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결혼장사-129화 (129/192)

#129 진실의 파편(5)

교회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번의 성문을 지나 그들은 하늘을 찌를 듯 높은 첨탑으로 둘러싸인 교회의 앞에 서게 되었다. 비앙카가 전생에 몸을 의탁한 수도원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웅장함과 화려한 건물. 교회는 라호즈의 백색 성채보다도 더 새하얬다. 마치 속세와는 격리된 듯한 이질감. 아마도 이런 것을 보고 성스럽다 하는 것이리라.

비앙카와 일행이 교회의 측문으로 향하려는 찰나, 교회의 주변을 빙빙 돌고 있는 한 기사 무리와 맞닥트렸다. 낯선 기사들을 발견한 오델리의 호위가 일행을 잠시 멈추게 하며 말했다.

“웬 기사 무리가 교회에…. 왕녀님. 잠시 기다리십시오.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

주변에 관심이 없을뿐더러, 오늘따라 머릿속이 복잡했던 비앙카는 그들이 누구인지 알 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시선을 돌리는 와중, 그 기사 무리 속에서 익숙한 이의 얼굴을 발견했다. 비앙카의 눈이 크게 뜨였다.

‘…로베르가 왜 여기에?’

의문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뻔한 일이었다.

‘그래. 당연히 자카리가 보냈겠지….’

어쩐지 순순히 보내주더라니.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의무라던 자카리의 목소리가 비앙카의 귀에 윙윙거렸다. 걱정하는 것이 의무라는 말은, 대책을 세우는 것도 자신의 의무라는 뜻이라는 것을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비앙카는 얼굴이 뜨거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남들이 과연 자신을 어찌 볼까…. 이거는 해도 너무했잖아. 작게 한숨을 내쉰 비앙카는 로베르가 이끄는 기사 무리에게 다가서려는 오델리의 기사들을 만류했다.

“그…. 우리 영지의 기사네. 낯선 이는 아니니 걱정 마시게.”

비앙카의 얼굴이 홧홧 타올랐다. 왕녀의 기사들은 깜짝 놀랐지만, 가스파르를 호위로 붙인 것으로 대충 자카리가 비앙카를 얼마나 아끼는지 짐작한 뒤였다. 그들은 금방 수긍하고는 뒤로 물러섰다. 물론, 비앙카로서는 그게 더 민망했다.

“정말로 아르노 백작님이 백작 부인을 아끼나 봐요.”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카트린의 감탄에 비앙카가 어색하게 답했다. 아까 자코브에 관한 대화 주제를 통해 비앙카가 왜 이렇게 호위를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는지 눈치챈 오델리는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수도에선 호위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보는 눈이 많은 건 가끔 성가시지만, 도움이 될 때도 있잖아요?”

오델리의 말이 맞았다. 이미 한번, 호위 없이 다녔다가 큰일 난 전적이 있지 않은가. 비앙카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베르와 그 일행들도 비앙카를 발견한 듯, 잠시 시선이 마주쳤다. 로베르는 평소처럼 뚱한 표정이었다. 여전히 비앙카의 일에 엮이는 것이 탐탁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또한 여전하여 비앙카는 조금 웃음이 나왔다.

비앙카가 웃은 게 당황스러웠는지, 로베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앙카는 손을 까닥여 인사하고는, 그대로 왕녀의 뒤를 따라 총총 교회로 들어섰다.

뒤에서 로베르가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가 할 말이란 뻔했기 때문이었다. 뭐, 괜히 내가 교회에 온다고 해서 할 일도 많은 데 교회 주변이나 돌고 있게 되었다고 투덜대는 거겠지. 비앙카는 자신에 대한 욕이라면 이제 귀에 딱지가 앉을 것만 같았다.

실제 로베르의 혼잣말은 비앙카에 관한 이야기가 맞긴 맞았다. 하지만 비앙카의 생각과는 조금 종류가 달랐다. 로베르는 멍하니 교회로 들어서는 비앙카의 뒤를 보며,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맨날 혼자만 다녀서 사교성이 없는 줄 알았더니…. 마님도 남들이랑 같이 다니려면 다닐 수 있었구나….”

* * *

대교회의 안은 정숙한 정적과 향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고창(高窓)을 통해 당내로 들어온 햇빛은 오색찬란하게 빛났다. 대교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통로에는 햇빛이 들어서지 않았지만, 대신 초가 밝혀져 있었다. 촛불이 아른아른거리며 그들의 그림자를 벽에 길게 비추었다.

높게 뚫린 회랑의 천장을 보며 카트린이 조용히 감탄했다. 비앙카 또한 외장만큼이나 화려한 대교회의 내장에 넋을 잃었다. 세브랑 성이 웅장하고 거대한 위엄이라면, 대교회에서는 신에 대한 한없는 섬세한 찬미가 느껴졌다. 비앙카는 벽에 하나하나 새겨진 부조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그때 그들에게 평사제 하나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귀하신 분들께서 교회를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을 안내할 평사제 요한이라 합니다. 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신의 영광이 함께하기를.”

