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진실의 파편(6)
비앙카가 손짓하자, 뒤에 있던 이본느가 흑단 목함을 들고 다가왔다. 얼떨떨하게 목함을 받아 든 요한은 곤혹스러움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목함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받기는 했다만 이것으로는 대주교님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화를 내실 수도 있었다. 돈으로 자신의 신실함을 사려 했다고…. 그렇게 되면 전해 주지 않는 것만 못할 것이다.
요한의 기우를 눈치챈 비앙카가 다급히 덧붙였다.
“패물은 아닙니다만, 무척 귀한 것입니다. 꼭 대주교님께 전해 주십시오.”
“신도님의 의지가 그러하시니…. 일단 대주교님에게 진상하며 말씀을 올리고 오겠습니다. 다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십시오.”
“기도하며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비앙카는 속으로 작게 안도하며 고개를 작게 숙였다.
“그러면 제가 이 목함을 대주교님에게 전해 드리는 동안, 신도님들에게는 다른 사제님을 통해 초를 전해 드리겠습니다.”
상황을 정리한 요한은 다시 한 번 성호를 긋고는 총총 떠나갔다. 비앙카는 제발 일이 잘 풀리기를 기원했다. 목함에 있는 것으로도 대주교의 시간을 얻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면, 별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침묵한 채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오델리가 넌지시 물었다.
“교회에 목적이 있었군요? 기적에 대해 무언가 일이 있나요?”
“그건 아니지만…. 개인적 호기심이에요.”
자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을 밝힐 수 없었던 비앙카는 말을 흐렸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주교에게 밝히고 자문을 구하는 것까지는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숨길 수 있는 만큼은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전생의 그녀의 행보는, 다른 이들에게 절대 밝히고 싶지 않은 수치스럽고 낯부끄러운 과거였으니까.
“대주교께서는 목이 뻣뻣하신 분이에요. 바쁘다 한 말이 있으니 쉽게 시간적 여유를 내진 못할 텐데…. 아르노 백작 부인께서는 그 선물을 받고 대주교가 시간을 내어줄 거라 생각해요?”
오델리의 호기심 어린 짓궂은 질문에 비앙카는 슬며시 미소를 짓고 침묵했다. 어딘지 모르게 여유 있는 비앙카의 모습에 오델리의 입가에 흥미로움이 감돌았다.
과연 비앙카가 준비한 것이 무엇일까. 패물은 아니지만 대주교의 마음에 들 만한 귀한 것이라 하면 성물인데, 어지간히도 유명한 성물들은 대부분 교단에 보관되어 있었다.
물론 교단이 성물 전부를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된 명망 있는 귀족 가문에서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아르노가는 신생 가문이라지만, 비앙카의 친정인 블랑쉐포르가와 그녀의 어머니의 가문 둘 다 명문이니 숨겨진 성물 하나 정도 있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다만 그 귀한 성물을 바칠 정도로 기적에 관한 것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걸까?
궁금한 것이 산더미였지만, 비앙카가 밝히고 싶어 하지 않아 하니 차마 캐물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을 속으로 꾸역꾸역 삼켜 넣은 오델리는 평소와 같은 우아하고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비앙카와 카트린을 재촉했다.
“어머, 저기 오시는 사제님이 가져오시는 것이 우리 초인 것 같아요. 이제 축원 드릴 준비해요.”
* * *
라호즈 대교회의 대주교직을 맡고 있는 프란시스는 대주교실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일을 하루 종일 반복했다. 세월의 흐름을 나타내는 주름은 평소보다 더 깊게 파여 있었고, 꽉 다물린 입술 위로 덮인 콧수염은 콧김으로 작게 흔들렸다.
성축일에 교황청으로 공물을 보내는 일은 매년 있어 왔다. 특히 대교회들은 수가 몇 없는 만큼 공물을 준비하는 데 만반의 준비를 기했고, 어떤 공물을 준비하느냐로 보이지 않는 알력 다툼이 있기도 했다. 작년에 라호즈 대교회에서는 사제들이 3년간 집필에 몰두한 채식본(彩飾本)을 준비하여 다른 교회들의 코를 납작이 눌러주기도 했다.
올해에도 눈에 띄는 공물을 보낸다면 추기경의 자리에 한 발짝 더 다가설 수 있으리라. 내년에 추기경 선발이 있는 만큼, 이번 공물이 참으로 중요했다.
하지만 공물로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자, 프란시스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성화? 아니야. 어지간한 화가들의 그림은 이미 다 살펴본 뒤야. 부조가 새겨진 성상도, 촛대도, 성합도, 성반도, 성체함도, 예장용 지팡이도…. 제식용 포도주도 찾아보았지만 마땅한 것이 없고….”
프란시스는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그때,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그의 복잡한 상념을 중단시켰다.
“대주교님, 계십니까? 요한 평사제입니다.”
“…들어오십시오.”
프란시스의 답에 요한이 대주교실로 들어섰다.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프란시스는 요한을 반기지 않았다. 그의 눈이 세모꼴이 되어 요한을 흘겼다.
“내 머리가 어지러워 한동안 방문을 피한다 하지 않았습니까.”
“예. 알고 있습니다만 피치 못할 연유로….”
