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진실의 파편(7)
니콜라는 비앙카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뒤로 예술이나 다름없을 조각들을 끝도 없이 내놓았다. 그러고선 마치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비앙카의 눈치를 보았다. 비앙카가 잘했다며 칭찬을 하면 그다음에는 그 전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실력이 껑충 뛰어 돌아왔다. 점점 초는 화려하고 섬세해졌고, 그렇게 조각된 초가 비앙카의 궤짝에 가득 쌓였다.
집사 뱅상은 이러다가 성의 초를 전부 거덜 낼 거라며, 눈치를 봐서 적당히 해야지 정도를 모른다며 혀를 찼다. 눈치가 없는 걸 넘어 어딘가 모자란 구석이 있다며 투덜거렸지만 비앙카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니콜라가 비앙카의 비위를 맞추며 시중드는 하인도 아니고, 비앙카가 니콜라에게 기대하는 것은 훌륭한 조각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초의 개수나 초의 질 따위에 신경을 쓰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비앙카는 수도에 올 때 자신의 방에 장식할 초와 함께, 제일 훌륭하게 조각된 초를 따로 챙겼다. 하얗고 단단한 밀랍 초에 섬세하게 새겨진 성모의 모습은 성스럽기 그지없었다. 니콜라를 후원하는 대신, 매주 교회에 갈 것을 당부한 보람이 느껴졌다.
그렇게 비앙카가 따로 보관한 초는 오늘 이날을 위해서였다. 라호즈의 대주교나 되는 위치에 계신 분이라면, 이 조각된 초의 가치를 알아볼 안목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기에, 비앙카는 니콜라가 조각한 초를 레이스로 곱게 쌌다.
대주교가 레이스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어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알고 있어도 좋았고, 듣지 못해 레이스를 보고 깜짝 놀라는 쪽도 좋았다. 처음 보는 신기한 물건이 하나뿐이었을 때보다, 두 개가 연달아 있을 때 충격이 더 오래가는 법이었다.
게다가 포장을 정성 들이고 화려하게 할수록, 그 안에 담긴 내용물의 가치 또한 자연스레 더 높아 보인다. 비앙카는 어떻게든 대주교에게서 만남을 허락받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대주교가 호출하는 걸 보니, 다행히 그녀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간 모양이었다. 어느새 대주교실 앞에선 비앙카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마음을 다잡은 비앙카의 앞으로, 대주교실의 문이 서서히 열렸다.
“대주교님, 모셔 왔습니다.”
요한의 말에 책상에 놓인 흑단 목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프란시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에는 화색이 가득했다. 프란시스는 비앙카에게 성큼 다가서며 인사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신도님. 라호즈 대교회의 대주교를 맡고 있는 프란시스라고 합니다.”
“신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아르노 백작의 처인 비앙카 드 아르노입니다. 바쁘신데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더 감사드리지요. 제가 바쁜 이유를 해결해 주셨으니까요.”
형식적인 인사치레가 끝나기가 무섭게, 프란시스는 다급히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콧수염이 들썩이는 것이, 어지간히도 초에 대해 묻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었다. 이 초를 어디서 얻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더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그의 청회색 눈동자에서 그대로 읽혔다.
대주교나 되는 사람이 속내를 감추지 못할 리가 없다. 그는 그저 감출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비앙카가 선물해 준 초는 무척 귀하고 훌륭했지만, 안타깝게도 한 개뿐이었다. 그리고 예식에 사용하는 초는 열두 개. 적어도 세 개는 필요했다. 물론 이렇게 귀한 것이 그만큼 있을지는 의문이었지만…. 만약 이 초를 더 구할 수 있다면, 비앙카가 얼마를 제시하든, 무엇을 요구하든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었다.
대주교의 훤히 보이는 속내에 비앙카는 크게 기쁨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짝 미소 지었다.
“선물이 마음에 드셨나 보군요.”
“아주 마음에 들다마다요. 그렇게 귀한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떻게 초에 조각할 생각을 다 했을까요. 게다가 조각 솜씨 또한 제가 봐 온 조각가들 중에서도 으뜸입니다.”
어디서 구했는지 노골적으로 묻는 것은 품위 없는 짓인 만큼, 프란시스는 비앙카를 넌지시 떠보았다. 하지만 내심 불안한 심정을 지우지 못한 만큼 빙그레 올라간 입꼬리가 작게 떨렸다. 혹시라도 비앙카가 건너 건너 구하게 된 성물이라거나, 정상적이지 못한 루트로 구한 것이라면 초를 더 구하고자 하는 그의 속셈이 물거품이 될 터였다.
신의 가호인지, 천만다행으로 비앙카의 대답은 프란시스가 원하는 대답 그대로였다.
“저희 영지에서 후원하는 조각가의 실력이 뛰어난 덕분입니다. 초는 신께서 저희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다는 상징적인 물건이 아닙니까. 그의 신실함이 좋게 받아들여진 것 같아 제가 다 기쁘네요.”
“감동적인 말씀입니다.”
