 내가 성인聖人이 되었으니, 교단의 성기사단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러면 그를 죽지 않게 할 수 있어….’
이전의 무력한 백작 부인이 아닌, 성인 비앙카로서 자카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당연지사 기뻐해야 하는 일이건만, 왜 더 불안해지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비앙카는 한 박자 늦게 불안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자카리의 죽음을 쉽사리 막을 수 없을 거라는, 예정된 고난 때문이었다.
자카리의 죽음은 신이 비앙카를 성인으로 만들어, 미래를 보여주기까지 하면서 바꾸기 위한 미래였다. 그것은 즉, 바꿔야만 하는 일임과 동시에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현실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미래라는 말과 동일했다.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성인인 비앙카가 유일했다. 그렇다면, 비앙카가 잘못된 선택을 하면 아무도 자카리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었다….
조각조각난 파편을 긁어모은 끝에 드디어 진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미래를 바꾸려는 그녀의 행동에 확신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발목을 잡았다.
수렁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처지. 그것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비앙카의 현실이었다.
비앙카의 낯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녀가 빠진 늪보다도 더 깊고 어두운 그림자였다.
* * *
혼란스럽다 하나 언제까지 대주교실에서 망연자실 서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은 비앙카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눈물은 뺨에 말라붙었고, 목을 틀어막고 있던 슬픔은 가신 지 오래였다. 그녀가 궁금했던 것을 다 알았으니 이제 떠날 시간이었다.
하지만 교회를 나서기 전, 프란시스에게 다시 한 번 당부해 둘 일이 있었다.
“대주교님.”
“말씀하십시오, 성인이시여.”
“혹시…. 제가 성인이라는 사실을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 아직 제가 마음의 정리가 되지 않아서…. 당분간은 주변 누구에게도 밝히고 싶지 않네요.”
혹시라도 자카리가 알게 된다면 정말 최악이었다. 도대체 무슨 미래를 본 거냐고 캐묻기라도 하면,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녀가 본 미래는 자카리에게도 비밀이다. 하지만 비앙카는 자신이 거짓말에는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입을 꾹 다물고 침묵해도, 결국 얼굴에 다 드러날 게 분명했다. 애초에 미래를 예지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다.
뜻밖의 비앙카의 요청에 프란시스는 난처해했다. 성인의 발생을 교단에 알리고, 그가 성인의 축성식을 했음을 밝힐 생각으로 들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성인인 비앙카가 비밀로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프란시스는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가능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훗날 성인께서 교단의 힘을 필요로 하실 때, 교단에서 허락을 받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단 명부에 성인의 이름부터 올려야 하니까요.”
곤혹스러운 상황에 비앙카는 혀를 찼다. 자카리는 언제 전장으로 뛰쳐나갈지 모르는 사내였다. 혹여라도 성기사단을 동원하는 것이 늦어지기라도 한다면…. 불안했던 비앙카로서는 한 발짝 양보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럼 성인에 이름은 올려 두되 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을 수는 없나요?”
“그 또한 가능합니다. 제가 직접 교황청에 가서 교황 성하와 추기경을 뵙고 말씀드리면 되는 일이니까요. 교단 내에서 당신의 존재를 숨길 것입니다.”
“곤란하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성인께서 죄송할 일이 아닙니다. 다만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소문까지는 숨길 수 없는지라…. 오늘 같이 온 일행분들 중 눈치채시는 분이 있을 수도 있는데, 괜찮으십니까?”
절충된 비앙카의 제안은 프란시스로서는 쌍수 들고 반길 일이었지만, 그렇다 하여 걱정되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란시스의 말이 가리키는 것은 바로 오늘 비앙카와 함께 온 오델리였다. 한량처럼 보이는 공주는 생각보다 감이 예리했고, 기억력도 좋았다. 아마 세브랑에 성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듣기가 무섭게 오늘 비앙카가 프란시스를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비앙카 또한 프란시스가 오델리를 염두에 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오델리가 입이 무거운지 가벼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가 무척 영리한 사람이라는 건 비앙카도 알았다. 그런 그녀가 그저 흥미 본위로 비앙카에 대해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비앙카에 대해 입을 열 때는, 정치적이나 상황적으로 ‘그럴 필요’가 있을 때일 터였다. 비앙카는 그녀가 경거망동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소문은 언제쯤 퍼질까요?”
“제가 교황청에 다녀온 이후일 것입니다. 맹세컨대, 제 입을 통해 당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