“무슨 연유입니까?”
잔뜩 예민해진 채 날 서 있는 목소리가 요한을 향하자, 요한의 목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요한을 쏘아보는 프란시스의 청회색 눈동자는 별것 아닌 일이면 족쳐버릴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요한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오델리 왕녀님께서 방문하시어….”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에 대해 이미 보고를 받았고, 전 그 일을 요한 사제님에게 맡기지 않았습니까. 제가 그때 뭐라고 했지요? 제가 신경 쓸 일이 없게 하라 하였지요. 그런데도 부리나케 저를 찾아왔다는 것은, 요한 사제님께서 일에 소홀히 하셨다는 뜻입니까?”
“그, 그럴 리가요!”
다다다 쏘아붙이는 히스테릭한 프란시스의 반응에 요한이 쩔쩔매며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는 이렇게 꼬치꼬치 말 트집을 잡는 분이 아닌데, 요 며칠 사람이 백팔십도 달라져 있었다. 프란시스가 얼마나 추기경이 되고 싶어 하는지 아는 만큼, 최근 그의 초조함도 이해할 수 있었다.
요한은 프란시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간결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왕녀님의 일행 중 아르노 백작 부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대주교님을 만나 뵙고자 합니다.”
“저를 말입니까? 왜죠? 축원이라도 대신 올려 달라는 철없는 제안이라면 사제님께서 여기까지 오기 전에 쳐 냈을 터이고….”
“기적의 이유에 관해 물을 것이 있다고…. 대주교님께서 공사다망하시어 여유를 내지 못할 것이라 하니, 이 물건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요한이 비앙카에게서 받은 흑단 목함을 프란시스에게 건넸다. 목함을 받은 프란시스의 주름진 이마에 깊은 골이 패었다. 기가 찼다. 백작 부인이라면 낮은 신분은 아니나, 그는 대교회를 맡고 있는 교단의 대주교였다. 이런 뇌물 따위로 그를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큰 오산이었다. 프란시스가 조롱하듯 뇌까렸다.
“고작 패물로 내 시간을 살 생각이라던가요?”
“패물은 아니라 전했습니다.”
“패물이 아니라고…?”
프란시스는 미심쩍은 듯 흑단 목함과 요한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요한은 목함을 건네던 비앙카의 다급하고도 진중한 표정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받은 선물을 확인도 안 하고 내칠 수는 없다. 대주교라는 신분은 비앙카의 행동 하나하나에 휘둘릴 정도는 아니었으나, 그녀를 모욕 주고도 멀쩡할 정도도 아니었다. 프란시스는 한숨을 내쉬며, 목함의 뚜껑을 열었다.
끼이이익. 경첩이 미묘하게 엇갈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고 안에 들어 있는 것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지만 겹겹이 싸여 언뜻 보기엔 무엇인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것에 미간을 찌푸리며 목함 안을 헤쳐 본 프란시스는, 이내 목함에 들어 있는 것의 정체를 깨닫고는 눈을 부릅뜬 채 경악스레 외쳤다.
“…아니, 이것은!”
* * *
예배당에 긴 의자가 이열 종대로 쭉 늘어서 있는 가운데, 비앙카와 오델리, 카트린은 제일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기도했다. 그들의 앞에 있는 촛불에 향을 길게 붙이며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면서 소원을 비는 의식이었다. 촛농을 뚝뚝 흘리며 타오르는 촛불은 조금의 숨결에도 일렁였다.
그때, 비앙카의 목함을 받아간 요한이 헐레벌떡 그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신에게 소원을 비는 예식을 방해할 수는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며 비앙카의 기도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그는, 비앙카의 향이 전부 타 없어지기가 무섭게 비앙카에게로 다가왔다.
“신도님, 대주교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요한의 말에 오델리와 카트린은 깜짝 놀랐다. 설마 했는데 정말로 대주교가 비앙카를 찾을 줄이야! 오델리는 비앙카가 대주교에게 선물한 게 무엇인지 진심으로 궁금해졌지만, 나중에 물어보기로 기약하며 비앙카의 등을 떠밀었다.
“다녀오세요. 저희는 좀 더 기도를 올리고 있을게요.”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요한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비앙카의 뒤를 따라 이본느와 가스파르를 비롯한 호위 또한 따라붙었다.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요한의 뒤를 쫓는 비앙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머릿속이 이런저런 생각으로 얽혔다. 그런 비앙카의 긴장을 전혀 모르는 요한은 비앙카에게 감탄 섞인 말을 건넸다.
“신도님께서 전해 주신 선물이 귀한 신물인가 봅니다. 대주교님께서 그리 다급하신 모습은 처음 보았어요.”
“기뻐하시는 것 같아 신도로서 기꺼운 일입니다.”
그녀가 준비한 선물이 잘 먹힐 것 같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기는 했지만, 막상 실제로 효과가 드러나니 놀라웠다.
아르노 영지를 떠날 때, 비앙카는 선물을 두 종류 준비했다. 세속의 상대를 홀리기 위한 레이스. 그리고 세속을 벗어난 이에게는….
비앙카가 대주교에게 건넨 것은 바로 니콜라가 조각한 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