비앙카는 초를 조각한 조각가가 초장이 어린아이이며, 가장 친숙한 소재가 초였기에 초를 조각했을 뿐이라는 걸 비밀로 했다. 그리고는 무슨 신실한 의도가 있었던 것인 척 포장했다. 같은 물건이라면, 사람은 그럴듯한 사연이 있는 물건에 매료되곤 한다. 혹은 물건에 그럴듯한 이야기가 따라붙기도 한다. 본디 예술이라는 것은 어떻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감동과 가치가 달라지는 법이니까.
그런 비앙카의 의도대로, 프란시스는 찬탄 어린 한숨을 내뱉었다. 솔직히 다른 말보다도, 비앙카가 후원하는 조각가라는 말에 환호성을 지르고 싶었다. 그의 소속이 분명하다는 소리니까. 프란시스는 사람 좋은 낯으로 웃어 보이며, 비앙카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혹시, 이렇게 조각된 초를 좀 더 구할 수 있을까요. 열한 개, 아니, 두 개만 더 있어도 좋습니다. 교황 성하께 진상 드리고자 하는데, 아시다시피 교단에서 제식을 지낼 때 제단 위에 초가 총 열두 개, 성상 밑에 세 개가 사용되지 않습니까. 이리 귀한 선물을 내어 주셨는데 이런 역제안을 드리게 되어 무척 민망합니다만….”
프란시스는 자신이 대주교라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있는 이였다. 왕의 앞에서도 쉬이 고개 숙이지 않는 프란시스가 비앙카의 앞에서 놀랄 정도로 쩔쩔매는 모습에 요한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언뜻 본 초의 성스러움을 생각하니, 그런 프란시스의 행동이 아주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눈치를 보는 듯 과하게 저자세를 취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비앙카였다. 좋아할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까지 초를 높게 평가할 줄은…. 프란시스에게 이번 공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했으니, 그의 태도에 당황한 것도 당연했다.
초라면 얼마든지 있다. 흥정해서 다른 걸 얻어낼 수 있어도 좋겠지만, 오히려 너무 재는 듯한 태도는 진실성을 떨어트린다. 게다가 초는 소모품이다. 이번에 초를 맨입으로 받아 간다 하더라도 다음번에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을 터였다. 오히려 이번에 대주교가 공물로 교황청에 바쳐 교황의 눈에 들기라도 하면, 다음에는 대주교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초를 얻어야 할 테니 비앙카로서는 투자할 만했다. 비앙카는 흔쾌히 답했다.
“신께서 내려주신 재능이니, 신을 위해 쓰는 것도 당연하지요. 다만 진상 드린 초만큼 훌륭한 것은 없으나, 그에 비견하여 크게 떨어지지 않는 정도의 것은 있습니다. 그라도 괜찮으시다면….”
“물론 괜찮지요! 신도님의 넓디넓은 자비와 크나큰 배포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시스는 화색을 띠었다. 프란시스도 머리를 열심히 굴리고 있었다. 만약 교황 성하께서 다음 제식에도 이 초를 사용하고자 하신다면…. 아르노 백작 부인과 교황청 사이의 연결책을 그가 맡는 것이다. 그를 통해서만이 이 초를 얻을 수 있을 테니, 추기경이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교단 내에서 그의 발언권도 강해질 터였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미래에 광명을 비춰줄 이 백작 부인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의 눈에는 비앙카가 마치 자신을 추기경이 되도록 인도하는 신의 전령처럼 보였다. 그는 그리 쩨쩨한 사람이 아니었고, 받은 만큼 베풀라는 신의 계명을 항상 잘 지켜 왔다. 비앙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들어줄 생각을 하며, 프란시스는 상냥하게 물었다.
“신도님께서 본교를 위해 이렇게 귀한 것을 내어 주셨는데, 응당 시간을 내어드리는 것이 맞지요. 저에게 궁금한 것이 무엇입니까?”
드디어 비앙카가 원하는 말이 나왔다. 비앙카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조심스레 운을 뗐다.
“…잠시 사람을 물려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마님!”
“…곤란합니다, 마님.”
프란시스의 답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본느와 가스파르가 반발했다. 아무리 상대가 대주교라고는 하지만, 신분과 명예가 그의 본질을 대변해주지는 않았다. 비앙카를 겁박하려 했던 자코브도 신분은 2왕자요, 세간의 평가는 여자에 무심한 고지식한 사내라는 평이 대부분 아니었던가. 자코브와의 일이 있던 만큼, 그들은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 했다.
그들의 충심과 걱정은 이해하지만, 여차하면 회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들을 내보내야만 했던 비앙카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곳은 대교회다. 대주교님 앞에서 이 무슨 추태냐?”
“하지만.”
“가신 된 입장에서 주인을 걱정하는 것도 당연하지요.”
본인의 도덕성과 대교회의 안전을 의심받았음에도, 대주교는 오히려 비앙카를 만류했다. 지금의 그는 자신의 오른뺨을 치는 이에게 왼뺨도 내밀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답지 않은 프란시스의 자비로움과 여유로움에 요한이 눈을 끔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