오델리와 평사제 요한은 마주 보며 성호를 그었다. 비앙카와 카트린 또한 오델리의 뒤에서 똑같이 인사했다. 요한이 흔쾌히 말했다.

“교회를 둘러보고 싶으시다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어때요? 한번 둘러보실래요?”

오델리가 카트린과 비앙카에게 물었다. 비앙카는 용건을 상기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그럴 체력이 되지 않을 것 같아요.”

“맞아. 아르노 백작 부인은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지요.”

“만약 다보빌 백작 부인은 둘러보고 싶으시다면 다녀오셔도 괜찮아요. 저는 기도를 드리며 기다리면 되니까요.”

“저도 괜찮아요.”

카트린도 교회의 화려한 내장과 압도적인 위압감에 감탄하기는 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카트린은 건물 구경보다 오델리나 비앙카와 함께하는 것이 더 좋았다. 오델리가 세 사람의 의견을 취합하여 요한에게 전했다.

“그러면 저희는 축원만 드리도록 할게요.”

“왕녀님께서는 언제나처럼 폐하의 건강을 기원하시렵니까? 건강을 기리는 초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부탁드려요. 아르노 백작 부인과 다보빌 백작 부인께서는 무슨 축원을 드릴 생각이세요?”

교회에서는 기도를 하며 축원의 내용이 조각된 초를 태우곤 했다. 초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며 신에게 인간의 소원을 전해준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오델리는 십 년 동안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은 교회에 와서 왕의 건강을 빌곤 했다. 주변에는 ‘폐하께서 오래오래 사셔야 나도 오래오래 즐긴다’며 농담 삼아 말하곤 했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이리 꾸준히 교회를 찾아오기는 힘든 법이다. 이러니저러니 투덜거리긴 해도, 그녀는 확실히 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카트린의 고민은 그리 오래지 않았다. 그녀가 기도할 대상은 남편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도 같은 거로 주세요. 남편의 건강을 빌고 싶어요.”

“저는 남편의 횡액을 막아주는 초로 부탁드려요. 아무래도 전쟁에 많이 출전하다 보니….”

비앙카 또한 자카리에 관한 초를 택했다. 건강과 횡액 중 잠시 고민했지만, 결국 횡액을 택했다. 건강을 걱정해 주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자카리는 단 한 번도 아팠던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비앙카가 툭하면 고꾸라져 침대에서 자리보전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시시각각 찾아오는 암살자의 불행한 그림자를 방비하는 쪽이 마음이 편했다.

예전의 비앙카였다면 이렇게 소원을 비는 것에 대해 회의적이었을 터였다. 소원을 빈다 하여 신께서 들어주시는 것도 아닌데,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지금의 비앙카는 자신을 회귀시킨 신의 기적을 믿었다.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필사적으로 매달리고 싶었다.

“그럼 그렇게 준비하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세 사람의 요청을 들은 요한이 빙긋 선량한 웃음을 지었다. 그때, 언제 말을 꺼내면 좋을까 눈치를 보고 있던 비앙카가 넌지시 운을 떼었다.

“아, 그리고 혹시….”

“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신도님.”

요한의 부드러운 분위기는 어려운 말도 쉽게 꺼낼 수 있게 해주었다. 종교를 믿는 신도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지곤 하기 때문인 걸까. 덕분에 비앙카는 주저하지 않고 질문할 수 있었다.

“혹시 교리에 관해 궁금한 게 있다면, 어떤 분을 만나 뵈어야 하나요?”

“교리 중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기적의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비앙카가 왜 그런 걸 궁금해하는지 알 수 없었던 오델리와 카트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속해서 미소를 띠고 있던 요한 또한 드물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기적의 사례라 함은 저와 같은 평사제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기적의 원리와 이치에 관해서는 대주교님 정도 되시는 분이셔야 납득할 만한 설명을 해주실 겁니다. 다만 대주교님께서는 무척 바쁘셔서….”

요한은 말끝을 흐렸다. 대주교는 요즘 교황청에 보낼 공물로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한창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었다. 식음도 전폐하고 공물을 고르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만큼, 비앙카의 청을 받아줄 확률은 극히 낮았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지만, 그의 주저하는 기색에서 만남이 불가하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다 하여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수는 없었다. 비앙카는 자신이 왜 선택되었는지, 어째서 회귀했는지, 회귀하여 미래를 바꾼 선례가 있는지 등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았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곳뿐이었다.

비앙카의 마음이 초조해졌다. 대주교나 되는 이라면 영웅인 자카리의 이름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왕의 명령으로도 움직이게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준비한 것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으로 대주교가 마음을 돌린다는 보장이 없는 만큼 비앙카의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녀가 대주교를 만남을 간절히 바라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내어줄 정도로 필사적이라는 사실은 숨겨야 했다. 애써 속내를 감춘 비앙카는 우아하고도 정중하게 말했다.

“제가 정말로 급하여 무례임을 알고도 부탁드립니다. 제가 대주교님의 귀한 시간을 막무가내로 요청드리는 건 아닙니다. 저의 신실하고도 진실된 마음을 보여드릴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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